112화
지미의 제2성 발현. 이미 며칠 내내 전조증상이 있었으니 놀랍지는 않은 일이었다. 키시아르 또한 같은 생각이었던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격리 전 영향을 받은 단원은 없었나? 다른 특이사항은?”
“다행히 저와 훈련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발현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다른 단원들은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발현열과 함께 느껴진 기운을 보면 아무래도 저와 같은 알파로 발현할 것 같으니, 변화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는 격리된 방에서 신과의 알파 단원들이 돌아가며 지미를 돌보게 할 생각입니다.”
단원 내에서 제2성을 발현한 이는 지미가 처음이었다. 꽤나 놀랐을 텐데도 에버의 답은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열 때문에 일단 해열 효과가 있는 약초즙을 먹이고 물수건을 올려주었습니다만, 대응은 이 정도면 충분할까요?”
그녀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키시아르가 이내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는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군. 갑작스러운 상황이었는데도 훌륭히 대처했네.”
에버의 눈가가 기쁨으로 살짝 붉어졌다.
“감사합니다. 전부 단장님께서 미리 방책을 알려 주신 덕분입니다. 저는 그대로 했을 뿐인걸요.”
“그 방책을 만들자고 한 건 여기 있는 보좌이니, 그 감사는 유더에게 돌리도록 하지.”
“유더가 말인가요?”
유더는 순식간에 화제가 제 쪽으로 돌아와 당황했다. 그를 돌아본 에버의 눈 속에 놀라움이 가득 차 있었다.
“…저는 그저 건의만 드렸을 뿐입니다. 규칙과 법으로 확실히 정리해 주신 건 모두 단장님 덕분이니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하하. 서로서로 공을 돌리는 모습이 보기 좋군.”
저는 좋지 않습니다. 유더는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을 삼켰다.
“저, 단장님. 그리고 또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보고를 끝낸 에버가 유더 쪽을 의식하며 말끝을 흐렸다. 아무래도 키시아르에게만 일대일로 말하고 싶은 사안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 기색을 눈치 빠르게 알아차린 유더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그러면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러게.”
키시아르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유더는 뒤늦게 테이블 가득 쌓인 빈 그릇더미를 발견한 에버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숙소를 나섰다.
다른 단원들의 시선을 피해 숙소 건물 지하로 향하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 가득 찬 생각은 지미의 발현 소식과 관련된 것뿐이었다.
‘역시 미리 제2성 발현 관련 규칙을 정해 놓자고 한 건 잘한 일이었어.’
이전 생에서는 단 내에서 갑작스레 제2성을 발현한 단원들 사이에서 꽤 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났다. 이번에는 그럴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다 시원했다.
‘그러고 보면 과거에 내가 발현했던 시기가 아마 이제…… 얼마 남지 않았던가?’
정확한 시기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발현 시기가 과거와 완전히 똑같으리라고 확신할 수 없으니 차라리 이편이 나았다.
‘제2성 발현을 앞둔 각성자가 흘리던 기운의 영향을 받아 주변의 미각성자들이 줄줄이 함께 각성했던 일도 예전에 꽤 있지 않았던가.’
제2성을 발현하기 전후의 각성자들은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특이한 기운을 뿌리는 경우가 많았다.
지미의 경우는 그저 미열만 조금씩 났을 뿐이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 미리 조심해 나쁠 일은 없었다. 유더는 혹 제가 갑작스레 발현할 때를 대비하여 슬슬 주변에 말을 흘려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규칙도 만들었고 주변에서 미리 경계해 준다면 이번에는 전처럼 갑자기 발작 같은 방식으로 발현이 찾아오더라도 대비할 수 있다. 지미의 선례가 있으니 그리 놀라지 않을 거고.’
이번에는 절대로, 발현을 앞두고 알파와 단둘이 있는 일은 생기게 만들지 않겠다. 유더는 주먹을 가볍게 말아쥐며 굳게 결심했다.
***
키시아르가 말한 대로, 붉은 돌은 마병단 건물 지하에 마련된 넓은 공간에 보관되어 있었다. 겉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창고처럼 보이는 입구 문을 두드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안쪽에서 눈만 겨우 내놓을 수 있는 조그만 구멍이 열렸다.
“아, 당신이셨군요!”
자기소개를 하지 않았음에도 안에 있던 이는 곧바로 유더를 알아보고 문을 열어주었다.
“언제 다시 뵙나 굉장히 고대했는데… 어, 음. 제 이름. 기억하시죠?”
“물론입니다. 알릭 펠긴 님이셨죠.”
유더의 짤막한 답에 노마법사의 제자, 알릭 펠긴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맞습니다. 다행이네요. 워낙 잠깐 뵈었던지라, 혹시 기억을 못하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그, 처음 뵈었을 때처럼요…….”
아무래도 말하면서 뭔가를 떠올린 듯 흐려지는 눈빛을 보니, 처음 보았던 때에 유더가 키올레 다 디아카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던 사건이 그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진 모양이었다. 유더는 대답 대신 마법사의 어깨 너머 펼쳐진 드넓은 공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건물을 받치기 위한 거대한 기둥들이 곳곳에 있는 것을 제외하면 이곳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저 멀리 테이블 위에 마련된 투명한 상자가 보이고, 그쪽에서부터 묵직한 기운이 미세하게 흘러나와 손끝이 살짝 저릿한 것이 느껴지니 거기에 붉은 돌이 보관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돌은 현재 저곳에 있습니까?”
“아, 네. 역시 바로 아시는군요. 따라오시죠. 보여드릴게요.”
유더는 알릭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붉은 돌이 내뿜는 기운도 점점 더 강해지는 것이 피부를 통해 확실히 느껴졌다.
하지만, 유더는 어쩐지 그 기운이 이전만큼 자극적이고 무겁지는 않다는 것을 깨닫고 의아함을 느꼈다.
‘뭐지?’
“아. 맞아요. 저기 천장에 있는 마정석들 보이시나요?”
유더의 의아한 표정을 눈치챈 듯 알릭이 입을 열었다.
“붉은 돌이 내뿜는 기운이 워낙 강해서, 스승님과 전 이곳에 오자마자 제일 먼저 결계진부터 만들어야 했죠. 귀한 걸 수십 개나 써가며 7중으로 진을 쳐서 겨우 이 정도로 약화시킬 수 있었어요. 저걸로도 완전히 누르진 못해서 스승님은 아직 더 보강할 생각이신 것 같지만요. 어떠세요. 숨쉬기 괜찮으신가요?”
유더는 그제야 드높은 천장 곳곳에 붙어 있는 마정석들을 인지했다. 자세히 보니 희미하게 알아보기 힘든 복잡한 마법진도 함께 그려져 있었다.
“…네. 한결 낫군요.”
“칸나 씨도 그렇다고 하더군요. 제대로 효과를 발휘한 것 같으니 기쁘네요.”
씩 웃은 알릭은 무척 뿌듯해 보였지만 유더는 마주 웃지 않았다.
“그런데… 율만 님께서는 어디로 가셨습니까?”
“스승님께서는 저희 숙소 방에 잠시 올라가셨어요. 곧 오실 겁니다. 아, 잠깐. 거기 멈추세요.”
알릭이 말을 하던 도중 갑자기 유더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 앞은 저희가 진을 하나 더 쳐 두었거든요. 여기서 보면 그냥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지만, 이렇게 하면……. 하하.”
알릭이 손을 복잡하게 휘휘 돌리며 흔들기를 반복하자 갑자기 아무것도 없던 공간이 흐릿해지며 풍경이 변했다. 멀리 보이는 붉은 돌은 그대로였지만 유더의 앞에는 아까까지 없었던 침낭 두 개와 테이블 하나, 의자 셋, 불꽃을 내며 타오르는 작은 마정석 난로가 갑자기 생겨난 상태였다.
“스승님께서 숙소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도 귀찮다고 여기다 두신 것들이에요.”
“단장님께 말씀드려 제대로 된 가구를 이쪽으로 옮기는 쪽이 낫지 않으시겠습니까?”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 유더를 보며 알릭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뇨 아뇨. 괜찮아요. 저희는 이것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저희 스승님이 복잡한 걸 싫어하시고, 워낙 이런 식으로 연구하면서 사는 데 익숙하다 보니까요……. 하하….”
웃고 있는 알릭의 얼굴에서 까다로운 스승을 모시는 제자의 애환이 은은하게 묻어났다.
“사실 저는 진을 쳐 두었어도 스승님 없이는 아직 여기까지 다가가는 게 한계거든요. 스승님이 오시면 함께 좀 더 가까이에서 보시겠어요? 아니면…….”
“그러면 여기 계십시오. 저 혼자 잠깐 보고 오겠습니다.”
어차피 중요한 것은 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법사들이 그사이 돌을 얼마나 파악했으며 앞으로 어떤 조사를 할 것인지 듣는 것이었다.
유더는 알릭을 뒤로 하고 성큼성큼 걸어 붉은 돌을 향해 나아갔다. 진이 쳐진 덕인지 이전에 비해 훨씬 쉽게 코앞까지 다가갈 수 있었다.
투명한 상자 안에 든 쿠션 위에 곱게 놓인 붉은 돌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달라진 모습이 전혀 없었다. 다만 노마법사가 무언가 장치를 해 두려 노력했는지, 상자 주변에 마정석 몇 개가 어지럽게 널려 있는 상태였다.
‘역시 아직까지는 크게 진행된 게 없나.’
“오, 손님이 오셨군.”
돌을 지켜보던 유더는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진주탑의 원로 마법사 타이스 율만이 웃는 얼굴로 그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아일 경. 오랜만일세.”
“오랜만에 뵙습니다, 율만 님. 제 이름은 그냥 유더라 불러주시면 됩니다.”
이전에는 키시아르가 함께 있던 상황이라 공식적인 호칭을 사용했지만, 앞으로는 자주 볼 사이이니 굳이 격식을 차려 좋을 것이 없었다. 노마법사 또한 같은 생각을 한 듯 냉큼 유더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지.”
흰 수염을 멋지게 기른 노마법사는 진주탑의 원로답지 않게 평범한 회색 로브를 걸치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젊은이처럼 반짝였다. 피로에 반쯤 찌들어 있는 그의 제자와는 딴판이었다.
“돌을 보러 오셨는가?”
“아닙니다. 조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말씀을 듣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아. 그쪽이었군.”
고개를 끄덕인 타이스 율만이 붉은 돌 쪽을 돌아보며 살짝 굽은 코끝을 찡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