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111화 (111/805)

111화

“마병단 앞으로 온 행사 참가 요청들이 늘어난 건 본래 좋은 일이겠지만, 그 정도가 조금 심해. 단순 참가 요청 이외에도 치안 협력 요청이 몇 개나 있고, 하나같이 전부 외국 사절들이 참여하는 중요한 행사더군. 게다가 단이 생긴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황궁에서 열리는 연내 최대 규모의 파티에 전 단원이 참석해 달라는 건 대체 무슨 의도로 생각하면 좋을까?”

“누군지 몰라도 마병단이 거절하지 못할 판을 만들 생각인가 보군요.”

유더의 답에 키시아르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내가 답을 할 때까지 관련 사항을 비밀에 부쳐야 한다는 규칙조차 대놓고 어겼어. 단원들뿐만 아니라 온 수도 내에 이미 관련 사항이 퍼져나가고 있다더군.”

수도에서 열리는 추수철 축제는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규모를 자랑했다. 태양신 신전 본산에서 교황이 직접 야외 예배단에 올라 펼치는 예배와 기도행사, 황궁기사단과 특별히 선출된 제국군 정예병, 각 지방의 유명한 기사단과 마법사들이 동원된 화려한 행진,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행사와 대회들이 며칠 내내 도시 곳곳에서 열렸다.

수많은 외국 사절들과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행사에 공식적으로 참가할 수 있게 되는 것만큼 명예로운 일은 없었다.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한 마병단을 전 대륙에 알리기 위해서 이번보다 좋은 기회는 없다.

아마 갑작스럽게 제안을 해 온 배후 또한 그것을 알고 있기에 대놓고 판을 벌였을 터였다.

“그래도 거절하려면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할 수 있지.”

웃음기 실린 대답이 돌아왔다.

“단장님께서 거절하시겠다면 그저 그뿐인 일입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내가 이 지나치게 좋은 떡밥을 수상히 여겨 물지 않는 것이 과연 최선이라 보는가?”

5개째 케이크를 가볍게 자르던 포크 끝이 멈추었다. 유더는 무언가를 기대하듯 저를 바라보고 있는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바로 이 질문이 그가 자신을 부른 본 목적일 것임을 깨달았다.

“…제가 뭘 알겠습니까? 제 생각 따위가 단장님의 큰 결정에 그리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일단 한 번 튕겨 보았지만 키시아르는 능구렁이처럼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있겠나. 유더 자네의 색다른 시선은 언제나 내게 도움이 되었다네. 이런 일에 의견을 더해 주는 것도 보좌가 할 일이니 편히 말해 주면 고맙겠군.”

‘그렇게 나온다면야 뭐…….’

유더는 키시아르의 눈동자를 닮은 체리에 포크를 찌르며 입을 열었다.

“사실 답은 이미 결정해 두신 것 아닙니까?”

“흠?”

“이렇게 판을 벌여 놓고 부르는 이유야 뻔하지 않겠습니까. 마병단의 이름을 전 대륙에 부정적으로 알려주고 싶은 것이겠지요. 단장님께서 거절하신다 해도 사실 행사에 분탕질을 치려면 얼마든지 칠 수 있을 텐데, 누군지 모를 상대방은 아마 그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유더의 말에 키시아르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팔걸이에 얹은 손 위에 우아하게 턱을 괴었다.

“그래서?”

“저야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만, 단장님께서는 충분히 짐작하실 수 있으시겠죠.”

유더는 어젯밤 키시아르가 누가 배후에 있을지 대충 짐작이 간다는 말을 했던 것을 떠올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적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면 무엇을 할지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습니다. 저쪽에서 굳이 좋은 기회를 떠먹여 주겠다는데 괜히 물러서는 것보다는 미끼를 문 척하며 이용해 주는 쪽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자네라면 그렇게 하겠다는 뜻인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으시는 단장님이라면 그렇게 하실 것이라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체리 조각과 생크림 케이크 한 덩어리가 유더의 뱃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하하.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

키시아르가 밝은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자네는 그런 건 전혀 안 할 것 같은 얼굴로 은근히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말에 능하단 말이지.”

“진심을 담았을 뿐입니다.”

“아첨을 하면서 오히려 벽을 치는 건 세상에 자네뿐일 거야.”

그렇게 말했지만 키시아르는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사실, 자네 말대로라네. 나는 이미 그 제안들을 받아들이겠다고 답을 보냈어.”

유더의 생각대로 키시아르는 이미 답을 내린 상태였다.

“이전까지는 필사적으로 내 연락을 피하려 들던 궁내부에서 알아서 찾아오다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지 않겠나. 누군가는 전 대륙 앞에서 마병단이 우스꽝스러운 광대가 되어주길 바라며 덫을 던진 모양이지만 나는 순순히 당하지도, 도망치지도 않을 거라네. 생긴 지 얼마 안 되었고, 내 단원들이 아직 여러 방면에서 미숙하다 할지라도 그게 우리가 실패할 이유는 되지 못해.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그 자신감 넘치는 느른한 목소리에 순간 등 뒤로 가볍게 전율이 흘렀다. 유더는 빛나는 붉은 눈을 향해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네.”

“나와 내 보좌의 생각이 같아 정말로 기쁘군. 한동안 정신없이 바빠지겠지만, 부디 보란 듯이 성공해 보자고. 아마 재미있는 구경을 할 수 있을 테니까.”

그 말을 들으며 유더는 마지막 케이크를 모두 먹고 포크를 내려놓았다. 달콤한 뒷맛이 입 안에 가득해 혀가 아렸다.

“그런데 대체 이번 일의 배후는 누구입니까. 이제 알려 주셔도 되지 않습니까?”

“그 똑똑한 머리로 한번 맞춰 보겠나?”

“단장님.”

유더의 낮게 깐 부름에 키시아르가 눈을 휘어 웃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

“며칠 전 궁내부에 갑작스레 황태자의 시종들이 들이닥쳤다더군. 어제도 붉은 허리띠를 두른 시종이 그곳에 드나드는 것을 보았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아무래도 황태자가 이번 행사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지.”

뜬금없이 말을 돌리는 것 같은 답이었지만, 속뜻을 추측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카치안 라 오르 황태자.’

유더는 얼마 전 황궁에 갔을 때 잠시 마주쳤던 소년 황태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린 듯한 미소 아래 차가운 시선을 감춘 그 소년의 뒤에 누가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디아카 가에서 손을 댄 건가.’

혹 키올레가 얽혀 있는 하르탄 사건 때문일까 싶었지만 유더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서약에 묶인 키올레는 집안에 아무것도 알릴 수 없다. 게다가 며칠 전부터 궁내부에 드나들며 손을 써 왔다면 이번에 일어난 그 일 때문은 아닐 터였다.

“그리고… 얼마 전 이곳에 방문했던 갈론 백작을 기억하나?”

열심히 이유를 생각하던 유더에게 키시아르가 다른 말도 한마디 던졌다.

갈론 백작.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이라 생각하며 기억을 더듬던 유더는 한참 만에야 겨우 그가 누구인지 기억해냈다.

‘아. 칸나를 내놓으라고 왔었던 그자.’

실컷 혼쭐을 내고 쫓아낸 뒤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네. 기억합니다.”

노골적으로 찡그린 유더의 표정을 보며 키시아르가 유쾌하게 웃었다.

“뭐, 다시 기억하려 애쓸 필요는 없네. 그자의 소문이 퍼진 덕에 마병단에 관심이 생긴 이들이 꽤 많아졌거든. 아마 이번 축제 동안 그 사건과 관련된 단원을 찾으려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대충 모른 척하게. 아까 황궁에서 왔던 전령도 내게 그 소문이 진실인지 은근히 떠보더군.”

“아… 네. 알겠습니다.”

떨떠름하게 대꾸한 뒤 유더는 그 말 또한 키시아르가 준 힌트임을 한 박자 늦게 알아차렸다.

‘그렇군. 그 소문 때문에 마병단이 가진 힘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보고 싶어진 것뿐인가…….’

그렇다면 키시아르가 여유롭게 군 것도 이해가 되었다. 아직 마병단이 어느 정도 힘을 지녔는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들을 우습게 보고 내놓은 덫을 기회로 만들기에는 최선의 때라고도 볼 수 있었다.

유더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키시아르는 청산유수로 말을 이어나갔다.

“자, 그러니 오늘부터 전체 훈련은 절반으로 줄이고 각 행사에 참여할 인원을 나눈 뒤 연습을 시킬 생각이라네. 자네와 나단, 그리고 각 과의 부단장들이 많이 노력해 주어야 할 텐데 자네의 경우는 특별히 더 해 주어야 할 일이 있지.”

“붉은 돌 조사 말입니까?”

“그것도 있지만, 하나 더.”

키시아르가 아무렇지 않게 일거리를 하나 더 얹겠다는 선언을 했다.

“잊었나? 휴가 전 자네가 했던 요청. 단원들의 훈련 관련 권한을 달라고 했었지.”

“아…….”

그랬었다. 유더가 고개를 끄덕이자 키시아르가 인장이 찍힌 종이 하나를 기다렸다는 듯 건네주었다.

“승인은 이미 끝냈네. 가케인과 칸나를 상대로 보여주었던 자네의 개인 훈련은 대단히 인상 깊었어. 이제 데브란 하르투데도 돌아왔으니, 그 능력을 전 단원들을 상대로 확장할 때가 된 것 같지 않나?”

어차피 그럴 생각으로 권한을 요청한 것이 아니냐는 확신을 담은 붉은 눈을 보니 할 말이 없어졌다.

‘그래, 뭐… 어차피 해야 할 일들이었으니까.’

이전 생에서도 했던 일이니, 두 번 한다고 달라질 것 없다. 유더는 승인서를 받아들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때, 규칙적으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장님. 에버 벡입니다. 급히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잠시 유더를 향해 눈을 돌렸던 키시아르가 이내 입을 열어 “들어오게.” 하고 명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에버는 급히 뛰어온 듯 뺨이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는 단장과 마주 앉아 있는 유더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침착한 눈빛을 되찾고 가까이 다가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무슨 일이지?”

“방금 지미 오커의 제2성 발현이 시작되었습니다. 미리 준비해 둔 대로 격리 후 보고드리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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