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유더의 머릿속에 남은 펠레타 기사단원들은 말수가 적고 길잡이 역할을 잘하며 실력은 나단 주커만을 빼면 거의 변변찮았던 이들이었다.
‘그래도 노숙할 때 요리는 잘 했었는데…….’
몇 되지 않는 키시아르의 정보 중 어느덧 마지막 문장에 다다랐다.
- 본래 황태자 자리는 키시아르 라 오르의 것으로 내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20여 년 전 황실 회의에서 당시 태후였던 이넬라 라 오르의 강력한 의견 발휘로 인해 케일루사 라 오르가 황태자 책봉을 받게 되었다. 선황과 이넬라 태후는 해당 문제를 두고 몇 년이나 크게 싸워 감정이 서로 좋지 않았다는 말이 전해진다.
본래 황태자 자리는 키시아르의 것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몇 번을 읽어도 그 문장은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유더는 해당 부분이 적힌 종이를 이논에게 내밀며 입을 열었다.
“이논. 이 부분, 근거가 있어?”
“그건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이들의 주변인들이 아직 많이 살아 있으니 꽤 확실한 정보야.”
유더가 짚은 부분을 본 이논이 심드렁하게 대꾸했지만 그래도 믿을 수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키시아르가, 황태자가 될 뻔했다고?’
아무리 오르 제국 황실이 황태자를 나이로 정하지 않고 황자들이 어느 정도 자란 뒤에야 회의를 거쳐 뽑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지만, 키시아르가 어쩌면 지금쯤 황제의 자리에 앉아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이상해졌다.
‘…상상이 잘 안 되는데.’
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났다면 나쁘지 않았을 것도 같았다.
키시아르 라 오르는 유더가 보아 온 모든 지도자 중 가장 완벽했던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기사단 하나나 마병단 하나를 책임지는 정도의 능력과 나라 전체를 책임질 능력은 다르다고들 말하지만, 과연 정말 그럴까?
이전의 생에서 보았던 카치안 황제보다는 적어도 키시아르의 능력이 훨씬 낫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처럼 아랫사람을 신경 쓰고 직접 나서려 하는 윗사람을 또 본 적은 없기에 황제로서의 모습은 상상이 잘 안 되지만, 그런 황제가 세상에 하나쯤 있었어도 나쁠 것은 없지 않은가?
이전 생에서 모셨던 황제가 키시아르 같았다면 유더 또한 꼭 필요하지도 않은 위험한 암살이나 파괴 임무를 처리하느라 부상을 달고 살던 때보다 훨씬 행복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유더는 문득 점점 더 말도 안 되는 지경으로 발을 뻗으며 나아가는 가정을 깨닫고 생각을 멈추었다.
한번 공작이 된 이상 어차피 키시아르는 무슨 일이 있어도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는 없다. 그렇기에 현 황제 케일루사 라 오르도 양자를 들인 것이 아니던가.
게다가 결국 지난 생에서 키시아르를 죽인 것은 유더 자신이기도 했다.
‘그런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어차피 이번 생에도 키시아르는 이미 공작이 되었다. 바꿀 수 없는 부분에 미련을 두기보다는 바꿀 수 있는 것들을 우선 생각해야만 했다. 유더는 지나치게 뻗어가려는 상상을 그만두기로 했다. 입맛이 썼다.
“표정을 보니 이 정도 정보로는 마음에 안 드나 보지?”
그때, 시기적절하게도 이논이 말을 걸어왔다. 유더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 뭘 알아보아야 할지 실마리 정도는 잡을 수 있었던 것 같으니 괜찮아. 지금 당장은 이 정도로도 충분해.”
“지금 당장이라니. 무슨 소리야? 이번이 끝이라고 했잖아.”
“글쎄… 정말로 그럴 수 있겠어?”
유더는 이논을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논. 한번 나를 알게 된 이상 네 성격으로는 내가 무슨 일을 할지 궁금해서라도 계속 관심을 두게 될 텐데, 어차피 소득도 없을 내 뒷조사를 하느니 그냥 대놓고 무슨 일을 하는지 함께 지켜보는 쪽이 낫지 않을까.”
“무, 무슨 소리야.”
역시 유더가 떠나자마자 뒷조사를 할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인지, 이논이 말을 더듬으며 버럭 소리를 쳤다.
“내가 왜 네놈에게 관심을 둬? 난 네가 말한 미래에서 돌아왔다는 둥의 헛소리 같은 건 믿을 생각도 없고, 관심은 더더욱 없어. 내 정체를 알고 있으니 대가로 한 번 도와준 것뿐이고 그것으로 끝이야! 끝!”
“그래. 그렇게 말한다면야.”
아무리 보아도 이논의 표정은 그 반대를 말하고 있기에 웃음이 나왔지만, 유더는 미련 없이 종이뭉치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와줘서 고마웠어.”
어차피 아직 시간은 충분히 있다. 유더의 말이 옳은지, 이논의 말이 옳은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판가름이 날 터였다. 유더는 제 뒤를 따라 걸어오는 이논이 짓고 있을 찌푸린 표정을 떠올리며 소리 없이 웃었다.
“이논. 혹시 무슨 일이 생기거나 나를 찾아오고 싶으면 황궁기사단 부지 내에 있는 마병단 숙소로 연락해.”
“안 할 거거든?”
“혹시 필요할 수도 있으니, 이걸 하나 두고 갈게.”
유더는 미리 챙겨 온 제복 단추 하나를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마병단원의 신분증을 대신할 수 있도록 이름이 적힌 마정석 단추의 여분이었다.
“내 말 듣고 있는 거냐? 안 할 거라니까? 도로 가져가! 야! 이 자식아!”
무어라 소리치는 이논을 뒤로 하고 문을 열자 밝은 햇살이 내리쬐어 눈이 부셨다.
“야!”
그러나 유더가 완전히 나가기 전, 달려 나온 이논이 소매를 붙잡았다. 단추를 돌려주려는 것이라면 정말로 버려도 되니 괜찮다고 말하려 했지만, 마주친 시선 속의 표정이 방금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진짜 망할 자식이네. 너, 아무래도 그냥 보냈다 어디서 쓰러져 죽기라도 하면 내 올해 운이 완전히 끝장날 것 같으니까 이거나 가져가.”
이논이 유더의 오른손 안에 무언가를 강제로 밀어 넣었다. 단추의 촉감은 아니었다. 뭔가 싶어 손을 펴 보니 약간 낡은 티가 나는 붉은 끈이 보였다.
“이게 뭔데.”
“알아서 뭐 하게?”
그렇게 말했으면서 이논은 이내 코끝을 찡그리며 설명해 주었다.
“대충 부적 같은 거야. 아무 데나 늘 지니는 물건에 대충 매달아.”
“이걸 왜 주는데?”
“아 정말!”
유더의 질문에 이논이 벌컥 소리를 치며 제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너, 오늘 오기 전에 뭘 하고 다닌 건진 모르겠지만 전에 왔을 때보다 기운이 훨씬 불안정해. 신성력으로 대충 진정시킨 모양이지만 계속 그러고 다니면 신도 네놈 목숨을 지켜주진 못할 거다. 아무튼 죽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가져가!”
쾅. 말이 끝나자마자 눈앞에서 약 가게 문이 부서질 듯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유더는 머리 위로 우수수 떨어지는 오래된 먼지를 맞으며 작게 기침을 했다.
‘그냥 평범해 보이는 끈인데……. 대체 무슨 효과가 있는 거지.’
* * *
돌아온 마병단은 아직도 추수철 축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유더가 잠시 밖에 나갔다 돌아온 것을 깨달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숙소 테이블 위에 쪽지를 확인하는 대로 단장 숙소로 올라오라는 전언이 쓰인 작은 종이가 놓여 있었기에 유더는 곧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
“부르셨습니까.”
“일찍 왔군. 마침 선물로 들어온 케이크가 있어 먹던 중인데 와서 같이 들겠나?”
어제 늦게까지 일을 했던 것이 환상이었던 양 말끔한 얼굴로 차와 간식을 먹고 있던 키시아르가 여유롭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나단 주커만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보자 아까까지 이논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올랐지만, 유더는 한숨을 한 번 작게 내쉬고 이내 아무 일도 없었던 표정을 가장하며 그의 앞에 앉았다. 키시아르가 기다렸다는 듯 제 앞에 놓인 케이크 접시를 유더에게로 밀어주었다.
종류도 다양한 여러 가지 케이크는 보기만 해도 몹시 달아 보였다.
“선물로 들어온 것을 제가 먹어도 되겠습니까.”
“사양 말게. 추수철 때문에 들어온 것들이라 어차피 누가 보냈는지도 모르니까.”
오르 제국에는 추수철 축제를 전후하여 음식 선물을 주고받는 전통이 있었다. 평민들 사이에서는 풍족한 추수의 기쁨을 나누고자 갓 농사지은 곡식이나 과일을 나누는 정도에서 그치지만 귀족들은 달랐다. 그들은 누가 더 고급스럽고 귀한 음식을 내놓는지 재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그 전통을 이용하고는 했다.
유더 또한 이전 생에서는 이 시기마다 얼굴도 모르는 귀족들이 무작정 보내는 고급 과자나 희귀한 식재료를 전부 소진하지 못해 받는 족족 마병단 식당 쪽으로 내려보내고는 했었다.
순수한 의도를 가지고 보내는 일은 거의 없고, 대부분은 나중에 제 가문을 한 번 잘 봐달라는 검은 의도를 가지고 보내는 것이라 먹기가 무척 찝찝했다. 아마 키시아르에게 온 것도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포크는 아무거나 쓰게.”
유더는 접시마다 옆에 곱게 놓여 있던 새 포크 중 하나를 대충 집어 들고 케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혀가 녹을 만큼 단맛이 났다.
전통에 따르면 격식 있는 귀족은 한 개의 수저와 나이프로 한 접시 이상의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되었기에 마련해 놓은 수많은 포크였지만, 어차피 유더는 그런 격식 따위를 신경 쓸 마음이 없었다.
키시아르 본인조차 아무것이나 쓰라고 말하는데, 제가 신경 쓸 이유가 무언가.
“케이크를 좋아하나? 굉장히 잘 먹는군.”
“딱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걸 물으시려고 부르신 건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내 보좌와 다정한 잡담 한마디 못 할 정도인가?”
그렇게 말한 뒤 키시아르는 곧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네도 들었겠지? 오늘 아침부터 단 내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일에 대해서 말이야.”
“황궁에서 왔다는 전령 이야기라면 들었습니다.”
“그래. 어젯밤 편지에서 보았을 이야기의 연장선이지. 일이 조금 귀찮게 되었어.”
키시아르가 꺼낸 이야기는 오기 전 예상했던 주제를 벗어나지 않았다. 유더는 3개째의 케이크를 입 안에 묵묵히 욱여넣으며 그의 말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