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내가 왜 널 지켜봐야 하는데? 도움을 주는 건 이번만이라고 분명히 말했었을 텐데?”
말은 그렇게 해도, 이논은 결국 말만큼 모질지도, 무심하게 굴지도 못하는 이다. 그것은 그에게 여러 번 도움을 받았었던 유더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내가 살리려는 사람에는 키시아르 라 오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 또한 포함되어 있다. 과거의 무지로 인해 잃어버린 더 많은 사람들 또한.
유더는 이논에게 하지 못할 말을 삼키며 손을 내밀었다.
“그거, 안 줄 거야?”
“…너, 정말 반역하려는 놈 아니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했음에도 영 불안했는지, 이논이 종이를 주기 전 다시 한번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아니야.”
“…….”
단호한 대답을 듣고 나서도 약간 망설이던 이논이 천천히 유더에게 종이를 건네주었다. 유더가 그것을 펴고 읽기 시작하자 그가 수상한 놈을 보는 눈빛을 지우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참고로 그거, 여기서 다 읽고 가야 해. 외부 반출은 절대 불가야.”
“알겠어.”
극비 기밀은 그런 식으로 앉은 자리에서 빠르게 읽고 처분하는 일이 대다수였기에 유더는 놀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개 평민 출신 단원이라기에는 너무나 능숙하게 어려운 말이 가득한 글을 읽고 있는 데다 기밀을 다루는 행동에도 익숙해 보이는 모습을 보며 이논의 눈빛이 혼란스럽게 변했다.
저런 눈빛을 짓기에는 너무나 이른 시기인데, 대체 저 익숙해 보이는 모습은 무어란 말인가.
이논이 그런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유더는 제 손에 들린 자료에만 집중했다. 이전 생에서 한 번도 자세히 궁금해했던 적이 없었던 황실과 관련된 정보가 종이 위에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대부분은 이미 대충 알고 있던 내용이군…….’
‘라 오르’라는 황가의 성을 지닌 채 공작이 된 이는 현 펠레타 공작 키시아르 라 오르를 포함하여 총 10명이었다.
제국의 천년 역사를 생각하면 생각보다 적은가 싶기도 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열이나 되는 이들이 역사에 거의 기록되지 않은 채 잊혀진 것이다.
그들에 대해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는 거의 없었다. 생몰년도와 공작으로서 다스렸던 영지 이름 정도가 다였다.
라 오르의 성을 지닌 공작들은 공통적으로 황자 시절 정상적으로 살아가기 어려울 정도의 흠을 지녔다는 소문이 돌았고, 거의 이름뿐인 공작 작위를 받음으로써 황위 계승권을 영원히 박탈당하는 대신 죽을 때까지 목숨과 안위를 보장받았다.
유더는 알고 있는 정보들이 적힌 부분을 넘기려다 문득 한 부분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키시아르 이전에 라 오르의 성을 지녔던 공작들의 묘비에 적힌 생몰년도를 옮겨 적은 부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들 정말 빨리 죽었군.’
적힌 대로라면 9명 모두가 30세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힘겹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평민들도 대부분 50세 이상은 산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랬다.
‘큰 흠이 있었다는 게… 정신적인 부분 외에도 신체적인 부분을 포함했던 건가.’
“공통점이 꽤 여럿 있지. 모두 일찍 죽었고, 결혼하지 않았고, 자식이 없었고, 대외활동을 극도로 자제했어. 죽음조차 영지 내에서 맞이한 걸 보면 거의 연금 수준이야.”
유더의 시선이 어디에 멈추어 있는지 알아챈 듯 이논이 찌푸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네가 지키겠다던 키시아르 라 오르 이외에는 수도 사교계에 얼굴을 비춘 이조차 없어. 남은 초상화도 극소수에, 황자 시절부터 아예 먼 지방에 격리되어 자란 사람도 6명이나 되었으니까. 그런데 말이야, 더 재미있는 게 뭔지 알아?”
“뭔데?”
“10명 중 6명이 최근 300년 사이에 태어났었다는 것.”
그 말을 듣고 다시 한번 종이를 내려다보자 과연 이논의 말대로였다. 유더는 키시아르를 포함해 총 6명이 근 300년 사이에 태어났음을 알아차리고 눈을 크게 떴다.
“라 오르의 성을 지닌 공작이 처음으로 나타난 게 제국이 세워진 지 200년 뒤라는 걸 생각하면 정말 이상하지. 나조차 이번에 조사하면서야 알았으니까.”
“그렇다면 역시… 황가의 혈통과 관련된 문제인가.”
유더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어떤 가정을 생각하며 입을 열자 이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타당하겠지.”
오르 제국의 황가는 태양신의 피를 물려받았다 일컬어지며 오래도록 추앙받았다. 지금은 과거에 속국이었던 나라들이 독립하거나 힘을 키우면서 대륙의 정세가 많이 바뀌어 오르 제국이 예전처럼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하게 되었다지만, 그래도 대륙에 사는 이들은 제국 황가에 대한 경외감을 어느 정도씩은 지니고 있었다.
물려받은 피에 걸맞은 뛰어난 능력과 압도적인 외양이 축복받은 혈통을 증명하며 그러한 경외심을 뒷받침해 왔지만, 그 완벽하다 일컬어지던 혈통에 사실 문제가 있었다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신을 부정하는 것 같은 불경한 추측이었다. 하지만 유더는 황족도 결국 그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게 된 지 오래였다.
‘그들도 결국 인간이야.’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문제와 맞닥뜨린 인간들 중 많은 수는 문제를 회피하고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잘 숨기기만 하면 그만이라 여기고는 한다. 마치 키시아르를 포함한 10명의 황족에게 주어진 허울뿐인 공작 작위처럼 말이다…….
“남은 기록이 극도로 적어서 라 오르의 성을 지닌 공작들에게 정확히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아. 하지만 그게 신체 쪽이 아닐 확률은 높지. 몸이 좀 불편하다고 해서 계승권을 박탈당한 적은 없었잖아? 그 뭐냐, 태어날 때부터 다리가 불편했던 틸라르나 황제나 전쟁하다 반신이 마비되어 돌아왔던 지크에임 황태자처럼.”
“음. 확실히…….”
유더는 이논의 가정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대 황제 중에는 날 때부터 몸이 불편했거나, 혹은 후천적으로 몸에 문제가 생긴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황족으로서의 능력에 의문을 표한 이가 존재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정신 쪽인가? 그렇다기엔 키시아르는 멀쩡하기 그지없는데.’
분명 이전에 존재했던 9명의 공작과 키시아르 사이 무언가 공통되는 결함이 존재했기에 ‘라 오르’의 성을 유지하는 공작 작위를 얻게 되었을 텐데… 아직까지는 영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유더는 생각에 잠긴 채 종이 뭉치를 넘겼다. 다음 페이지에는 죽은 9인의 공작들과 관련한 생전의 소문이나 남은 기록을 모아 둔 부분이 있었다. 대부분은 헛소문에 가까운 말도 안 되는 소리였으나 그중 공통적으로 보이는 어떤 부분에 유더는 집중했다.
- 사망 전, 몇 달 사이 단시간에 쇠약해졌는데 그 모습이 마치 전신의 피를 몬스터에게 빨린 시체 같았다.
- 사망 전 공작을 목격한 이들은 하나같이 이전의 외모는 간 곳 없이 바짝 말라 죽은 자처럼 어두워진 모습에 경악했다고 한다.
비슷비슷한 이야기 중 제일 자세한 것은 가장 최근인 33년 전 사망한 9번째 공작, 라플레임 라 오르 때의 정보였다.
- 요즘 전하는 날이 갈수록 쇠약해지신다. 이제는 스스로 걸을 수조차 없어 고통스러워하시지만 더 이상 그 어떤 진통제도 듣지 않는다. 나는 전하의 뜻에 따라 조만간 성에서 일하던 이들 중 황궁에서부터 모신 이들을 제외하고 모두 내보내기로 하였다. 부디 떠나시는 날까지 편안하시기만을 바라는 마음이나, 불행히도 이전의 사례를 보면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건 누가 남긴 정보지?”
“그거? 공작의 측근이 형제에게 보낸 편지.”
도대체 공작의 측근씩이나 되는 이가 혈족에게 보낸 편지를 어디서 구해 참고 정보로 집어넣은 것인지 몹시 궁금했으나 이논이 거기까지 답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공작의 측근이 남긴 정보라면, 이전의 사례라 언급한 건 아마 이전에 같은 신세였던 공작들을 지칭한 것일 가능성이 높겠지.’
그렇다면 대외적으로만 철저히 극비일 뿐, 황족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는 뜻일까.
유더는 이전 생에서 키시아르가 죽기 직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이 정보들에 나온 것처럼 사망 직전 몇 달 사이에 급격히 시체처럼 비쩍 말랐다거나 스스로 걷지도 못할 만큼 쇠약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때의 키시아르가 지금과 달리 언제나 피로한 모습에 날이 갈수록 말라 갔던 건 사실이지.’
키시아르는 마병단 단장 자리를 내려놓기 전부터 그런 상태였다. 그러니 이 정보에 나온 공작들과 공통점이라 볼 수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유더는 어쩐지 계속해서 그 정보가 신경 쓰였다.
“네가 찾던 키시아르 라 오르에 대한 건 마지막 장에 있어.”
유더가 온갖 소문으로 가득한 종이 뭉치를 성의 없이 넘기고 있자 이논이 몸소 찾던 부분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었다. 그의 말을 듣고 마지막 장을 앞으로 가져오자 다른 장에 비해 다소 간략하게 적힌 정보들이 보였다.
“이게 끝?”
“현재 살아 있는 놈에 대한 거라 누구나 알만한 건 뺐어. 대외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것만 남긴 게 그 정도야.”
이논의 말은 옳았으나, 문제가 하나 있었다. 유더가 이전 생에서부터 키시아르와 나름대로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보니, 쓰인 정보의 대부분을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신검의 새로운 소유자가 되었다는 소문. 이건 사실이고……. 신력을 쓸 수 있다고 한다. 이것도 사실이잖아. 어린 시절 궁중마법사 원로들에게 마법을 배웠다는 소문… 이것까진 모르겠군. 그냥 마도구를 많이 가지고 다녀서 오해를 산 게 아닌가 싶지만…….’
유더는 이전 생에서부터 키시아르가 특수한 마도구를 이용해 자유자재로 얼굴을 변형하고 다니거나, 숙소 바깥을 드나드는 모습을 보았다. 요즘은 잘 안 쓰고 있지만 그것이 마도구 때문인 줄 모르는 이가 그런 모습을 보았다면 오해할 만도 했다.
‘펠레타 영지 내에서 기르는 사병이 사실 대단한 무력집단으로, 언제든 황제의 명이 떨어지면 수도로 달려와 반역자들을 처단할 수 있다고 한다……. 이건 진짜 헛소문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