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한참 동안 죄 없는 과일을 죽일 듯 노려보던 이논이 잠시 후 카운터 너머로 손을 내밀었다. 유더는 그의 손 위에 레몬을 얌전히 올려주었다.
“……누가 알려줬어? 내가 이거에 환장하는 거.”
죽일 듯 욕을 하던 방금과 달리 확연히 누그러진 목소리로 이논이 물었다. 유더는 이전 생에서 종종 레몬을 생으로 몇 개나 우적우적 씹어 먹던 이논을 이해할 수 없다 여겼던 기억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지금은 알려줄 수 없어.”
“또 그 소리냐? 젠장.”
이논이 무어라 욕을 하며 레몬을 껍질째로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보기만 해도 입 안이 타들어갈 것 같은 기분이었으나 그는 아무렇지 않게 모두 삼켰다.
“맛은 좋네. 제길.”
순식간에 레몬을 먹어 치운 뒤 이논은 비로소 분노를 거두고 유더를 똑바로 마주해 주었다.
“날 부려먹고 늦기까지 했는데 봐 주다니, 영광인 줄 알아. 따라와.”
이논이 들어선 가게 안쪽은 여전히 오래된 잡동사니 투성이였으나 그래도 손님이 앉을 만한 테이블과 작은 의자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유더는 한쪽 벽에 걸려 있는 무늬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낡은 붉은색 천과 문가 근처에 대충 기대 놓은 녹슨 검 몇 자루, 한쪽이 푹 꺼진 침대를 바라보았다. 모두 다 이전 생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아 만감이 교차했다.
“거기 멍청하게 서서 뭘 해? 여기 앉아.”
이논이 테이블에 앉아 불퉁한 얼굴로 손짓을 했다. 유더는 의자 위를 차지한 오래된 책더미를 치우고 그의 앞에 앉았다.
“역대 공작 중 라 오르의 이름을 가졌던 이들의 정보가 필요하다고 했었지.”
“거기에 키시아르 라 오르.”
유더가 말을 덧붙이자 이논이 미간을 찡그렸다.
“아 그래. 아무튼 너도 상식이 있다면 알겠지만 조사하는 게 쉽지는 않았어. 라 오르의 성을 가진 공작을 찾으려면 결국 왕실 족보를 뒤져야 하고, 네놈이 원한 건 또 그 이상의 정보였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이논이 품속에서 꺼낸 것은 꽤 두텁게 말려 있는 종이 뭉치였다.
“하지만 네가 늦게 와준 덕에 시간이 남아서, 대충 이 정도는 모을 수 있었지. 이 대륙 어디를 가도 이만큼 자세한 정보를 찾긴 어려울 거다.”
“고맙…….”
“그 전에.”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종이를 받으려 뻗었던 유더의 손을 이논이 찰싹 쳐냈다.
“받고 싶은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지. 어딜 당연하단 듯이 받기만 하려고 해?”
“루마의 가디언이란 이름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부족해?”
유더의 질문에 이논이 벌컥 화를 냈다.
“당연히 부족하지! 넌 대체 누구야? 어디서 뭘 하는 놈이고? 나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았는지부터 말해. 그러지 않으면 이건 그대로 태워버릴 거야.”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려는 듯, 그는 종이 뭉치를 꽉 움켜쥐고 테이블 위에 쌓여 있던 잡동사니 사이에서 성냥을 꺼내 가까이 들이댔다. 종종 폭발하는 조잡한 물건이지만 비싼 마정석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빠르게 불을 붙이기에는 충분할 터였다.
유더는 그의 굳은 표정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이논은 이전 생의 경험을 통해 무슨 일이 있어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 결론지은 지 오래였다. 제 정체야 곧 알려 줄 생각이었으니 지금 말한다 해도 상관없지만, 이논의 이름을 어떻게 알았는지 말하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였다.
‘……믿어줄까?’
한 번 죽고 다시 깨어났더니 11년 전으로 돌아와 있더라는 말을 대체 누가 곧이곧대로 믿어줄 수 있을까? 하지만 유더는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그 말을 쉽게 믿어줄 만한 사람이 눈앞의 이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천 년도 전에 존재했던 대마법사의 가디언이라는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존재인 그라면 유더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믿어줄 확률이 높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내 쪽에서 이논의 정체를 궁금해하고 의심했었는데… 이런 식으로 반대가 될 줄이야.’
그는 과연 유더의 말을 믿어 줄까. 그라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을까.
유더는 쓴 미소를 지우며 이논의 레몬처럼 샛노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알겠어. 말할게. 내 이름은 유더 아일이야. 평민 출신. 현재는 마병단 소속의 단원이고, 2년 전 능력을 각성했지.”
“유더 아일……. 전혀 모르겠는데.”
이논이 유더의 이름을 곱씹으며 혹 제가 어디선가 만난 사람인데 잊은 것인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무리 곱씹는다 해도 그 혼자서 답을 알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마병단이라면 그, 이번에 새로 생겼다는 거길 말하는 거야?”
“맞아.”
“네가 조사하려 했던 키시아르 라 오르가 단장으로 있는?”
“그것도 맞아.”
유더가 간결하게 대꾸하자 이논의 얼굴에 기가 막혀 지은 헛웃음이 떠올랐다.
“이거… 완전 미친놈 아니야? 네가 소속된 곳의 대장 뒷조사를 하려 들어? 반역을 저지르려는 것이 아니라며?”
“당연히 아니지. 내가 바라는 건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운 의도니까.”
유더는 그의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꾸했다.
“반대?”
“나는 키시아르 라 오르가 죽지 않도록, 무슨 수를 써서든 그를 지키는 것이 목표야.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비밀에 싸인 귀한 분들의 비밀을 좀 알아야 할 것 같았거든.”
이논의 눈가가 씰룩였다. 금방이라도 거짓말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더의 얼굴과 목소리에서 결국 아무런 거짓도 찾아내지 못했다.
“거짓말이 아니구나.”
“그렇다니까.”
“이 미친놈.”
이논이 다시 한번 냅다 욕을 했다. 유더는 제대로 대답을 해 주어도 욕을 먹자 아주 조금 억울해졌다.
“네가 뭔데 그런 일을 하려 하는데? 황족에 공작에 단장까지 하고 있는 자를 왜 네가 지켜? 정보를 좀 안다고 뭘 할 수 있는데? 어디서 그자를 암살이라도 한다더냐?”
“아니. 전부 아닌데…….”
“그러면 대체 왜?”
의문에 가득 찬 이논의 금빛 시선. 유더는 그에게 무언가 말을 한다면 바로 지금이 기회이리라 느꼈다.
“내가 미래에서 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믿겠어?”
“그딴 농담 재미없어.”
이논의 첫 대답은 아예 농담으로 치부하는 것이었다. 예상 범위 내의 대답이었기에 유더는 담담히 대꾸했다.
“정말인데.”
“하. 루마도 유일하게 성공하지 못했던 게 시간 관련 마법인데 네가 무슨 세기의 대마법사라도 돼? 농담을 해도 정도껏 해야지.”
“내가 지금 농담을 하는지, 아닌지는 네가 가장 잘 알지 않을까.”
“그러니까 애초에 말이 안 된다고 하잖아, 이 썩을 놈아. 그건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 영역이라니까? 네가 시간을 거슬러 왔단 증거 있어? 없잖아.”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해서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일은 없어. 네가 루마의 가디언이라는 사실도 보통 사람은 믿지 않을 텐데 왜 이것만 말이 안 된다는 거지?”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그러면 나는 네 정체를 어디서 알았을까?”
허를 찌르듯 치고 들어온 유더의 나직한 반문에 계속해서 농담이라 치부하던 이논의 표정이 처음으로 바뀌었다.
“……뭐?”
“내가 너에 대해 아는 모든 건 네가 스스로 알려준 것들이야. 대마법사 루마의 가디언이고, 사실 아주 오래 살았다고 했었고, 여기저기서 정보를 잘 주워 왔고, 레몬을 좋아했지. 그것 말고도 아는 건 더 있어. 그게 바로 증거인데 그래도 믿지 않을 건가?”
유더는 이논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눈을 빠르게 깜박이는 것을 보았다. 당혹감과 놀라움, 반신반의와 불신이 오가며 순식간에 변화하던 표정이 잠시 후 아주 날카롭고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오랫동안 이논을 보아왔음에도 처음 보는 눈빛이었다.
유더는 사람을 서서히 차갑고 깊은 물 속에 빠트리는 듯한 묵직한 압박감을 느끼며, 겉으로는 표정에 변화가 드러나지 않도록 침착함을 유지했다.
“…너, 목적이 뭐냐. 왜 날 찾아왔어?”
“말했잖아. 키시아르 라 오르를 지킬 거라고.”
“무려 시간을 되돌려 돌아왔다며? 그런 거창한 짓을 한 목적이 고작 그것뿐이라고? 그걸 지금 나더러 믿으라고 하는 소리야?”
이논은 유더가 아직 전부를 다 말하지 않고 있음을 눈치 빠르게 느낀 것 같았다. 역시 그를 상대로는 이 이상까지 말해야 할 듯했다. 유더는 잠시 망설이다 앞으로 시간이 지나며 점차 그가 해 나가야 할 더 큰 목적도 입에 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가 이곳으로 돌아오기 전과 같은 일들이 생기지 않도록 하고 싶어.”
“흐음. 그래. 이제 좀 들어줄 만하군. 전과 같은 일이라… 개인적인 일이냐? 아니면.”
“개인적인 건 없어. 지금은 거기까지만.”
그렇게 말한 뒤 유더는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네게 찾아온 건, 사기를 치지 않고 정보와 관련한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이 너 정도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사기?”
이논의 표정이 순식간에 아주 떨떠름하게 변했다.
“사기나 치는 정보업체에게 이런 일을 맡길 수는 없잖아. 내가 스스로 찾을 수 있는 범위에도 한계가 있고.”
“……그러니까, 정말 순수하게 이 정보만 목적이었다고?”
“그렇다고 했잖아.”
유더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진심이었는데 이논은 어쩐지 몹시 믿을 수 없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나하나 전부 순도 백퍼센트 개소리 같은데, 어떻게 단 하나도 거짓말이라는 느낌이 안 오지? 내가 고장이 났나?”
깊이 탄식한 이논의 시선이 손에 쥔 종이 뭉치로 향했다. 그는 유더와 그 종이를 번갈아 바라보다, 천천히 다른 손에 들었던 성냥을 내려놓았다. 차갑게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그제야 스르르 평소처럼 되돌아왔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유더는 이논에게서 느꼈던 강렬한 압박감을 기억했다. 어디에서도 느껴본 적이 없는 힘이었다. 마법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력도, 각성자들이 지닌 기운과도 달랐던 기묘한 기운.
그 기운이 바로 그가 ‘가디언’이라는 존재이기에 낼 수 있었던 힘일까.
“지금 당장 믿으라고 말한 건 아니니, 천천히 지켜보면서 판단해도 늦지 않잖아.”
“내가 왜 널 지켜봐야 하는데? 도움을 주는 건 이번만이라고 분명히 말했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