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유더가 저도 모르게 작은 목소리로 의문을 토하자 귀도 밝게 그것을 들은 키시아르가 고개를 들었다.
“뭔가 이상한 거라도 있나?”
유더는 잠시 망설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 서신을 키시아르에게 주었다.
“이건 아무래도 곧바로 읽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유더에게서 받아든 서신을 빠르게 읽은 키시아르가 마지막 부분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붉은 눈동자 위로 흥미로워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추가 일정이라. 이런 걸 누가 건의하고 승인한 거지? 다들 최대한 끼워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줄 알았는데.”
“그 일정 같은 건 황제 폐하께서 최종적으로 결정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현재는 아직 황태자이지만 유더가 이전 생에서 모셨던 카치안 황제는 뭐든 제가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성격이었다. 좋게 말하자면 신중했지만 나쁘게 말하자면 의심이 강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했던 그는 나중에는 힘이 지나치게 강한 신하들과는 가까운 곳에서 독대하려 들지도 않았다. 유더 또한 그의 경계대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현 황제 케일루사 라 오르는 카치안 황제와 성격이 전혀 달라 보였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일 처리 방법은 같을 줄 알았는데 몹시 의외였다.
“추수철에 열릴 행사가 수도 없이 많은데 그것을 폐하께서 모두 처리하실 수는 없지. 대부분은 궁내부에서 담당한다네.”
서신을 접은 키시아르가 눈에 잘 띄는 위치에 놓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대충 누구의 입김이 들어갔을지 짐작은 가네만, 확실히 알아봐야겠군. 오늘 써야 할 편지가 한 장 늘겠어.”
짐작이 간다니. 키시아르가 떠올리고 있는 이는 과연 누구일까. 몹시 궁금했지만 어차피 결과가 나오면 알게 될 것 같았으므로 유더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뒤로 물러났다.
* * *
“유더! 돌아왔구나!”
다음날, 아침을 먹으러 향한 식당에서 마주친 칸나는 유더의 얼굴을 보고 몹시 반가워했다.
“혹시 들었어? 내가 단장님 명으로 그… 마법사분들과 같이 일하게 된 것.”
“들었어. 그렇지 않아도 이따가 가 볼 생각이야.”
다른 단원들이 듣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이던 칸나가 유더의 대답을 듣고는 단숨에 기쁜 표정이 되었다.
“정말? 율만 님과 알릭 님 모두 널 굉장히 다시 만나고 싶어 하시던데 오늘 가면 정말 기뻐하시겠다.”
어느새 이름까지 부르는 것을 보니 짧은 시간 사이에 꽤 친분을 쌓은 모양이었다.
유더는 칸나의 능력을 들은 마법사들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흥미를 드러내며 시험해 보고 싶어했는지, 세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해 나갈지 함께 고민했다는 둥의 이야기를 들으며 빠르게 수프와 빵을 입 안에 털어넣었다. 거의 씹지도 않고 목구멍 안에 쓸어 넣는 그를 보며 한참 즐겁게 말을 잇던 칸나가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유더, 그런데 왜 그렇게 빨리 먹는 거야? 혹시 임무를 하는 동안 굶은 건 아니지?”
“아니. …돌아왔더니 그냥 배가 고파서.”
사실은 밥을 최대한 빨리 먹고 오전 중 이논을 만나러 거리로 나갈 생각이었으나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배가 고픈 것도 사실이고.’
어제는 내내 팔에서 이는 고통 때문에 제대로 된 음식을 섭취하지 못했다. 그 상태에서 기절까지 해 버렸으니 거의 하루를 통째로 굶은 셈이었다.
그래도 아침에 일어날 때까지는 딱히 배가 고프다는 생각은 안 했지만 식당에 내려와 음식 냄새를 맡은 순간 참을 수 없이 강렬한 허기가 밀려들었다.
“유더! 먼저 와 있었구나.”
유더가 칸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8개째의 빵을 찢어 수프에 찍었을 때, 등 뒤에서 반가움에 가득 찬 가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방에 먼저 갔었는데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나오지 않아서 안에서 기절이라도 한 줄 알았지 뭐야.”
“기절? 유더가 아픈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생각을 했어?”
유더가 대답하기도 전에 칸나가 손을 흔들어 인사하면서 가케인에게 말을 걸었다. 가케인의 눈동자 위로 순간 아차하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으나 그는 이내 능숙하게 변명을 입에 담았다.
“어제 임무에서 돌아오고 나서 바로 숙소로 온 나나 데브란, 지미랑 달리 유더는 단장님과 따로 보고 시간을 가졌거든. 나였으면 오늘 너무 피곤해서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잠만 잔다고 했을 텐데 유더는 참 대단하지. 하하.”
“그랬구나. 데브란은 왜 못 돌아왔었던 거야? 오늘 아침도 안 먹고 의무실로 갔다던데 어디 다치기라도 했어? 다들 계속 그 이야기만 하더라.”
칸나가 데브란의 이름을 듣고는 뒤늦게 궁금했던 점이 생각났는지 질문을 던져댔다.
“응. 고향에 있는 어떤 귀족하고 문제가 생겨서, 잡혀 있었거든. 그 도중에 부상을 좀 입었어. 그래도 잘 해결되었으니 치료받으면 곧 회복되겠지.”
“정말 다행이다. 단장님께서 일찍 구출팀을 보낸 게 정답이었네.”
어제 돌아오기 전 혹시나 동료들에게 질문을 받으면 그렇게 말하기로 모두 정해 두어서 참 다행이었다. 유더와 가케인의 마주친 시선 속에 같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유더. 팔은?’
칸나가 데브란이 겪었을 일에 이입해 금수만도 못한 일부 귀족들을 열심히 욕하는 사이, 가케인이 몰래 제 팔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의사를 전달했다.
유더는 괜찮아졌다는 뜻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오른팔은 어제의 지옥 같은 치료를 통해 이전과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고, 왼팔은 아직 붕대를 감고 있기는 해도 제복 소매에 가려져 보이지 않으니 들킬 일은 거의 없을 터였다. 가케인의 얼굴 위로 안도와 환한 기쁨이 스쳐 지나갔다.
‘다행이다.’
“뭐야 가케인? 내 말은 안 듣고 뭘 속닥거리는 건데?”
“아, 아무것도 아냐.”
“유더한테 뭐라고 속닥대고 있었잖아. 아냐?”
칸나가 샐쭉한 눈으로 막 가케인을 추궁하려 했던 그때, 갑자기 식당 문이 벌컥 열리더니 낯이 익은 단원 한 명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뛰쳐 들어왔다.
“다들 들었어? 방금 엄청나게 놀라운 일이 생겼어!”
“뭔데?”
식사를 하던 단원 중 누군가 의아해하며 묻자 뛰쳐 들어온 단원이 씩 웃으며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황궁에서 전령이 찾아왔는데, 글쎄 이번 수확철 축제 때 마병단 전체가 황궁에서 열릴 파티에 참석하게 될 거래!”
“파티?”
“황궁이라고?”
“정말이야? 단원들이 전부 모이면 300명이 넘는데 다 간다구? 단장님이 허락하실까?”
믿을 수 없는 소식에 식당에 있던 이들 전체가 술렁거렸다. 가케인과 칸나의 얼굴에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진짜일까? 파티라니… 내가 아는 파티는 갈론 가에서 지낼 때 하인들끼리 남은 음식을 가지고 부엌에서 열던 데 낀 게 전부인데.”
얼이 나가 중얼거리는 칸나의 곁에서 가케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유더를 돌아보았다.
“유더. 뭔가 들은 것 없어? 넌 단장님의 보좌잖아.”
“…없어.”
사실은 어제 키시아르에게 온 편지를 정리하며 이미 알게 된 사실이었으나 유더는 일단 입을 다물기로 했다.
“하긴. 전령이 방금 찾아왔다니 유더도 지금 처음 들었겠지. 진짜라면 알아서 단장님께서 단원들을 다 불러 모아 말씀해 주시지 않을까?”
유더는 칸나의 말을 들으며 주변 단원들을 흘긋 돌아보았다. 대부분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그 안에는 설렘과 기대, 긴장감도 엿보였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모두가 용건을 알 수 있도록 떠드는 전령을 보냈다는 건… 키시아르가 그 일정을 절대로 거절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뜻이군.’
키시아르는 단장 권한으로 마병단을 어떤 일정에 참석시킬지 결정할 수 있다. 황제가 직접 명하지 않은 이상 황족이자 공작인 그가 일정 참가에 압박을 느낄 일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그러나 모든 단원들이 내심 설레며 바라던 일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괜찮다고는 해도 한번 기대를 품었던 이상 꽤 실망하겠지.’
한 단체를 이끄는 자의 실질적인 힘은 구성원들의 신뢰와 지지에서 나온다. 진정한 지도자는 단순히 명함을 유지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마병단이라는 새로운 단체를 창설하여 한창 기틀을 올리고 있는 상황에서 키시아르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힘도 바로 그것이었다.
‘누군지 몰라도 꽤 교묘한 수를 썼어.’
유더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소문은 마병단 전체로 끝없이 퍼져나갔다. 유더는 흥분한 얼굴로 대화를 주고받는 단원들을 지나쳐 간단히 사복으로 갈아입고 마병단 숙소 건물을 나섰다.
이논이 살고 있는 허름한 빈굴 구석의 낡은 약가게까지 가는 동안 큰 축제를 앞두고 잔뜩 들뜬 도시 분위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들뜬 것은 마병단원들만이 아니었다.
“오늘 장사 안 하니까 꺼져.”
그러나 이논의 가게는 그러한 분위기에서 당연히도 열외였다. 유더는 여전히 먼지와 잡동사니가 뽀얗게 쌓여 있는 가게 내부를 둘러본 뒤, 카운터 밖으로 비죽 고개를 내민 부츠 굽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야.”
“나가 누군데?”
“네게 의뢰를 한 사람.”
“…….”
그 말에 정신 사납게 흔들대던 부츠가 멈칫했다. 유더는 잠시 후 우당탕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난 이논의 분노 어린 시선을 마주하며 약간의 미안함을 담아 입꼬리를 슬며시 끌어올렸다.
“일이 생겨서 좀 늦었어. 미안.”
“미안? 미안이라고 했어 지금? 너 이 개가 뜯던 뼈다귀보다도 못한 자식. 내가 대체 며칠을 기다렸는지 알기나 해? 뭐가 좋아서 실실 쪼개고 있어? 꺼져!”
나름대로 분위기를 유하게 만들어 보고자 미소를 지은 것이었으나 아무래도 역효과를 발휘한 것 같았다. 유더는 재빨리 웃음을 거둔 뒤 품속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자.”
“뭐야? 필요 없으니까 꺼지라고…….”
잔뜩 분노한 얼굴로 무어라 외치려던 이논이 유더가 내민 것을 보고는 순간 말을 멈추었다. 그것은 빈민굴에 들어오기 전 지나친 시장에서 사 온 샛노란 레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