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무의식 속에 깊이 가라앉아 있었을 그때의 일이 왜 하필 지금 수면 위로 떠올랐을까. 몇 분을 고민해도 알 수 없는 의문에 골몰하던 유더는 일단 본래 숙소로 돌아가는 것이 우선임을 깨닫고 걸음을 옮겼다.
몇 발짝 앞에 있던 테이블 위에 잘 개켜져 있는 제복 겉옷과 장갑을 끼고 주먹을 쥐었다 펴자 아주 미약한 저릿함이 오른손에서 느껴지다가는 사라졌다.
기절해 있는 동안 몸이 회복되어서인지 통증은 거의 씻은 듯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리 멀쩡해진 것을 보니 역시 돈이 좋기는 좋군.’
일단 키시아르만큼 강한 신성력을 지닌 사제도 그리 흔치 않을 텐데, 심지어 최고급 정화석으로 그것을 증폭까지 해가며 흡수시켰으니 이리 빠르게 치료된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이런 난리를 두 번 겪고 싶지는 않으니… 앞으로는 무작정 힘만 써서 해결하려 하는 방법은 정말로 자제하자.’
각성자가 지닌 힘을 쓰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이전 생에서 유더는 넓은 바닷물처럼 엄청난 힘을 마음대로 끌어다 쓰며 적을 압도하기를 즐겨 왔기에, 굳이 적은 힘으로 더 많은 효과를 내는 방법을 연구할 필요가 없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보통은 좌절할 일이지만 유더는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능력을 수련하고 발전시키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었다. 이전 생에서도 단장이 되지 않았다면 아마 훈련실에만 틀어박혀 평생을 보냈으리란 생각을 늘 했을 정도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복도를 지나 응접실로 빠져나간 유더는 문득 앞에서 어른대는 불빛을 보고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키시아르?’
은은하게 타닥대며 타오르는 마정석 난로 앞 책상에 앉아 무언가 집필을 하고 있는 남자의 옆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자고 있으리라 여겼던 키시아르였다.
유더는 작은 등불에 비쳐 그림자가 어른대는 그의 얼굴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짙은 음영 때문인지, 아니면 평소에 잘 보여주지 않는 무표정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둠에 반 이상 잠긴 채 깃펜을 든 손만 사각사각 움직이는 모습이 몹시 낯설고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이전 생에서도 유더는 간혹 그가 저런 식으로 등불 하나만 밝힌 채 늦은 시각까지 일에 몰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밤을 종종 함께 보냈으니 어쩔 수 없이 본 광경이었는데, 이제 와 또다시 저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마침 과거의 꿈까지 꾸었기 때문일까.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벌써 깨어났나?”
그때, 유더의 시선을 느낀 듯 키시아르가 고개를 들었다.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았다 여겼지만 과연 남다른 눈치였다. 그의 얼굴에 장난기 있는 미소가 어리자 방금까지 과거와 겹쳐지던 모습은 금세 사라지고 생기가 훅 피어났다.
“기절하지 않겠다더니 일어나자마자 쓰러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나?”
“죄송합니다.”
“뭐, 자네 말대로 치료가 끝날 때까지는 기절하지 않았으니 반씩 맞은 것으로 하지. 사과할 필요는 없네.”
“곧바로 깨우지 그러셨습니까.”
“지쳐서 기절한 사람을 억지로 깨울 수야 있나. 어차피 늦은 시각이니 오늘은 그냥 여기서 더 푹 자게. 아, 팔 상태는 어떤가?”
부드러움과 달리 거부 의사는 받아들일 생각이 별로 없는 목소리였다. 유더는 열고 나가면 그만일 문과 키시아르가 있는 책상 쪽을 한 번 번갈아 바라본 뒤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멀쩡해졌습니다.”
아직 약간 저린 듯한 느낌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야 조금 더 쉬면 알아서 나아질 것이다. 유더의 대답에 키시아르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잘 됐군.”
“그런데… 단장님께서는 이 시간까지 뭘 하고 계신 겁니까.”
어차피 잠은 이미 거의 깨버렸다. 도로 들어가서 자라 말한들 그럴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책상 근처에 마련된 의자에 앉으며 묻자 키시아르가 한창 무언가 써 내려가던 종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편지를 쓰고 있지.”
그가 나란히 놓여 있는 3장의 종이를 한 개씩 손끝으로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한 장은 황제 폐하께. 다른 한 장은 펠레타 기사단에게, 그리고 마지막은 하르탄의 영주 대리에게.”
황제와 하르탄의 영주 대리 제클리스 하르탄에게 보낼 편지야 내용이 뻔했다. 아마 이번에 일어난 사건을 보고하고 조사하기 위한 협력 권유를 담고 있으리라. 그렇다면 펠레타 기사단에게 보내는 편지도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함일까?
“이번 사건 때문입니까?”
“그렇지.”
유더의 추측이 틀리지 않았는지 키시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 할 일들이니 늦게까지 하고 있는 것도 당연하군.’
편지를 쓰는 것만이 업무의 다는 아닌지, 키시아르의 옆에는 꽤 많은 서신과 종이뭉치가 쌓여 있었다. 유더는 그가 다시 펜 끝에 잉크를 적시는 것을 보며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도와드릴 것은 없습니까.”
“물론 있지. 들어가서, 자는 것.”
“…….”
유더가 침묵을 지키자 몇 글자를 쓰다 말고 고개를 든 키시아르가 이내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군.”
“제 표정은 원래 이렇습니다.”
“아니야. 여기가 이렇게 되었다고.”
키시아르가 양손을 들어 눈꼬리 부분을 슥 잡아당겼다. 날카롭게 올라간 눈꼬리 밑에서 번득이며 주변을 둘러보는 붉은 눈동자의 조합이 다소 우스꽝스러웠다.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지금.”
그런 적 없다고 반박하려 했던 유더는 바로 그 반응을 기대하고 있는 듯 눈을 빛내는 키시아르를 보고 순간 입을 다물었다.
‘비록 20살 때로 되돌아왔다 해도 정신연령까지 20은 아닌데……. 내가 대체 키시아르와 뭘 하고 있는 건지.’
아이도 아니고, 다 큰 사내 둘이 나누기에는 너무나 유치한 대화였다.
“되었습니다. 단장님께서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자네는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정신을 차리고 물러선단 말이지. 눈이 좋아서 그런가?”
키시아르는 김이 샌 표정이었으나 유더는 그의 ‘눈이 좋다’는 말에 귀를 의심할 만큼 놀랐다.
“……예?”
“뭘 그리 놀라나? 자네가 눈이 좋은 건 사실이잖나. 각성자들의 미세한 기운 변화나 붉은 돌, 신검 같은 무생물이 지닌 힘까지 모두 파악할 만큼.”
“아… 네.”
그런 의미인가. 꿈속에서 들은 말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단 것을 알게 되자 겨우 놀랐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리고 잠이 정 안 온다면 여기 와서 이거나 좀 가져가게.”
가서 잠이나 자라던 키시아르가 멍하니 앉아 있던 유더를 향해 옆에 놓인 서신 뭉치를 밀었다.
“이건…….”
“마병단 앞으로 온 서신이야. 본래는 나단에게 분류를 시켰는데, 그는 엄밀히 말하자면 마병단 소속은 아니니 이제부터는 보좌인 자네 몫이 되겠지. 읽고 나서 중요도에 따라 분류해 중요한 서신을 제일 위에,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것은 아래에 오도록 순서를 재배치하면 돼.”
기껏 친절한 설명을 들었는데 아쉽지만, 유더는 그런 편지 뭉치에 아주 익숙했다. 이전 생에서 지겹도록 보았던 것들이었으니까.
“중요도를 제 마음대로 판단해도 됩니까?”
“읽으면 대충 감이 올 거야. 어차피 내가 다시 다 읽을 테니 걱정 말게.”
그렇게 말한 뒤 키시아르는 다시 잉크를 적신 펜을 들고 편지 작성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유더는 서신 뭉치를 끌어당겨 무릎 위에 놓고 하나를 폈다. 어두웠지만 마정석 난로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닿은 덕분에 글씨를 읽는 것이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이건… 파티 초대장이군. 그 다음도 파티 초대장. 다음은…… 마병단원 파견 요청서인가?’
대부분은 수도에 사는 귀족들이 황족이자 공작인 키시아르를 개인적으로 초대하기 위해 보낸 파티 초대장이었다.
그 다음으로 많은 것은 마병단원의 힘을 빌리고 싶다며 여기저기서 보낸 파견 요청서였는데, 타당해 보이는 용건을 적은 편지는 손에 꼽게 적었다.
대부분은 높은 계급의 귀족들을 호위하기 위해 각성자를 빌려 달라느니, 파티에서 묘기를 부릴 이가 필요하니 사람을 보내 달라는 어처구니 없는 말이 쓰여 있었다. 아무래도 수도에 사는 귀족들은 아직도 마병단과 각성자들이 무엇을 하는 존재인지 제대로 인지하고 있지 않은 듯했다.
‘어이가 없군.’
유더는 그런 편지들을 무조건 제일 아래로 내렸다. 대부분의 편지를 내리고 나니 남은 것은 2개밖에 없었다.
‘하나는 서부에서 갑자기 나타난 몬스터 토벌을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느냐는 편지.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유더는 남은 하나의 편지봉투에 붉은 밀랍을 녹여 찍은 문양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황궁에서 보낸 공식 서한에 찍히는 문양이었다. 봉투를 뜯어 안을 보니 간결하게 목적이 적힌 작은 서신이 나타났다.
‘어둠을 모르는 위대한 태양의 자손, 펠레타 공작, 마병단의 단장이신 키시아르 라 오르 전하께’ 로 시작된 서신은 얼마 뒤 추수철을 기념하여 황궁에서 열릴 공식 행사 및 파티에 황족으로서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담고 있었다.
유더는 그제야 이전 생에서도 마병단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추수철 기념 행사가 열렸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맞아. 그랬었지. 거기서 처음으로 마병단을 정식 소개한답시고 황궁기사단과 군악대 뒤에서 우스운 행진도 했고… 무슨 행사에 가서 귀족들의 구경거리만 되다가 돌아온 적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마병단원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이 귀족들 사이에서 당당히 섰다는 사실에 꽤 고무되었었다. 그날이 바로 전 대륙이 보는 앞에서 마병단이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날이기도 했으므로.
그때를 떠올리던 유더는 문득 서신 아래에 추가된 작은 글을 보고 눈을 약간 크게 떴다.
‘…또한 회의 결과, 26일에 열릴 마병단 행진 뒤 추가 일정을 넣기로 하였습니다. 변경된 일정과 관련하여 곧 확정 사항을 추가로 알려드릴 예정이니…….’
“…추가 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