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그는 오늘 훈련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던 중 마주친 동료들이 들으란 듯 저를 욕하는 소리를 들었다.
부단장이 되었을 때도 그런 이들은 아주 많았지만, 키시아르 라 오르가 유더를 차기 단장으로 지명한 이후에는 하루하루가 뒤통수에 욕이 달라붙는 나날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유더도 키시아르가 왜 갑자기 잘하고 있던 단장 노릇을 그만두겠다는 것인지, 하필이면 그 자리를 왜 제게 넘기겠다고 말한 것인지 몰랐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판단했을 때 단 내에서 현재 저보다 강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 때문이라 짐작할 따름이었다.
얼마 전 몬스터 퇴치를 위해 파견되었던 단원들 중 사망자가 나오는 사고가 일어난 탓에 단 내 분위기가 그 어느 때보다도 흉흉한 것을 감안하여 웬만하면 욕을 들어도 그냥 넘어가려 했지만, 그놈들이 먼저 선을 넘었다.
‘저 자식은 사는 게 편해서 좋겠어. 단장에게 엉덩이를 바친 이후 모든 게 다 해결되었잖아!’
‘본래 몬스터 토벌팀에 들어가야 했던 것도 저 녀석인데 단장이 후임 교육을 해야 한다고 뺐다며? 그래서 애꿎은 가케인만 괜히…….’
‘단장하고만 놀아나는 놈이 누가 죽은 줄이나 알겠어? 부럽다, 부러워. 다른 녀석들은 매일이 지옥 같은데.’
악의에 찬 저주 같은 험담 너머로 싸늘한 웃음소리들이 들려왔다. 유더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이들이 일제히 움찔 놀랐다가는 이내 제가 주눅이 들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앞으로 나섰다.
‘뭐야. 뭘 쳐다봐? 할 말이라도 있어?’
‘할 말이 있어 보이는 건 너희들 쪽인 것 같은데.’
유더의 낮은 목소리 속에 짙은 분노가 뒤섞였다.
‘단장이 되고 싶나?’
‘뭐?’
‘단장이 되고 싶냐고 물었어.’
‘무슨 헛소리야? 되고 싶다면 어쩔 건데. 네가 후임 자리를 넘겨주기라도 할 거야?’
‘안 될 것도 없지. 단, 나를 이길 수 있다면 말이야.’
너희들 중 한 명이라도 나를 이긴다면 내가 가진 자리 정도야 얼마든지 넘겨줄 수 있다고 말하자 놈들은 좋다고 달려들었다.
유더는 멍청한 놈들을 신나게 두들겨 팬 뒤, 말린 생선 엮듯 묶어서 모든 단원들이 볼 수 있도록 식당 한가운데 던져 놓았다. 그리고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된 것이었다.
단장 자리 따위 원한 적도 없다. 동료들처럼 서로 친목을 쌓는답시고 온갖 바보 같은 짓거리를 하는 것도 싫었다. 모두 다 하나도 바란 적 없는 것뿐인데, 차가운 욕설들은 언제나 유더의 뒤를 따라다녔다.
‘…….’
유더 아일을 차기 단장으로 지목한 것은 키시아르 라 오르가 아닌가.
그런데도 왜 모든 시비는 유더에게만 향하는 것일까? 물론 유더 쪽이 더 어리고 신분이 낮아서겠지만 이유가 뻔하다 해서 화가 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유더는 두들겨 맞고 쓰러진 동료들이 저주처럼 내뱉던 말들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그들이 한 말 중 마음에 드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싫었던 것은 유더가 단장에게 몸을 바쳤다는 소리였다.
그 말이 아예 새빨간 거짓말이라면 신경조차 쓰지 않고 넘겼을 텐데, 원인이야 어찌 되었든 그가 단장과 육체관계를 맺은 건 사실이었다.
사고로 일어난 일이라 해도 결국 없는 곳에서 나온 소문이 아니라 대놓고 부정해 줄 수 없다는 점이 더욱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군.’
‘단장님 같으면 풀리시겠습니까? 애초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도…….’
‘그래. 다 나 때문이지. 알고 있네.’
키시아르의 대답은 마치 유더의 말 이면에 숨겨진 원망을 읽은 듯 부드러웠다. 일부러 날을 잔뜩 세우고 그를 도발하려 했던 유더는 그 나직한 대답에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키시아르 라 오르는 늘 그랬다. 그는 자신을 향하는 칼끝을 깃털 같은 여유로움으로 밀어내는 데 능한 사내였다.
‘하지만 유더. 적당히 힘을 보여주는 것도 인정받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했을 뿐, 반드시 그것만으로 타인을 대하라고 말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맞나?’
‘……그건.’
유더는 키시아르를 바라보다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네.’
키시아르는 유더를 후계자로 지명한 후부터 수없이 자리를 계속 비웠다. 돌아올 때마다 유더를 불러 많은 것을 가르쳤지만 실무를 제외한 나머지는 거의 뜬구름 잡는 소리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간혹 어떤 말은 훗날의 행동방침을 잡는 데 도움이 되기도 했는데, 강한 힘을 지닌 사람일수록 그 힘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 또한 그중 하나였다.
솔직히 말해 아주 와닿지는 않은 말이었으나 키시아르 본인이 직접 그런 말에 걸맞은 행동거지를 보여주니 뒤를 따르는 자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영향을 받았다.
그는 수련에만 관심이 있던 유더에게 본디 없던 책임감과 위에 올라설 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박아 넣어 준 첫 스승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저 그렇게 내심 존경할 수만 있는 사이였다면 얼마나 나았을까. 개소리를 지껄이는 이들이 무어라 말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건 확실히 제가 잘못하긴 했습니다.’
유더의 성의 없는 사죄에 키시아르가 피식 웃었다.
‘그래도 자네 말대로 결투라는 형식을 취하기는 했으니 이전과 달리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거야. 개인적인 감정은 상할 만큼 상한 모양이지만.’
‘잘 됐군요.’
‘적어도 미래에 수습할 길을 생각하며 행동하게 되기는 했으니 다행한 일이지. 펠레타에서 돌아오자마자 이 소식부터 들은 내 기분을 생각해 보게. 얼마나 놀랐는지 아나?’
‘…….’
키시아르는 다음 단장 자리를 유더에게 주겠다고 말한 뒤부터 수시로 자리를 비웠다. 대개는 그의 영지인 펠레타에 다녀오는 것이었지만, 그가 없는 사이 일어나는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 유더의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외출이었다.
이유도 없이 자꾸 사라지면 뒤에 남겨질 이들은 대체 어쩌란 말인가?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일을 벌이지 말아야 할 이는 제가 아니라 키시아르 쪽이었다.
무어라 한마디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유더는 말을 삼켰다. 펠레타에 다녀오자마자 곧바로 유더가 일으킨 사건을 처리했기 때문인지, 책상 앞에 앉은 키시아르의 안색이 평소보다 창백해 보였다.
눈 밑이 그늘지고 입술이 색을 잃어도 태양신의 현신 같은 아름다움은 여전했지만, 유더의 눈에는 그의 얼굴에 서린 짙은 피로감만이 보일 따름이었다.
전 황제가 서거하고 새 황제가 즉위한 뒤 키시아르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외출이 잦아졌다. 그가 단장 자리를 내놓는 이유가 피가 섞이지 않은 현 황제와의 갈등 때문이라는 소문이 암암리에 돌았다.
하지만 그보다 마병단원들이 걱정한 것은 키시아르가 사임한 뒤 혹시나 마병단이 해체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새로운 황제가 각성자들에게 그리 친화적이지 않은 가문 출신이라 그 우려는 제법 신빙성이 있었다.
그런 수많은 말들 속에서 키시아르 라 오르가 본디 단원들에게 받던 절대적인 신뢰는 점차 옅어지기 시작했다. 불안과 공포는 키시아르가 지정한 평민 출신의 후계자, 유더에게 고스란히 향했다.
모두 키시아르가 무언가 해 주기를 바랐다. 그는 단장으로서 마병단을 책임질 의무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직까지 키시아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유더에게 일을 가르칠 때 이외에는 그에게조차 제 속내나 앞으로의 계획을 말한 적이 없었다.
그가 왜 사임하려 하는지, 왜 자신을 후계로 삼은 것인지, 그런 건 유더 쪽이 사실 제일 알고 싶은 부분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가장 가까이 있는 것 같은 존재가 제일 멀기도 한 법이었다.
‘역시 단장 자리, 저 말고 다른 사람이 하면 안 됩니까.’
유더는 피로해 보이는 키시아르를 바라보며 충동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충동적이라고는 해도 이미 그간 열 번 이상 반복했던 말이었다.
‘안 돼.’
그리고 키시아르의 대답 또한 언제나와 다를 바 없이 간결하고 확고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도 지겹지 않으십니까? 저보다 능력이 강하진 않아도, 신분 높고 일 잘할 사람은 단 내에 널렸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골라 후임을 맡기십시오. 전 그냥 수련이나 하고 싶습니다.’
유더의 말에 키시아르가 약간 비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단지 자네가 강해서 다음 단장 자리를 넘기는 거라 생각하나?’
‘아닙니까?’
‘당연히 아니지.’
유더의 미간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럼 대체 뭐란 말인가? 유더는 제 힘의 강력함을 잘 파악하는 만큼, 그 외의 부분도 냉정하게 볼 줄 알았다. 유더 아일이란 인간은 사교성이 없어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으며 언행은 늘 냉정했고 싫어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타고난 신분이 출중한 것도 아니며 친구 한 명 없는 그가 모든 면에서 완벽했던 키시아르 라 오르의 후임 단장이 된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었다.
‘그럼 뭡니까.’
‘눈이 좋아서.’
평온하게 흘러나온 즉답에 유더는 잠시 말을 잃었다. 겨우 입을 연 것은 키시아르가 유더의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 웃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으니 저 같은 평민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네는 더 이상 평민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하지? 아일 자작. 스스로를 너무 낮추는 건 좋지 않다고도 말했던 것 같은데 혹시 잊었다면…….’
‘아뇨.’
기억은 물론 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유더의 작위가 자작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출신이 평민이었던 이가 무슨 작위를 받든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지금 그런 것 따위가 아니었다.
‘눈이 좋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흐음. 안 통하는군. 예전엔 잘 통했는데 말이야. 부단장이 못 보던 사이 귀염성이 조금 떨어졌는걸.’
‘……단장님.’
유더의 목소리가 음산해지자 키시아르가 고개를 젖혀 크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