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공작님께서 그렇다고 말씀하시는군요.”
유더는 제 손에 들린 손수건에 놓인 화려한 수를 보며 잠시 침묵했다. 한눈에 보아도 좋은 천으로 정성 들여 만든 손수건이었다. 주인도 아닌 이의 땀을 아무렇게나 닦고 나서 버려지기엔 너무 고급스럽지 않은가.
“그러면 이것보다는 수건으로 주시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말씀대로 이것 한 장으로 닦기에는… 조금 그렇군요.”
그 말이 일리가 있다 생각했는지 키시아르는 나단에게 수건을 가져오라 명했다. 그러나 이번에 등장한 것은 방금 전 보았던 손수건에서 크기만 더 커졌을 뿐, 여전히 아름답고 몹시 비싸 보이는 긴 천이었다.
“왜. 그 수건도 마음에 들지 않나?”
“…아닙니다.”
결국 유더는 이 방에서 덜 고급스러운 물건을 찾는 것은 포기하기로 하고 그것으로 몸을 닦았다. 반점은 줄어들었어도 정화석을 댈 때마다 더욱 강하게 느껴지던 통증의 여파는 그대로라,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런 고생을 두 번 하지 않으려면 앞으로는 결코 이전 같은 짓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교훈이 느껴졌다.
‘이걸 바라고 정화석으로 치유하려 한 건 아니겠지만…….’
이 고통을 겪는 것이 유더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아마 진작에 비명을 지르며 기절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유더의 기력도 그리 많이 남아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러게 몸을 좀 아끼게. 힘이 있다고 혼자서 마구 쓰는 것이 능사는 아니니까.”
그때, 마치 생각을 읽은 것처럼 키시아르가 혀를 차 유더는 움찔 놀라 고개를 돌렸다.
“역시 생각을 읽는 능력이 있으신데 없으신 척하시는 것 아닙니까?”
“얼굴에 써 있어.”
비유임을 알면서도 반사적으로 제 얼굴을 만질 뻔했다. 그런 유더의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며 키시아르가 말을 이었다.
“자넨 의외로 속을 읽기 쉽거든.”
“그 반대의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만.”
한숨을 내쉬며 반박하자 키시아르가 ‘저런.’ 하고 중얼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읽기 어렵다는 이들은 자네의 눈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거야. 누군가의 뜻을 읽는 데 표정을 보는 것만이 다는 아니라네.”
그 말을 들은 순간, 무어라 대답하려 했던 말들이 유더의 머릿속에서 모두 사라졌다.
알 수 없이 울렁거리는 기분이 뱃속에서부터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 키시아르의 얼굴을 다시 본 뒤로 계속 그랬지만, 지금은 특별히 더 이상했다. 유더는 제 얼굴에 와 닿은 붉은 시선을 피해 눈을 돌렸다.
‘언제나 하던 실없는 말과 그리 다를 바 없는데.’
갑자기 왜 받아칠 말이 생각나지 않는 것일까. 제가 느끼는 감정이 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를 되짚어 나가는 동안, 아무래도 나한의 환상 때문에 영향 받은 머리가 아직 원래대로 다 돌아오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지금은 피로하기도 하고… 아마 그런 거겠지.’
팔도 다 낫지 않았는데, 하물며 정신이라고 멀쩡할까.
그저 그것뿐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많이 피곤한가? 갑자기 안색이 좋지 않아졌는데.”
감춘다고 감추었음에도 느낀 감정이 얼굴에 티가 난 모양이었다. 키시아르가 갑자기 웃음을 거두며 물었다.
“아닙니다.”
“아니긴. 입술 색도 파랗게 질렸는데. 이제 반점이 팔꿈치 안쪽까지 내려왔으니 옷은 도로 입게. 나단은 난로에 넣을 돌을 더 가져오고.”
“알겠습니다.”
나단 주커만이 마정석을 태우는 난로에 넣을 재료를 가지러 가기 위해 자리를 비우는 것과 동시에 유더는 옆에 내려놓았던 셔츠를 도로 걸쳤다.
걷은 소매 사이로 여전히 검은색에 가깝게 변색되어 있는 손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더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하자 키시아르 또한 같은 곳을 보았다.
“통증은 어떻지? 반점이 줄었으니 그쪽도 나아졌을 것 같은데.”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반점을 처음과 비슷한 상태로 되돌리고 나면 과연 통증도 도로 사라질 것이라 여겼지만, 크기가 절반 이상 준 지금도 간헐적인 통증은 여전했다.
유더는 욱신대는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여 주먹을 쥐었다 펴 보았다. 저릿저릿한 감각이 손끝부터 팔꿈치 위쪽까지 달리며 불쾌한 고통을 선사했다. 닦았던 땀이 또다시 이마 사이로 배어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육신이 제 말을 듣지 않는 감각은 언제 겪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무 걱정 말게. 지금은 완치하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방법을 찾을 테니까.”
유더의 심각한 표정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통증과 반점 때문이라 여긴 듯 키시아르가 위로를 건넸다.
무모한 짓을 했다고 혼을 내더니, 정말로 의기소침해진 듯 보이자 위로를 건네는 면모가 과연 그다웠다. 하지만 그래서 더 이곳에 앉아 있기가 부담스러워진 유더는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고 설명하는 대신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붉은 돌과 관련된 연구 부분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아. 그것 말인가.”
키시아르는 유더가 떠난 뒤 곧바로 건물 지하에 연구실을 마련해 마법사들이 그곳에서 붉은 돌을 연구할 수 있도록 했다. 어제부터는 칸나 완드도 그곳으로 보내 마법사들과 안면을 트고 연구를 돕도록 명한 상태였다.
“그런 상태이니 내일 자네가 찾아간다면 그들 모두 반가워할 거야.”
“알겠습니다.”
붉은 돌 연구가 제대로 시동을 걸었다는 사실은 희소식이었다. 유더는 금세 방금까지 느꼈던 울렁거림을 잊었다.
‘연구 진행도 살펴봐야 하고, 마병단 전체 훈련을 강화하고 세분화시키는 방안도 정리해야 해. 이논도… 찾아간다고 하고 날짜를 넘겼으니 최대한 빨리 찾아가야겠군.’
다시 돌아온 이 세상에는 키시아르 라 오르의 실없는 말 따위보다 신경 써야 할 것들이 아주 많다. 눈앞의 사내는 유더가 지켜야 할 상대이지, 이전의 삶에서처럼 얽히고 휘둘려야 하는 이가 아니었다.
“전하. 이 정도쯤 더 넣으면 되겠습니까?”
그때 손에 묵직한 주머니를 들고 나타난 나단이 안에서 한 줌의 마정석을 꺼내며 질문을 했다.
“그것보다 조금 더.”
“알겠습니다.”
나단이 마정석을 난로 안에 던져 넣자 안에서부터 오색찬란한 불길이 훅하고 번지며 장식용 구멍 사이사이로 환한 빛을 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넓은 공간 전체가 훈훈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다시 치료를 시작하는 겁니까?”
“그럴 생각이었지만… 자네가 버티기 힘들어 보여서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하고 내일 계속하는 쪽으로 할까 싶어. 치료하려고 부른 거지, 쓰러지게 만드려고 부른 건 아니니 말이야. 기력을 보충할 차나 한잔하고 가는 게 어떻겠나?”
유더의 질문에 키시아르가 대답했다. 그러나 유더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할 보고와 이야기는 오늘 거의 다 나눈 상태였다. 할 일도 많은데 더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아뇨. 저는 빠르게 끝내는 쪽이 좋습니다. 그냥 오늘 전부 끝내 주십시오.”
“그래?…….”
키시아르의 붉은 눈이 아직도 식은땀에 젖어 있는 유더의 얼굴과 상기된 뺨, 단추를 잠그지 못한 셔츠 안쪽을 훑었다.
“괜찮겠나? 체력이 한계에 달한 것 같은데. 너무 고집을 부리는 건 좋지 않아. 기절하면 정화석의 힘을 흡수하는 속도도 떨어지고.”
“괜찮습니다. 기절할 일도 없습니다.”
키시아르의 눈이 정확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더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정말인가?”
“네.”
“혹시 나와 차를 마시자는 말이 부담스러운 건 아니고?”
“무슨 소리이신지 모르겠군요.”
순간 가슴이 찔렸으나 유더는 태연한 얼굴을 가장하며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대답했다. 다행히 키시아르는 그 이상 추궁하지는 않았으나,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기색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내 말의 뭔가가 분명 마음에 안 든 것 같은데… 짐작이 가지 않으니 어쩔 수 없군. 알겠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성표를 감은 손이 한 줌의 정화석을 집어 들었다.
“아무래도 반점 색이 짙어질수록 없애는 데 드는 신성력도 더 많이 필요한 것 같으니, 이제부터는 양을 늘리고 성수를 추가하겠네. 기절하지 않겠다고 했던 말, 잘 지키게.”
키시아르가 여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성수병을 열어 손안의 정화석 위로 망설임 없이 부었다. 놀랍게도 성수는 손 아래로 흐르지 않고 그대로 돌에 흡수되었다. 한 병의 성수를 모두 흡수한 정화석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한 신성력을 머금고 투명한 흰 빛을 냈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손이 제 손등에 닿는 순간 눈을 감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곧 눈앞이 검게 변할 만큼 강렬한 고통이 전신에 내리꽂혔다.
* * *
‘자. 이제 동료 다섯 명을 의원 신세까지 지도록 만들 만큼 때려눕힌 이유를 들어볼 때가 되었군. 내가 들은 보고 외에 할 말이 있나, 유더?’
유더는 제 앞에 서 있는 키시아르를 올려다보았다. 잘 포장된 미소로 감추어 전혀 속내를 읽을 수 없는 얼굴을 보자 불현듯 울컥 분노가 치솟았다.
‘저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그들이 다친 것은 단순히 상호 동의에 의한 결투를 한 결과, 제게 졌기 때문입니다. 의원 신세를 졌다 해도 그건 그들이 감내해야 할 일이고, 단장님께서 저를 부를 만한 일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래. 그 결투 말이네. 대체 어쩌다 하게 된 건지 아무도 말하지 않더군. 애초에 왜 시작된 거지?’
‘제가 단장 자리에 오르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누군가를 인정하게 만들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힘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단장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그대로 해 주었을 뿐이다. 유더는 찔리는 것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