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그래서, 제 생각에는, 제클리스 하르탄과 손을 잡고 동부에 연결고리를 만들어 두는 것은 장기적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되리라 여겨집니다.”
“괜찮은 이야기군. 형님께서 좋아하시겠어.”
유더의 말에 맞장구를 친 키시아르가 이제 거의 팔꿈치까지 내려온 자줏빛 반점을 살핀 뒤 눈을 들었다. 긴 속눈썹 아래 감추어져 있던 붉은 눈동자가 선명히 유더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런데, 그 나한이라는 자. 외모는 어땠지? 보고서에는 왼쪽 얼굴에 큰 흉터가 있는 자라고밖에 쓰여져 있지 않던데.”
갑자기 그런 것은 왜 물어볼까. 유더가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미간을 살짝 찌푸리자 키시아르가 등 뒤의 나단 주커만 쪽을 향해 살짝 눈짓을 했다.
“혹시 나단처럼 남국 출신으로 보이던가?”
유더는 무표정하게 시립해 있는 나단 주커만을 보았다. 그의 피부색은 다른 이들과 달리 독특한 붉은빛을 띠었고, 회청색 머리칼 아래 자리한 선명한 푸른 눈동자가 그런 피부색과 대비를 이루어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그가 지닌 붉은 피부야말로 사람들이 남국인의 특징이라 생각하는 가장 흔한 요소 중 하나였다. 하지만 유더의 기억 속 나한은 흉터를 제외하면 평범한 피부색을 지니고 있었다.
‘머리칼 색이 나단 주커만의 눈동자 색과 좀 비슷하긴 했나….’
유더는 거의 검은색처럼 보일 만큼 짙은 푸른빛을 띠던 나한의 머리칼과 온기 없이 차갑던 회색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러나 세상에 검푸른 머리칼이나 회색 눈동자를 지닌 이들은 셀 수도 없이 많다. 남국인들처럼 단숨에 눈에 띌 만큼 강렬한 특징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 모습조차 환상으로 만든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나, 능력을 사용할 때 발해지는 미세한 기운까지 민감하게 느끼는 유더는 아마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나한이라는 말이 남국의 언어로 복수라는 뜻임을 아나?”
“예?”
그것은 생을 한 번 거슬러 되돌아왔음에도 처음 듣는 말이었다. 유더가 저도 모르게 반문하자 키시아르의 뒤에 있던 나단이 기다렸다는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난 레 우잔. 나단 레 가므. 루한 레 나한. 모다 수이린 안잔 뉼 레 우르.”
독특한 억양을 지닌 언어였다. 유더는 나단이 하는 말이 남국의 말임을 알아차렸지만 뜻까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나단’과 ‘나한’이라는 단어가 사이에 끼어 있는 것만이 귀에 걸리듯 인식되었다.
“방금 무슨 말을 하신 겁니까.”
“탄생과 죽음, 축복과 저주. 자비와 복수. 모든 것이 사막의 낮밤과 같다. 남국의 오래된 격언을 읊은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뒤 나단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복수라는 단어가 쓰인 가장 유명한 격언이기도 합니다.”
과연 거대한 사막을 두고 대륙의 다른 나라들과 완전히 격리된 지역이라 그런지 독특한 격언이었다.
“어떤 의미를 가진 말입니까.”
유더의 질문에 나단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사막의 낮은 물 한 모금 구할 수 없을 만큼 메마르고 뜨겁습니다. 하지만 밤은 반대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 얼어붙을 만큼 춥지요. 같은 하루 안에 묶인 낮과 밤조차 그러한데 모든 것이 상반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 어느 쪽이든 원하는 바를 향해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유더는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제대로 생각해 보기도 전 또다시 팔을 타고 흐르는 격통을 참아내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 면, 그 안에 있는 나단이라는 단어는 무슨 뜻인지 물어도 됩니까.”
“축복. 내가 내린 이름이지.”
답은 뜻밖에도 키시아르 쪽에서 돌아왔다. 또다시 정화의 힘을 모두 소진하고 빛을 잃은 정화석을 내려놓으며 말을 보탠 키시아르의 표정은 담담하기 그지없었으나, 유더는 그의 말에 무척 놀랐다.
“단장님께서… 말씀이십니까?”
“어린 시절 전하의 노예로서 입궁했던 저를 면천시켜 주시며 내려주신 이름입니다. 방금 전의 그 격언을 들으신 뒤 거기에서 그 단어를 택해 주셨죠.”
몰랐다. 이전 생의 유더는 이런 말을 그들에게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단 주커만이 남국 출신으로 키시아르를 오래도록 모셔 온 부관임은 알았지만 그 시작이 황자 시절의 노예부터였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냥 면천시킨 것도 아니고, 기사 작위를 내리고 부관으로 만든 뒤 소드마스터가 될 때까지 곁에 두었다는 건……. 보통 인연이 아니군.’
그리고 그런 사실이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도록 감추었다는 사실은 키시아르가 그만큼 제 부관을 아끼고 그의 능력을 높이 샀음을 짐작하게 했다.
그 정도 은혜를 입은 주군이 누구에게 죽임을 당했을지 모르지 않았을 텐데도 왜 지난 생의 나단 주커만은 유더에게 복수하지 않고 펠레타 영지를 떠나 조용히 사라지기만 했을까.
이전 생에서는 일부러라도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의문이 새삼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유더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거나 말거나 나단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중이었다.
“그래서 저는 그자의 이름이 아마 본명은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리… 있군요.”
“사실 첫 번째 보고서에 아일 경이 그자의 이름을 적어 보내주신 뒤, 전하의 명으로 관련한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나한이란 자와 동일인으로 추정되는 이가 1년 전부터 제국 전체를 돌아다니며 비슷한 방식으로 각성자들을 모으고 있었더군요.”
뜻밖의 말에 유더는 고통조차 잊고 고개를 들었다. 나단이 유더의 놀라움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들을 수상하게 여겨 신고했던 이들의 기록이 꽤 남아 있어 찾기 쉬웠습니다. 그는 어느 정도 인원이 늘어나면 따르는 이들을 이끌고 외국으로 나간 뒤, 홀로 다시 돌아와 다른 지역에서 같은 일을 반복한 듯하더군요. 아일 경의 생각대로 어떤 집단에 속해 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그러면… 다음에 또 제국에 돌아올 수도 있겠군요.”
“높은 확률로 그렇겠죠.”
나단이 유더의 말에 수긍하자 이내 키시아르가 뒤이어 말을 보탰다.
“아무래도 주의해야 할 자 같으니 황제 폐하께도 보고드릴 생각이라네. 각 지역의 관리들에게도 공문을 보내야겠지. 조사도 이어나가야 할 테고.”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아직은 확실히 모르지만, 앞으로 나한의 정보를 추적해 나가게 된다면 언젠가는 그를 다시 보게 될 확률이 높아 보였다. 유더는 나한을 다시 만난다면 반드시 그를 산 채로 사로잡아 이곳으로 끌고 오겠노라 결심했다.
“그런데 유더.”
키시아르가 새로운 정화석을 가져다 대며 유더를 불렀다.
“예.”
“그 나한이라는 자의 환상능력이 강력하여 자네가 스스로 팔에 부상을 입혀 벗어나야만 했다고 들었지만, 보고서에는 정확히 어떤 환상 능력을 겪은 것인지까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더군.”
말이 끝난 순간, 칼에 찔린 듯 날카로운 고통이 올라왔다. 유더의 손가락이 움찔 떨리는 것을 보며 키시아르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어떤 능력이었나? 무엇을 보았기에 스스로 상처를 입혀야만 했던 거지?”
“…….”
유더는 제 의지와 상관없이 고통으로 떨리는 팔뚝을 향해 당황스러움에 물든 시선을 내렸다. 무슨 환상을 보았느냐고? 말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차라리 이곳을 나가 제 팔에 남은 자줏빛 반점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공개하는 쪽이 나았다. 유더에게 있어 진짜 감추고 싶은 쪽은 반점이 아니라 바로 환상 속에서 보았던 키시아르였으니까.
당신을 보았다고 말하면 눈앞의 사내는 어떤 얼굴을 할까. 그가 어떤 의미로 생각하든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은 분명했고, 그것을 차치하더라도 일단 환상에 나온 것이 지금의 키시아르가 아닌, 이전 생에서 그가 죽였던 키시아르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절대로 말할 수 없다. 유더는 쑤셔 오는 팔의 아픔을 참아내며 입을 열었다.
“……꼭 말해야 합니까?”
그 말에 눈을 조금 크게 떴던 키시아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아. 혹시 뭔가 부끄러운 거라도 보았나? 누군가의 나체라거나…….”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단호한 대답에 돌아온 것은 당연히도 웃음소리였다.
“하하. 사실 그렇게까지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종류를 알면 이후 그를 다시 만났을 때 대처할 방법을 찾아 마병단 전체에게 알릴 수 있을 것 아닌가. 단지 그뿐이야.”
제가 무엇을 보았는지는 절대로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으나 그렇게 말하는데 아주 비밀로 하기도 어려웠다. 유더는 잠시 고민 끝에 간략하게 정보를 정리했다.
“대상자의 공포를 자극하는 환상을 보여주는 것 같더군요.”
“공포를? 무엇을 무서워하는지 어떻게 알고?”
“상대의 기억 속에서 뽑아내어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자가 보여준 환상에 굴복해 미쳐 버린 이들을 보았기에 일찌감치 자해를 해서라도 벗어나는 쪽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더의 담담한 설명에 키시아르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효과가 있었다니 다행이지만, 다음에 만났을 때는 굳이 그런 방법을 쓰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만약 이후에 다시 만나 비슷한 상황이 찾아온다면 유더는 그때도 망설임 없이 제 팔을 그을 테지만, 일단 키시아르의 앞에서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러는 사이 키시아르는 벌써 절반 이상의 정화석을 소진하여 테이블 한쪽에 회색 돌멩이 산을 쌓아두고 있는 중이었다.
힘을 잃고 오염된 정화석은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임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짧은 시간 사이 엄청난 돈을 물 쓰듯 써버린 셈이다. 하지만 키시아르는 전혀 아까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제… 드디어 팔꿈치 안쪽까지 내려왔군.”
키시아르가 만족스럽게 스스로 이루어낸 성과를 바라보았다. 정화석을 아낌없이 사용한 덕에 반점의 크기가 절반 이상 줄어들었으니 흐뭇할 만도 했다.
“땀도 닦을 겸 잠시 쉬지.”
키시아르가 가볍게 손짓을 하자 나단 주커만이 곧바로 책상 쪽으로 다가가 꺼내 온 손수건 하나를 그에게 건넸다. 나단은 뒤이어 이마와 목에 밴 땀을 가볍게 눌러 닦아내는 키시아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유더에게도 손수건을 건넸다.
“저는 괜찮습니다만…….”
“닦게. 나보다는 자네 쪽이 비교도 안 될 만큼 젖었잖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