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더가 팔을 내리자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온 키시아르가 허리를 숙여 망설임 없이 유더의 제복 상의를 벗기고 안쪽 셔츠 단추까지 모두 빠르게 풀었다.101화
스스로는 옷을 걸칠 일도 없을 황족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익숙한 손길을 보며 유더는 조금 묘한 기분을 느꼈다.
누군가의 앞에서 옷을 벗거나, 벗은 상태가 된 경험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누군가 옷을 벗겨준 것은 처음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상대가 키시아르 라 오르라니. 이전 생에서 그와 수없이 밤을 보냈음에도 겪어본 적 없는 낯선 경험이었다.
“다 됐군.”
마지막 단추를 풀고 스스럼없이 물러나는 키시아르에게서 문득 은은한 향이 풍겼다. 이전에 신과로 갈지, 술과로 갈지를 결정하기 위해 이곳에 왔을 때 그에게서 풍기던 향수 향과는 다른 미약한 향이었다.
유더는 그 향에 순간적으로 정신을 빼앗겼다가, 고개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옷을 입고 벗는 데… 능숙하시군요.”
“뭐, 그렇겠지. 아마 내가 오르 제국 천년 역사 속에서 가장 단추를 빨리 풀고 잠글 수 있는 황족일 거라는 덴 아무도 이의가 없을 거야.”
“연습이라도 하셨습니까.”
“연습이라고 해야 하나…….”
무어라 대꾸하려던 키시아르가 잠시 말끝을 흐리고는 이내 한쪽 입꼬리만을 살짝 들어 올렸다가 도로 내렸다.
“뭐, 그런 것이 지금 중요한 사안은 아니지. 자, 어디 얼마나 번졌는지 보여 주게.”
유더는 둔한 통증이 올라오는 오른팔을 내려다보다 천천히 셔츠와 장갑까지 모두 벗었다. 키시아르의 날카로운 시선이 붕대가 감긴 왼쪽 팔뚝과 어깨까지 번진 자줏빛 반점으로 향했다.
“…이 정도면 더 이상 반점이라 하기도 어렵겠군.”
손끝으로 갈수록 짙어지다 못해 거의 검은색을 띠는 반점 색을 보며 키시아르가 작게 중얼거렸다. 평소와 다른 무거운 목소리였다.
“지금도 계속 아픈가? 참을 만한지 아닌지와 관련 없이 사실만 답해.”
표정을 보고 무슨 답을 하려 했는지 짐작한 듯 재빨리 추가한 말에 유더는 입을 떨떠름하게 다물었다가 이내 다시 열었다. 그가 덧붙인 말이 아니었다면 정확히 키시아르가 예상한 대로 말하려 했기에 마치 생각이 읽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픕니다.”
“어느 정도로?”
키시아르가 환자에게 문진하는 의사처럼 반문했다.
“보시는 바처럼 대화에 지장이 있을 만큼 심하지는 않습니다만… 가끔씩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크게 쑤시기도 하더군요.”
“가끔씩이라면 규칙적으로 그러는 건가? 아니면…….”
“간헐적입니다. 통증이 갑자기 심해지는 기준은 잘 모르겠습니다.”
“간헐적이라.”
키시아르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중얼거리며 무릎 위에 올린 손가락을 툭툭 두드렸다. 그 순간 그의 충실한 부관이 여러 가지 물건을 들고 나타났기에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잠시 소강되었다.
‘저건… 신전에서 쓰는 정화석과 성표? 그 외에도 뭔가가 많은데.’
나단이 가져온 것은 태양신 신전의 사제들이 사용하는 각종 도구였다. 대부분은 무언가를 정화할 때 쓰이는 물건들이었으나, 치료나 신성력을 보완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들도 있었다. 그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잘 쌓아 둔 도구들을 테이블 위에 올리자 키시아르가 기다렸다는 듯 정화석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정화석은 오염된 것을 정화하는 데 특히 좋다고 알려진 투명한 마정석에 신성력을 약간 불어넣어 만든 것이었다. 대부분은 흰색을 띠었는데 그 색의 농도가 물에 우유를 탄 듯 뿌연 것은 하등품으로, 맑고 투명한 흰 빛을 띨수록 상등품으로 취급받았다.
그리고 키시아르의 손에 들려 있는 정화석은 당연히도 최고급 보석처럼 빛나는 상등품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저 정도로 등급이 높은 정화석이라면 하나당 같은 무게의 금덩어리 정도의 가치가 있을 텐데.’
그런 귀한 것을 짧은 시간 안에 테이블 가득 쌓을 만큼 구해 온 나단도 대단했지만 금액을 지불했을 키시아르도 엄청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유더는 제 치료를 위해 키시아르가 그렇게까지 준비했다는 사실에 솔직하게 놀랐다.
“편지를 받자마자 신전에서 정화와 치료에 도움이 되는 것들은 모두 가져오라 명했다. 내가 가진 힘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울 듯해서 말이야.”
정화석에 닿은 유더의 시선을 알아챈 키시아르가 조용히 설명을 해 주었다.
“너무… 비싼 것들 같습니다만.”
“내가 직접 생으로 힘을 쓰는 데 들어갈 부담에 비하면 싸지.”
“차라리 사제 한 명을 납치해 오시는 쪽이 쉽지 않으셨겠습니까?”
“비밀을 아는 자를 늘릴 때는 신중을 기해야 하지 않겠나.”
그렇게 말하는 키시아르의 시선 속에서 유더는 그가 가케인과 데브란에게 비밀을 들킨 것을 그리 긍정적으로 판단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알고 있네. 가케인 볼룬발트와 데브란 하르투데가 입을 쉽게 열 이들이 아니라는 것도 물론 믿고 있고.”
하지만 모든 이들이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키시아르의 붉은 눈이 그러한 뜻을 말없이 전달하고 있었다.
“나도 계속 이렇게만 할 생각은 아니야. 그쪽 전문가의 의견도 들어 볼 필요성이 있으니까. 다만 입이 무겁고 경험이 많은 이를 찾으려면 시간이 꽤 걸릴 테니, 그때까지는 되도록 치료할 일을 적게 만들게.”
저택 하나 정도는 사고도 남을 만큼 많은 정화석을 쌓아 둔 채 하는 말이라 그런지 전보다 훨씬 더 압박감이 넘쳤다. 유더가 고개를 얌전히 끄덕이자 키시아르를 두르고 있던 분위기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자. 그러면 시작하지. 팔을 내밀어 보겠나?”
유더가 손을 내밀자 키시아르가 손등 위에 정화석을 얹었다. 그와 동시에 키시아르의 손에서 터져 나온 흰 빛이 정화석을 통해 유더의 피부 안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윽…….’
유더는 제 어깻죽지 부근이 근질거리며 저릿저릿하게 쑤시는 감각을 느꼈다. 이를 꽉 악물고 숨을 최대한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쉬는 동안 희었던 마정석이 점차 회색빛으로 물드는 것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평범한 돌이 된 정화석을 키시아르가 도로 떼어내어 옆에 내려놓았다.
“다행히 효과가 있긴 하군.”
키시아르의 말대로 변화가 있기는 했다. 유더의 어깨는 정화석이 닿기 전보다 자줏빛으로 변한 범위가 줄어든 상태였다. 다만 그 정도가 고작 손가락 한 마디 정도뿐이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하지만 예상보다 더 미미하긴 하군요. 이대로라면 준비해 온 정화석이 모자랄 수도 있겠습니다.”
뒤에 서 있던 나단이 낮게 대답하자 키시아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쌓여 있던 물건 중 태양신을 상징하는 성표를 들었다.
붉은 루비를 중심으로 길이가 서로 다른 12개의 방사형 빗살을 금과 은으로 만들어 박아넣은 성표는 평민들이 들고 다니는 평범한 나무 성표 따위와는 전혀 다른 성스러움을 뽐냈다. 마치 교황이나 할 법한 화려한 물건이었다.
설마 그런 번쩍대는 물건을 제게 하라고 주지는 않을 것이다. 유더가 꺼림칙한 얼굴로 성표를 보는 것을 눈치챘는지 키시아르가 낮게 웃었다.
“안심하게. 이건 내가 해야 하는 거니까.”
“…다행이군요.”
“신성력이 유독 강하기로 유명했던 45대 교황이 직접 축복을 불어넣어 만든 성표야. 신성력을 증폭시키기에 좋은 매개체지.”
키시아르는 성표에 연결된 금줄을 제 손에 감고 다시 번 정화석을 들었다. 유더의 손등에 닿은 두 번째 정화석 역시도 몇 분이 지나지 않아 곧 검은 돌멩이처럼 변해버렸다.
그래도 이전보다는 조금 더 효과가 강해진 것이 보이기는 했다. 어깨선 부근을 맴돌던 자줏빛이 이제는 확연히 어깨 아래로 내려간 상태였다.
효과가 있는 것을 확인한 뒤 키시아르는 본격적으로 반복 작업을 시작했다. 그가 정화석에 신성력을 불어넣어 유더의 손등에 댔다 뗄 때마다 자줏빛 반점들이 서서히 아래로 사라지며 본래의 흰 피부를 드러냈다.
하지만 칼로 찌르며 후비는 것 같은 고통 또한 계속되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유더의 이마와 등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계속해서 신성력을 쓰고 있는 키시아르의 이마에서도 얼핏 땀이 배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계속 이를 악물고 있으면 이가 상할 텐데. 차라리 뭐라도 말을 하게.”
“…뭘 말입니까.”
유더가 조금 늦게 대답하자 키시아르가 새로운 정화석을 집어 들며 여상히 입을 열었다.
“보고서에는 다 쓰지 못했을 이야기들이 있을 것 아닌가.”
“…….”
“이를테면 환상 능력을 지녔다던 나한이라는 이름의 각성자에 대한 이야기라거나.”
키시아르가 정화석에 신성력을 불어넣으며 말을 이었다.
“동부 정세를 직접 보고 온 입장에서 느낀 점이나, 아니면 아페토 가와 디아카 가에 대한 이야기나. 하려면 뭐든 할 수 있겠지.”
“지금 말씀드리면, 너무 두서없는 말이 될 것 같습니다만……. 그런 보고…는, 나중에 따로 다시 받으시는 쪽이 낫지 않으시겠, 습니까.”
중간중간 불꽃이 튀듯이 올라오는 고통 때문에 유더의 대답은 저도 모르게 느려졌다. 놀랄 만큼 얼굴에 고통과 동요의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있으나, 그래도 고통은 고통이다. 키시아르는 지나치게 고통을 참는 데 익숙해 보이는 자신의 보좌를 향해 조용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시간을 굳이 그리 낭비할 필요 있겠나. 알아서 걸러 들을 테니 그냥 지금 하게.”
그리 말하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유더는 고통과 긴장이 계속되며 점차 멍해져 가는 머릿속을 뒤져 겨우 그에게 하려던 말들을 짜내었다.
나한이 아무래도 단순한 산적은 아닌 것 같다는 추측, 그의 환상 능력은 눈에 보이는 타격 없이도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는 것, 아페토 공작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묘한 연구의 정체를 조사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 제클리스 하르탄과 나누었던 대화들에 이르기까지 드문드문 흘러나오는 말을 여과 없이 중얼대는 동안 키시아르는 십수 개의 정화석을 더 소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