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100화 (100/805)

100화

“괘, 괜찮아요. 돌아갈 때까진 진짜 문제없을 거예요.”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참지 말고 곧바로 말해.”

“네…….”

과연 지미는 제 몸 상태를 지적하자마자 곧바로 조용해졌다. 그렇게 일행은 빠른 속도로 수도에 점점 더 가까워져 갔다.

“…이변이 없다면 곧 도착하겠어. 상태는 좀 어때, 유더?”

말을 달리는 중에도 바로 옆에 붙어서 고삐를 연결한 가케인의 목소리는 아주 잘 들렸다. 벌써 몇 번은 물어본 질문이었으나, 한숨도 자지 못하고 걱정한 티가 역력한 가케인의 표정에서 진심이 느껴졌기에 유더는 이번에도 그만하라는 타박을 주지 못했다.

“괜찮아.”

능력을 사용하지 않아 상태가 어제보다 더 심해지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가케인은 거기까지는 알지 못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안심했다.

“오늘은 성문 통과가 좀 빨랐으면 좋겠다. 수도는 뭐든지 사람이 많다 보니 너무 느려서 탈이니까.”

수도는 나가기는 쉬워도 들어가기는 어려운 곳으로 이름이 높았다. 일단 가장 바깥에 있는 수도 경비대의 검문을 통과하는 것부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황족 정도 되지 않고서는 귀족이라 해도 순서에 따라 철저한 검문을 거쳐야만 수도의 가장 바깥쪽인 제 7벽 쪽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드디어 검문소까지 도달한 일행은 이내 그것이 아무런 의미 없는 걱정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혹시 마병단 소속이십니까?”

검문소 앞에 길게 줄을 선 이들의 가장 뒤쪽에 선 유더 일행을 향해 다가온 병사 한 명이 검은 제복을 보며 먼저 말을 걸었다.

“아, 네. 그렇습니다.”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물건을 가지고 계십니까?”

병사의 물음에 가케인이 팔을 들어 제복 소매에 달린 단추를 보여주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금속 단추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어떤 충격에도 쉽게 부서지지 않도록 가공한 마정석으로 만든 단추였다.

단추에 새겨진 마병단 문장을 유심히 살핀 병사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뻗어 검문소 안쪽을 가리켜 보였다.

“확인되었습니다. 저쪽으로 들어가시죠.”

“네?”

“여러분이 오시면 곧바로 저곳으로 오시도록 하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지시라고요?”

가케인이 눈을 깜박이다 유더를 돌아보았다. 유더는 제복 안에 감추어진 팔이 욱신대는 것을 느끼며 병사가 가리킨 검문소 건물을 바라보았다. 이런 예외상황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 이유밖에 없다.

수도의 문을 마음대로 통과할 수 있는 사람. 즉 황족의 명령뿐이었다.

“…가자.”

유더는 비틀대지 않도록 다리에 힘을 주어 걷기 시작했다. 말고삐를 병사에게 모두 넘긴 일행들이 재빨리 뒤따라왔다.

“누가 그런 명을 내린 걸까요? 통과시키란 것도 아니고 왜 저기로 오라는 건지…….”

“걱정하지 마. 아는 사람일 테니까.”

유더는 움츠러든 지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뒤 검문소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 있던 이들을 모두 미리 내보냈는지, 내부는 몹시 조용했다. 유더는 의자에 앉아 있던 한 남자가 천천히 일어서는 것을 보며 가만히 시선을 마주했다.

아름다운 흰 얼굴, 금빛 속눈썹 아래 드리운 현명한 붉은 눈동자.

눈이 마주친 순간 끊임없이 욱신대던 팔의 고통조차 잊혀졌다.

“정확히, 3일째군.”

평소 입던 흰 제복이 아니라 황족이자 공작다운 차림을 한 키시아르가 부드럽게 눈을 휘어 사람을 홀릴 것만 같은 미소를 지었다.

“임무를 마치고 무사히 복귀한 것을 축하하네.”

“단장님!”

유더의 등 뒤에서 지미가 깜짝 놀라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더는 그제야 조금 정신을 차리고 다른 동료들과 함께 고개를 숙여 경례를 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오늘 새벽 도착한 이 마지막 편지 덕분이라네.”

키시아르가 손에 들고 있던 편지봉투 하나를 보란 듯 가볍게 흔들었다. 어젯밤 가케인이 써서 보낸 마지막 편지였다. 다행히 키시아르가 그들이 도착하기 전 제때 편지를 받은 모양이었다.

“이게 아니었다면 아마 우린 길이 엇갈렸을지도 모르겠어. 사실은 오늘 하르탄을 향해 떠날 예정이었거든.”

“다, 단장님께서 말입니까?”

데브란이 깜짝 놀라 반문하자 키시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사태가 심상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직접 확인하려 했지. 유능한 보좌가 정말로 3일 만에 전부 끝내고 돌아오는 바람에 그러지 못하게 되었지만 말이야.”

가벼운 농담을 던지듯 바라보는 키시아르의 눈빛은 여전히 부드러웠으나, 유더는 그의 태도가 어쩐지 평소와 조금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검문을 기다릴 시간이 없을 것 같아 자네들이 돌아오면 이곳으로 곧바로 부르도록 명했네. 혹 불필요한 배려였나?”

“아닙니다. 몸소 이렇게 나와주실 줄은 몰라서……. 저, 저는 정말로… 편지를 보셨다면 아시겠지만, 단장님께서 저 녀석들을 보내 찾아 주시지 않았다면 휴가를 보내지도 못하고 죽었을 겁니다. 저와 가족들을 구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

거친 인상의 데브란이 키시아르의 앞에서 수줍게 얼굴을 붉히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니 순간적으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듯, 지미가 헛기침을 하고 가케인도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다행히 데브란은 키시아르에게 정신이 팔려 동료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감사의 인사는 내가 아니라 동료들에게 하게. 그러면 곧바로 돌아가도록 하지. 검문소 뒤쪽에 마차를 대기시켜 두었으니 타도록.”

“아, 알겠습니다!”

데브란과 가케인, 지미가 먼저 검문소 뒤쪽 문으로 빠져나간 뒤, 유더는 천천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키시아르가 천천히 곁으로 다가와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깨까지 번졌다고.”

주어가 없어도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간 각성자는 자네 혼자가 아닐 텐데, 부상은 자네 혼자 다 입고 돌아오다니 내가 무어라 생각하면 되겠나?”

부드러운 목소리였으나 평소보다 명백히 낮았다. 유더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작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방심했습니다.”

“사과를 듣고자 한 말이 아니야.”

키시아르의 시선이 붕대가 감긴 왼팔에 이어 겉보기에는 멀쩡한 오른팔로 향했다. 그는 한참 동안 유더의 오른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픈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겠군요. …이전과 달리 조금 통증이 있기는 합……윽.”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키시아르가 오른손을 잡았다. 힘이 거의 들어가지 않은 움직임이었으나 그와 닿은 순간 마치 반응하듯이 오른팔 전체가 푹 찔리는 것처럼 크게 쑤셔 유더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말았다.

고통을 참아내느라 미세하게 일그러진 표정을 보며 키시아르의 얼굴에도 덩달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혹시 몰라 이곳에서 기다리기를 잘했군…….”

그가 유더의 손을 놓았다. 유더는 저릿저릿하게 욱신대는 통증을 감내하며 키시아르를 올려다보았다.

“어서 타게. 아무래도 돌아가자마자 둘이서 할 일이 꽤 많을 것 같으니.”

“어서 오십시오.”

키시아르의 말대로 검문소 뒷문 바깥에 세워져 있던 검은 마차 안에서 그의 부관 나단 주커만이 고개를 살짝 내밀고 인사를 했다.

유더는 마차에 올라타며 문득 나한의 환상 속에서 보았던 키시아르의 얼굴을 떠올렸다. 눈앞의 키시아르는 그 환상 속의 키시아르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이 실제로 마주하니 확실하게 느껴졌다.

그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정말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동안 혹시 초조한 상태였던 건가?’

검은 장갑으로 감싼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낯설게 자문해 보았다.

답은 알 수 없었다.

* * *

다시 돌아온 마병단 건물은 여전히 평화로워 보였다. 키시아르는 가케인과 데브란, 지미를 각자의 숙소로 돌아가 쉬라고 명한 뒤 유더를 데리고 제 숙소로 올라갔다.

키시아르가 머무는 꼭대기층도 3일 전과 달라진 것이 전혀 없었다. 오색 찬란한 불꽃을 타닥타닥 뿌리며 타오르는 마정석 난로와 그 위에 놓인 신검 오르를 지나 소파 쪽에 다다른 키시아르가 몸을 돌려 나단 주커만에게 명했다.

“나단. 문을 잠그고 아침에 준비해 두라 한 것들을 가져와.”

“알겠습니다.”

“유더. 자네는 이쪽으로.”

황금빛 수가 놓인 군청색 코트를 벗고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키시아르가 망설임없이 유더를 불렀다. 소매를 걷은 것으로 모자라 목에 매고 있던 크라바트까지 풀어헤치는 것을 보며 유더는 대체 그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약간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뭘 하시려는 겁니까?”

“뭐긴 뭐겠어.”

짤막하게 대꾸한 키시아르가 유더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는 안 벗나? 반점이 어디까지 번졌는지 보려면 이제 소매만 올리는 정도론 안 될 텐데.”

“아, 네.”

유더는 소파에 앉아 제복 상의를 벗었다. 어제도 그랬지만, 양손 모두를 다친 탓에 벗는 속도가 평소보다 현저히 느렸다. 단추를 풀려던 시도가 두 번 실패하자 그 모습을 보던 키시아르가 무언가 깨달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아, 그렇군. 양팔이 다……. 도와줄 테니 손 내리게.”

“괜찮습니다. 혼자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까지 명령을 해야 들을 건가?”

명령이라는 말까지 나온 이상 싫어도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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