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돌아가라고? 이 꼴로?”
키올레가 기막힌 목소리로 반문했다.
“너 때문에 여기서 있었던 일을 알릴 수도 없는데 대체 가서 뭐라고 하란 말이야? 죽어버린 파비엘에 대해서도 말해야 하는데…….”
“그건 네가 생각해야 할 일이지. 만약 이후에 내 귀에 조금이라도 디아카 가에서 이곳 주변에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말이 들려온다면 그때는 꼼짝없이 잠든 채로 관에 들어가게 될 테니까.”
영원히 잠든 채로 늙어 죽게 될 것이라는 저주 같은 말을 음산하게 중얼거리는 유더를 보며 키올레의 눈동자 속에 또다시 분노가 어렸다. 그러나 그 속에는 여전히 아직 압도적인 힘을 지닌 대상에 대한 공포가 살아 있었다.
“…….”
유더와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돌아본 키올레가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잠시 후 그는 몸을 돌렸고, 이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오만하게 굴더니, 유더 형 말에는 꼼짝도 못 하네요.”
지미가 사라진 키올레 쪽을 보며 꼴 좋다는 얼굴로 히죽 웃었다. 그러나 가케인은 뭔가 찜찜한 얼굴로 유더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저렇게 그냥 보내도 되는 거야? 저 사람이 돌아가서 우리에 대해 쓸데없는 말이라도 한다면 디아카 공작가에서 나설 수도 있잖아.”
“그렇게 못 해. 살려주는 대신 입을 다물기로 서약서를 썼으니까.”
“서약? 그사이에 그런 것까지 했어? 그렇다면 뭐…. 유더 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 처리했겠지.”
가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고는 이내 유더의 팔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아직도 피가 나는 것 같아. 어지럽지 않아? 어서 가자.”
“그래요. 어서 가요 형. 사람이 피를 너무 많이 흘리면 쓰러질 수도 있댔어요.”
유더는 마지막으로 동굴 입구를 향해 시선을 한 번 주고는 저를 이끄는 동료들과 함께 산을 내려갔다. 내려가는 동안 동굴에서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하자 세 사람은 역시나 충격을 받은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지미는 나한의 기이한 행동들을 이해할 수 없어 했고, 가케인은 제가 유더의 곁에 없었다는 사실을 깊이 자책했다. 데브란은 아페토 가가 각성자를 노리고 저지른 흉악한 행위들 너머에 더 깊은 어둠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진저리쳤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공감한 것은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 키시아르에게 이 모든 것을 보고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당신이 마병단 단장 보좌라던 그… 유더 아일이란 분이군요. 말씀은 다른 분들께 먼저 들었습니다.”
하르탄으로 돌아간 유더는 곧바로 자카일의 형, 제클리스를 만났다. 몸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지만 이 정도 부상은 이전 생에서도 셀 수 없이 많이 입어보았기에 괜찮았다.
오히려 중상을 입고도 황제를 찾아가 보고를 한 뒤에야 겨우 치료를 받을 수 있었던 그때에 비하면, 멀쩡히 앉아서 검에 베인 상처를 치료받으며 제클리스와 대화하는 지금은 비교도 할 수 없이 편한 상태라 할 만했다.
게다가 제클리스는 자카일과 달리 몹시 말이 통하는 상대이기도 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겠습니다. 저는 데르밀라를 사랑하기에, 그녀의 가족인 데브란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무엇을 해야 한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 말은, 돌아가신 전 영주님과 달리 디아카 공작가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까.”
유더가 조금도 돌려 말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묻자 제클리스가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는 이내 선량한 얼굴 가득 결의의 기색을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말은 즉 제클리스가 마병단과 그 뒤에 있는 펠레타 공작 키시아르, 그리고 더 나아가 황제를 지지할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본래대로라면 별것도 아닌 기사 한 명이 그렇게 말해 보아야 별 흥미를 끌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제클리스 하르탄은 원한다면 하르탄의 영주가 될 수 있는 상태였다. 하르탄은 작은 영지를 지녔다 해도 분명 동부의 전통 있고 오래된 귀족 가문 중 하나였다.
디아카 가의 세력기반이 되어주는 동부 중심에 제 편 하나를 심어둘 수 있다면 키시아르나 황제에게도 그리 나쁜 이야기는 아니리라.
게다가 제클리스가 그들의 편이 되어준다면 자카일과 아페토가 결탁한 건이나, 동부에서 아페토 가가 저지른 일에 대한 처리를 훨씬 쉽고 빠르게 진행할 수도 있었다.
계산을 끝낸 유더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제클리스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알겠습니다. 제클리스님의 생각은 제가 분명히 단장님께 전달 드리죠. 저희가 돌아간 뒤 단장님께서 제클리스님께 따로 연락을 주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표면적으로는 이전 영주님과 다름없는 입장을 취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키시아르에게 연락이 올 때까지 겉으로는 이전과 다름없이 디아카 공작가에 호의적인 모습을 유지하라는 뜻이 담긴 유더의 말에 제클리스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그때까지 자카일은 밖으로 나서지 못하도록 해 두지요. 아까 말해 주신 그 도망친 각성자 2사람도 찾아내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유더는 제클리스에게 데브란에게 두들겨 맞고 도망친 각성자 용병 2사람의 수색과, 그들이 머물렀던 동굴 주변의 감시를 부탁했다. 거기 머물던 이들이 다 죽거나 도망쳤으니 아페토 가에서 분명 이상현상을 알아내고 조사를 하려 할 터였다. 그들이 도망친 용병들을 찾아내기 전 이쪽에서 먼저 찾아야 했다.
“저… 왼손의 상처는 치료를 끝냈습니다만, 다른 곳에는 상처가 더 없으십니까?”
두 사람의 대화가 얼추 마무리된 것을 눈치 빠르게 알아차린 의원이 사이에 조심스럽게 끼어들어 입을 열었다. 유더는 붕대가 감긴 왼쪽 팔뚝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그, 오른손도 불편해 보이시는 것 같아서…….”
그렇게 티가 났나. 유더는 지금도 간헐적으로 엄청나게 욱신대고 있는 오른팔을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불편하지 않습니다. 괜찮으니 나가 보시죠.”
“아, 알겠습니다….”
“저도 이제 일어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 밤은 편히 쉬시고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의원이 일어나자 제클리스도 몸을 일으켰다. 유더는 그에게 내일 새벽 조용히 떠날 테니 인사는 따로 하지 않겠다고 말해 둔 상태였다.
그들이 떠난 뒤 유더는 침실에 홀로 남겨졌다. 제클리스와 대화를 하겠다는 명목으로 다른 이들을 모두 내보낸 상태였기에 오른팔의 반점이 어디까지 번졌는지 확인할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유더는 빠르게 장갑과 제복 상의를 벗고 안에 걸쳤던 내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이건…….’
예상은 했으나 옷 안에서 드러난 꼴은 그야말로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오른손 끝에서부터 팔꿈치를 넘어, 어깻죽지에 이르기까지 팔 한쪽 전체가 온통 자줏빛으로 물든 상태였다. 마치 독에 당한 것 같은 불길한 색상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보기 좋진 않군….’
다만 예상과 다른 것도 하나 있기는 했다. 손바닥 부분은 거의 검게 보일 만큼 짙은 자줏빛이 되었는데, 어깨 부근은 아주 옅은 보랏빛에 불과했다. 색에 차이가 생긴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것도 정보는 정보이니 머릿속에 잘 기억해 두기로 했다.
주먹을 쥐었다 한 번 펴는 순간 또다시 팔이 욱신거려 유더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이봐, 유더. 제클리스님과의 대화는 이제 끝났어? 잠깐 내 말 좀 들어 봐. 글쎄 내 동생 데르밀라가 내일 수도로 가지 않겠다고……!”
“유더! 떠나기 전 단장님께 날려 보낼 보고서를 다 썼는데 혹시 빠진 부분이 있는지 확인 좀……!”
“…….”
방문을 벌컥 열고 얼굴을 내민 데브란과 가케인이 제 몸을 보고 나란히 침묵하는 순간, 유더는 드물게 난감함을 느꼈다.
‘…옷 벗기 전에 문부터 잠갔어야 했는데.’
어서 반점을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팔려 그만 깜박 잊고 말았다. 누가 보아도 평범한 부상이 아닌 자줏빛 반점을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까.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이려 드는 이를 상대하는 것보다도 어렵게 느껴졌다.
***
“형들. 왜 떠날 때부터 지금까지 한마디도 안 해요? 나 자는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다음날 새벽같이 하르탄을 나선 일행들은 해가 뜰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달렸다. 본래 예정과는 달리 아페토 가의 동굴에서 구해낸 다른 각성자들과 데브란의 가족들은 성에 남았고, 데브란만 일행에 추가되었기에 이동속도는 무척 빨랐다.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어젯밤 들켜버린 유더의 오른팔 상태 때문이었다.
유더는 가케인과 데브란에게 그 반점이 생긴 이유를 최대한 잘 설명해 보려 노력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어차피 유더도 그것이 붉은 돌에서 나온 기운으로 인해 생겼다는 추측 외엔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곳에 오기 전부터 그랬었다는 말로 원인을 뭉뚱그린 뒤 치료방법이 아직 확실치 않아 키시아르 단장이 알고 있는 방법으로 상태를 호전시켜 왔다 답하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가케인과 데브란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데브란은 그런 끔찍한 팔 상태에도 불구하고 저를 구하기 위해 온 유더를 새삼 다시 본 듯했고, 가케인은 눈치 빠르게도 ‘이곳에 오기 전’이 언제를 말하는지 추측한 듯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유더는 데브란을 피해 가케인에게 몰래 눈짓을 하며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무엇을 추측했든 직접적으로 입에 올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다행히도 가케인은 그 뜻을 곧장 알아들었다. 그 뒤 결정한 것이 바로 지금처럼 일행을 최소한으로 줄이자는 방안이었다.
‘어차피 지금 하르탄엔 제클리스님이 있으니까 가족들이나 다른 이들이 한동안 여기 있어도 걱정할 필요 없어. 하지만 넌… 아니잖아.’
‘그래, 유더. 보고서는 이대로 보낼 테니까 일단 쉬어.’
또다시 미열이 생긴 탓에 혼자 일찍 잠들었던 지미는 예정과 달리 4명만 먼저 수도에 간다고 말했을 때 그리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해가 뜨고 나서도 다들 아무 말 없이 말만 달리는 것은 이상한 모양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 지미.”
가케인이 애써 미소를 지었으나 지미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유더 형 말을 가케인 형이 연결해서 끌고 가는 것도 그렇고, 역시 뭔가 일이 있었던 것 아니에요? 저만 빼고 다들 조용하니까 이상하다구요. 소외된 기분이에요.”
공교롭게도 양팔을 모두 다친 유더는 말고삐를 이전처럼 세게 잡기가 불편해졌다. 유더 본인은 개의치 않았으나 다른 이들이 홀로 말을 타는 것을 반대했기에 이런 상황이 된 것이었다.
‘그래도 같이 타는 것보단 낫지.’
사실 가케인은 고삐를 엮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함께 타는 쪽이 좋겠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도 큰 사내 두 명을 감당하기에 말들은 너무 약했다.
“지미. 그런 것보다는 네 몸을 걱정해. 열은 좀 어때.”
결국 유더도 입을 열었다. 지미의 미열은 자고 일어나서도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 심해진 상태였다. 긴장한 채로 임했던 임무가 이제 끝났다고 여겨서인지, 아니면 다른 요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소년의 뺨과 이마는 지금도 여전히 붉었다.
떠나기 전 소년의 이마를 짚어 본 유더는 아무래도 지미가 조만간 정말로 제2성 발현을 하게 될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