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잡아서 정체를 듣지 못한 건 아쉽지만, 이번만 기회는 아닐 테니까.’
나한. 유더는 그 이름을 입 안에서 되뇌며 놀랍도록 위험한 기운을 풍기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보통 한번 만났을 뿐인 상대를 기억하는 일은 드물지만 아무래도 그 남자는 머릿속에 선명하게 새겨질 듯했다.
‘그건 그렇고… 어깨까지 욱신대는 걸 보니 아무래도 키시아르가 무어라 반응할지 벌써부터 걱정인데.’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멀리서 유더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도 했다. 유더는 전신을 구워버릴 듯 타오르던 불기둥을 서서히 사그라들게 만들었다.
꽤 오랫동안 거대한 불이 타오른 자리치고는 너무나 깨끗한 숲이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를 감싸고 엎드려 있던 키올레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는 아무도 없는 풍경에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어디로 간 거지, 그놈들……?”
주변만 둘러보는 그와 달리 유더는 땅에 남겨진 기묘한 흔적 몇 개를 내려다보았다. 땅을 억지로 파냈다가 안쪽에서 다시 덮은 것 같은 모습을 보니 나한과 소년이 대충 어떤 방법을 써서 빠져나갔을지 알 것 같았다.
‘친구를 만드는 능력을 지닌 아이라더니, 아무래도 그 친구가 인간은 아닌 모양이지.’
대륙에 갑작스레 나타나는 수많은 몬스터 중 어떤 것들은 오랫동안 거의 해를 끼치지 않고 숨어 살아 조금 특이한 토착 짐승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어느 산이든 땅을 깊이 파면 꼭 몇 마리씩 나오는 럼벳이란 몬스터도 그중 하나였다.
거대한 지렁이처럼 생긴 럼벳은 땅속에서만 굴을 파고 살았기에 딱히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 유더는 오랜 몬스터 퇴치 임무 경험을 통해 럼벳의 습성을 몇 가지 알고 있었다.
땅굴을 파고 들어간 뒤 적이 쉽게 쫓아 들어올 수 없도록 안에서 입구를 막고 흙을 굳히는 체액을 뿌리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희미하게 톡 쏘는 냄새를 풍기며 젖어 있는 땅 주변을 보니 역시 방금 전 럼벳이 땅굴을 파고 나왔다가 다시 들어간 것이 확실했다.
땅속 깊은 곳에 숨어 있을 몬스터를 친구처럼 불러내어 다루는 능력이라니, 확실히 나한 같은 이가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구하러 올 만한 능력이었다.
아마 불기둥을 만든 뒤 땅이 한참 흔들렸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으리라.
‘몬스터를 다루는 각성자라… 이전 생에서도 없지는 않았지만, 럼벳 정도의 대형 몬스터는 다루기 아주 힘들다고 들었는데.’
거대한 몬스터를 소리소문 없이 불러내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왜 감옥에 갇혀 있었을 때 바로 도망치지 않았을까. 능력을 사용하는 데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일까?
유더는 말이 없던 소년을 떠올리며 그 소년의 얼굴 또한 나한과 함께 잘 기억해 두기로 마음먹었다.
유더, 유더!……. 그때, 이번에는 착각이 아니라 정말로 유더의 이름을 외치는 다급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가케인과 지미, 그리고 데브란의 목소리였다.
불기둥을 보고 누군가 달려올 것이라 생각하기는 했지만, 설마 그들이 아직 이곳을 떠나지 않은 상태였을 줄은 몰랐기에 유더는 조금 놀랐다.
‘뭔가 다른 상황이 생긴 건가?’
하지만 동료들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그가 제일 먼저 느낀 것은 묘하고도 확연한 안도감이었다.
“유더!”
제일 먼저 모습을 드러낸 가케인의 얼굴이 칼에 베인 왼손에서 피를 흘리며 서 있는 유더를 보고는 단숨에 창백해졌다. 한달음에 달려온 그가 유더의 손을 잡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맙소사, 아까 그 불기둥 네가 만든 게 맞지? 그런데 이건 대체 무슨……. 누가 이런 상처를 입힌 거야?”
“내가.”
“뭐?”
“불도, 상처도 모두 내가 냈다고.”
“유더 형!”
유더의 침착한 답에 가케인이 제 귀를 의심하는 사이, 두 번째로 풀숲 사이에서 얼굴을 내민 지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달려오다가는 뒤쪽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키올레를 보고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어…? 저 사람…… 황궁기사단의 그 기사분 아니에요? 왜 여기에 있는 거예요? 그것도 저런 모습으로…….”
경계심 가득한 소년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린 가케인이 그제야 키올레를 발견했는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으, 흠! 흠!”
서약서 때문에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누구에게도 언급할 수 없는 몸이 된 키올레가 유더를 향해 알아서 설명하라는 듯 눈을 부라리며 헛기침을 했다. 방금까지 겁을 먹고 땅에 납작 엎드려 비명을 지르던 모습은 어느덧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래 봤자 흙투성이로 더러워진 모습에서 전처럼 귀족다운 모습은 조금도 느낄 수 없었지만 유더는 굳이 그런 말은 해 주지 않기로 했다.
“데브란을 잡아갔던 놈들에게서 구해 왔어.”
“네? 그럼 설마… 저 사람을 구하려다 형이 그렇게 다친 거예요?”
“…어쩌다 보니.”
“뭐? 유더. 방금은 스스로 낸 상처라며. 그러면 저 사람을 지키려고 네가 스스로 상처를 냈단 거야? 대체 왜?”
“네? 가케인 형. 그 말은 또 무슨 소리예요?”
“유더가 그렇게 말했어.”
“그러면 설마…….”
유더가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대화를 교환한 가케인과 지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일시에 무시무시한 눈빛이 되어 키올레를 노려보았다. 유더는 키올레가 흠칫 놀라 어깨를 굳히는 것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
“뭐야, 가케인. 지미. 나만 두고 너무 빨리 가지 말라고. 나는 아직 뛰기 힘든 몸이란 말이다.”
다행히 그때 데브란이 나타났기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엄청난 불꽃이 일길래 여기서 무슨 일이 나도 엄청나게 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조용하잖아?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몇 시간 만에 다시 만난 데브란은 상처를 치료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어서인지 이곳을 떠날 때보다 상태가 훨씬 나아 보였다.
“유더. 너와 함께 있던 그 흉터 있던 놈은 어디 가고 또 처음 보는 놈과 함께 있어? 네가 처리하겠다던 동굴 안의 놈들은?”
“말하자면 조금 길어.”
나한을 생각하니 동료들을 만나 조금 풀어졌던 신경이 다시 날카로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유더는 작게 숨을 내쉬며 동굴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야만 했다.
“일이 조금 꼬였거든.”
“…꼬여? 설마…… 그놈들을 놓친 건 아니지?”
아페토 가의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원한을 가진 데브란이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전부 죽었어.”
“죽었다고? 네가 죽인 거야?”
“아니.”
“그러면 누가…….”
누가 죽였느냐고 물으려던 데브란이 순간 멈칫했다. 가케인과 지미 또한 묘한 표정이 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유더의 처음 보는 차가운 눈빛을 보며 이곳에서 사라진 한 남자가 바로 일을 꼬이게 만들었다는 말의 원인일 것임을 짐작했다. 정확히는 몰라도 뭔가 엄청난 일이 있었던 것임에 분명했다.
갑자기 가라앉은 분위기를 느낀 가케인이 웃는 얼굴로 모두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자자, 유더도 찾았으니 일단 내려가서 치료부터 하자고. 자세한 건 가면서 이야기해도 되잖아.”
“그 전에.”
“응?”
손을 들어 말을 가로막은 유더를 향해 가케인이 고개를 돌렸다.
“왜 너희들이 아직 여기 있는 거지? 분명 마을에 돌아가지 말고 그대로 탈출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 그게 말이지. 아까 자카일의 형이 돌아와서 상황이 바뀌었거든. 기억하지? 데브란의 동생과 연인 사이라던 그…….”
“…그 사람이 돌아왔다고?”
“응. 자카일이 제 형이 일찍 돌아오지 못하게 하려고 수를 썼던 것 같은데 오히려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이 더 빨리 돌아오게 되어서… 아무튼 자카일은 잘 가둬 뒀어. 데브란도 그렇고, 부상자들이 있으니 곧바로 마을을 떠나는 것보단 치료하고 조금 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렇게 된 거군. 가케인의 몇 마디 설명으로 금세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지 대충 유추한 유더는 제 생각과 그리 다르지 않은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리고 데브란.”
“엉?”
“아까 탈출하면서 혹시 저쪽에 묶여 있던 두 사람을 봤어?”
유더가 가리켜 보인 곳에 떨어진 재갈과 끈을 발견한 데브란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들? 봤어. 나오다가 보이기에 다같이 본때를 좀 보여주고 내쫓았는데. 그게 왜?”
“아니. 됐어. 살아서 도망친 게 확실하다면 괜찮아.”
이곳에서 아페토 가가 했던 일들을 증언해 줄 이들이 아직 남아 있다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찾아서 붙잡으면 될 테니까.
유더는 욱신대는 팔에서 드디어 힘을 뺐다. 고개를 돌리자 등 뒤에서 쭈뼛대고 있던 키올레가 흠칫 놀라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키올레.”
“뭐, 뭐야. 너, 아까는 경황이 없어 미처 지적하지 못했지만 내 이름을 그렇게 자꾸 함부로 부르면…….”
겁을 먹은 것을 숨기지 못하는 주제에 다른 사람들 앞이라고 다시 권위를 세우려 노력하는 것이 약간 안쓰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유더는 그의 말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너도 반말하니까 상관없잖아.”
“나는 상관있어! 신분부터 다르고 나이도 내가 더 많은데 어디서 감……!”
그 순간 유더의 손목 안쪽에 찍힌 계약의 인에서 찌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키올레 또한 같은 것을 느꼈는지 얼어붙은 듯 입을 멈추고 이를 악물었다.
“…마음대로 해!”
결국 그는 굴욕에 찬 얼굴로 그렇게 내뱉은 뒤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물론 유더가 알 바는 아니었다.
“그럴 셈이야. 어쨌든 이제 널 죽이려던 놈들은 사라졌고, 너도 우리의 약속을 잊진 않을 것 같으니 지금은 이대로 돌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