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97화 (97/805)

97화

“윽… 뭐, 뭐야…….”

나한의 몸이 벽에 큰 소리를 내며 처박히는 것과 동시에 환상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정신이 돌아왔는지, 키올레가 낮게 신음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팔이 왜 이리 아픈… 아니, 내, 내 몸이 왜 이렇게 흙투성이가…? 뭐야 이게!”

“그게 문제가 아니야. 정신을 차렸으면 빨리 뛰어!”

나한의 동료인 작은 소년이 그를 향해 뛰어가는 것을 보면서 유더는 키올레를 붙잡고 달렸다. 정신이 든 키올레는 다행히 제대로 속도를 냈다.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동굴을 빠져나왔다. 동굴 밖에서는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산 너머로 넘어가려 하고 있는 중이었다.

“드, 드디어 나왔다……. 그런데 방금 그건 대체 뭐야? 무슨 일이…….”

“조용히 해.”

유더는 어질어질한 현기증을 참아내며 발걸음을 옮겼다. 동굴로 들어가기 전 나한과 함께 묶어서 숨겨 두었던 각성자 용병 2명이 있던 곳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이 있던 곳에는 풀린 재갈과 끈만 떨어져 있었을 뿐,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데브란 일행에게 발견되어 조금 두들겨 맞고 도망친 거라면 다행이지만…….’

“저, 저 끈은 또 뭐야.”

재갈과 끈 조각을 보며 키올레가 기겁을 했다. 유더는 그에게 대답하지 않고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팔이 계속해서 욱신거렸다. 칼로 벤 상처보다 반점에서 올라오는 욱신거림이 더 아픈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런 고통쯤은 괜찮았다. 현재 유더의 머릿속에 가득 찬 것은 예상보다 강력했던 나한의 능력과 그의 정체에 대한 의문이었다.

‘아페토 가에 대한 것보다도 어쩌면 그 녀석 쪽이 더 중요할지도 몰라. 그렇게 눈에 띄는 자가 왜 이전 생에서는 보이지 않았을까. 환상능력으로 몸을 계속 숨겼기 때문인가? 아니면…….’

“이번에는 좀 아팠어.”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목소리가 앞쪽에서 들려왔다. 유더는 제 옆에서 숨 막히는 소리를 내며 놀라는 키올레를 바라보다,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놀랍게도 분명 방금 등 뒤의 동굴 안에 처박아두고 온 나한과 작은 소년, 그리고 여전히 멍한 얼굴을 한 각성자 용병들이 모두 그곳에 서 있었다.

‘설마 내가 처박았다고 생각했던 것조차 환상이었나?’

순간 그런 의심이 머릿속에서 치솟았으나 유더는 이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한의 이마 한쪽이 찢어져 피가 비치고 있으니 처박은 것까지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유더와 키올레보다 그들이 더 빨리 이곳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대단한 형제도 이 능력은 꽤 놀랍나 보군.”

나한이 유더의 표정을 보며 피식 웃었다.

“간단해. 나는 내가 원하는 몇몇 대상을 상대로 일정 시간 동안 평소보다 더 깊게 능력을 발휘할 수 있어. 지속시간은 짧지만, 위력은 확실하지.”

“…….”

“나를 의심하고 혼란스러워할수록 더욱 깊은 환상에 빠져들게 돼. 현실에서 인지하는 감각조차 뛰어넘는 멋진 환상이지. 우리가 형제의 옆을 지나쳐가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여기고 있는 지금처럼.”

나한의 얼굴 위로 차가운 미소가 스쳤다. 유더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물었다.

“그걸 굳이 주절대는 이유는?”

“이렇게 말하면 의심을 증폭시키는 데 더 도움이 되거든. 웬만한 사람은 버티지 못했을 환상조차 스스로 깨버린 상대이니 어쩔 수 없지. 무력화시키려면 나도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그 말이 사실이라면, 시간과 공간 감각마저 농락당한 유더는 이미 그 깊은 환상이라는 능력에 상당히 침식된 것이 분명했다.

그 능력에 완전히 잡아먹히고 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방금 전 환상 속에서 보았던 키시아르의 얼굴이 갑자기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

유더는 순간 칼에 찢기고 반점이 번진 양손이 동시에 욱신대는 것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깊이 생각하지 말자. 이런 반응조차 노리고 던진 말일 테니까.’

동요한 티를 내는 것은 정신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각성자를 상대로는 가장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유더는 깊이 숨을 내쉬며 제복 소매 안쪽을 살짝 들추었다. 아직까지 피를 흘리고 있는 왼쪽 손목 안쪽에 아주 작은 붉은색 점이 보였다. 아까 키올레와 계약할 때 찍힌 인장이었다. 그것을 확인하고 나자 마음이 도로 침착해졌다.

‘이게 남아 있단 건 키올레가 죽지 않았단 뜻이니 일단 내 옆에 있는 놈은 환상이 아니란 뜻이지.’

애초에 이미 죽였다면 유더에게 환상 능력을 더욱 써 가며 여기까지 쫓아올 리가 없다. 유더는 얼어붙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키올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 멍청한 표정이야말로 그가 환상이 아니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처럼 느껴져 어쩐지 마음이 조금 더 편해졌다.

‘저 녀석 얼굴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이야.’

“키올레 다 디아카.”

“…왜.”

키올레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너더러 저 녀석 상대하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내 뒤에 바짝 붙어 있어. 떨어지는 순간 저놈들이 널 죽일 거야.”

“왜 날 죽이려는 건데. 디아카 가에 원한을 가진 놈들인가?”

“아니. 그냥 네가 너무 쓰레기 같은 놈이라서 죽이고 싶어 하는 중이야.”

“뭐……?”

입을 딱 벌린 키올레가 온갖 기막힌 울분이 스쳐 지나가는 표정으로 유더와 나한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래도 너, 넌 날 지켜주려는 거지? 그러면 날…….”

“물론 나도 네가 쓰레기라고 생각해. 좋아서 지켜주려는 건 아니니까 그냥 입 다물고 얌전히 있어.”

혹시나 오해할까 싶어 분명히 말해 주자 키올레는 약간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과연 서약서를 쓰고 나니 말을 들어먹는 속도가 조금 빨라져 다행이었다.

‘나한이 정말 깊은 환상인지 뭔지 하는 능력을 썼든, 아니든 여기서 더 시간을 끌 수는 없어.’

오른손의 반점이 번지지만 않았다면 나한의 그 ‘제한 시간’이 끝날 때까지 버티며 기다린 뒤 여기서 충분히 놈들을 모두 때려잡아 사로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반점이 점점 팔 위로 올라가는지 통증이 번지는 범위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이대로 가다가 혹 능력 사용에 지장이라도 받게 된다면, 그 사실을 눈치 빠르게 알아차린 나한이 무슨 짓을 할지 뻔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셈인가, 형제? 내 능력에서 어떻게 벗어나려고? 도와주러 올 사람들도 없을 텐데 말이야.”

나한이 다 잡은 사냥감의 반항을 보듯 느릿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강한 능력을 지녔다 한들, 현실을 느끼는 감각이 망가져가고 있는 이상 나를 맞추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 거야. 맞추지 못하는 공격은 쓸모없는 힘의 낭비일 뿐이지.”

그가 곁에 선 소년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그만 인정해. 점점 더 어지러워지고 몸이 무거워질 텐데, 버티는 것만으로도 힘들지 않나? 아까부터 상당히 힘겨워 보이던데.”

그의 말을 듣자마자 마치 마법의 주문이라도 발한 것처럼 손발이 무거워지고 또다시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나한이 혹시 제 팔의 이상 상태를 알아차린 것인가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아닌 듯했다. 그래도 상태가 점차 정상이 아니게 변해가는 중임은 확연했다.

유더는 오른쪽 팔꿈치를 넘어 거의 어깨 전체가 저미는 것처럼 강해진 통증을 느끼며 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글쎄… 굳이 맞춰야 할 필요는, 없지.”

“무슨 소리지, 그건?”

“이런 뜻.”

무언가를 감지한 듯 나한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 순간 유더는 대답 대신 주먹을 꽉 쥐며 모든 힘을 끌어모았다.

일순 엄청난 크기의 불기둥이 유더의 앞에서 피어올랐다.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등 뒤의 키올레가 비명을 지르는 것이 느껴졌다.

“으아악!”

동시에 유더의 오른팔도 지금까지 중 가장 강력한 통증으로 인해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눈앞이 짧게나마 희게 변하는 착각이 들었을 만큼 강렬한 고통이었다.

키올레가 엎드려 소리를 지르거나 말거나 유더가 불러낸 불길은 확실하게 주변을 초토화시키며 높이, 더 높이 퍼져나갔다. 너머에 있을 나한과 다른 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만큼 거대하고 압도적인 불은 마치 유더를 보호하는 벽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불이 마침내 구름마저 뚫고 하늘 높이 이어졌을 때, 유더는 마침내 저를 가리고 있던 불투명한 벽이 깨져나가는 듯한 기분과 함께 어지러웠던 의식이 맑아지고 주변의 공기가 선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한을 처음 만나 그가 넓은 영역에 쳐 두었던 환상을 해제했을 때 보이던 것과 비슷한 광경이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나 보군.’

나한은 계속해서 교묘히 유더 하나에게만 깊은 능력을 썼다는 듯 말했지만 그러면 키올레까지 계속 같은 영향을 받은 것을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유더는 나한의 능력이 본래는 일정 범위를 지정하여 미치는 능력이라 말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제한된 조건 하에 본래 능력보다 더 심화된 능력을 쓸 수 있는 각성자들은 이전에도 많았어. 하지만 그 조건이 꼭 나한 본인이 말한 대로라고 생각하긴 어렵지.’

나한의 심화된 능력이 그가 말한 대로 일정 대상에게 미치는 것이 아니라, 범위를 평소보다 더욱 자유자재로 조정하는 것이었다면 모든 것이 설명된다.

그리고 어느 범위를 지정하여 영향을 미치는 능력의 경우, 그것을 깨트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안에서 그보다 더 압도적인 힘으로 모든 것을 깨부수는 것이었다.

그것은 유더가 가장 잘하는 일이기도 했다.

‘우릴 씌우고 있던 환상 능력의 영역이 깨진 것도 느꼈을 테고, 저 정도면 다른 사람들이 있을 곳에서도 충분히 보일 것임을 알 테니 승산이 없다는 건 충분히 깨달았겠지….’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도망치는 것이다. 유더는 설마 이런 상황에서마저 그가 키올레를 죽이겠다며 고집을 부리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순간, 땅이 거세게 흔들리며 키올레가 더욱 시끄럽게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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