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96화 (96/805)

96화

“이 녀석까지 굳이 죽일 이유는 없잖아. 그런데 왜?”

“형제야말로 왜 그 녀석을 감싸려 하지? 살아 있을 가치가 없는 인간인데.”

나한의 차가운 회색 눈동자 속에 잔혹한 살기가 떠올랐다.

“우리가 그 멍청한 인간을 놓고 싸울 가치는 전혀 없어. 여태까지 난 꽤 괜찮은 조력자 아니었나? 나를 믿어. 그 손을 놓고, 이쪽으로 와.”

“…….”

유더는 키올레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거참. 부정하기 힘들 만큼 맞는 말이긴 한데.’

키올레 다 디아카는 분명 여기서 살릴 가치가 없는 인간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유더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손에 쥔 키올레의 팔을 더욱 꽉 잡았다.

“싫어.”

어두운 동굴 속에 울려 퍼진 답을 들은 나한의 얼굴에서 순간 미소가 약간 사라졌다.

“세상 어느 조력자가 증인이 될 놈들을 제 마음대로 이유도 없이 모두 죽여 버리지? 머리가 빈 귀족 도련님보다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이는 네놈 쪽이 나는 더 마음에 안 들어.”

그래. 처음부터 나한은 수상하기 그지없는 사내였다. 출신도, 성격도 모두 투명하기 그지없는 키올레보다 그처럼 등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가 유더는 더 꺼려졌다. 그가 아무리 사람 좋은 척 곁에 붙어 있었어도 마찬가지였다.

단 하나라도 명확히 알 수 없는 것은 믿지 마라. 이전 생에서 키시아르가 단장 자리를 물려주기 직전 남긴 조언 중 하나였다.

유더는 임무를 수행할 때 언제나 그 말을 떠올렸다. 그 어떤 조언보다도 가장 실질적으로 많은 도움이 된 말이었다.

“가치 없는 대상을 향한 고집은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 뿐이야.”

“그걸 왜 네가 판단하지? 무슨 기준으로?”

유더의 질문에 나한은 잠시 말이 없었다. 붉은 흉터로 얼룩진 왼쪽 얼굴의 동공이 텅 빈 눈동자가 어디인지 모를 허공을 응시했다. 무언가 떠올리고 있는 듯 생각에 잠겼던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준은 간단해. 힘의 유무.”

힘의 유무? 유더는 심상치 않은 단어를 입 안에서 되뇌며 기억하기 위해 노력했다.

“같은 힘과 의지를 지닌 형제자매들의 어려움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한다. 우리를 모욕하고 짓밟은 이들에게는 대가로 목숨을 받아낸다. 협상은 없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뒤, 나한의 시선이 유더를 향해 되돌아왔다.

“똑똑한 형제이니 내가 하고자 하는 말뜻은 충분히 알아들었겠지. 그러니 이제 그 손을 놓고…….”

“…너, 단순한 산적 대장 따위가 아니구나.”

갑작스레 튀어나온 유더의 말에 나한이 움직이던 입을 멈추었다.

“어디서 왔지? 목적은 뭐야.”

나한은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산적들과 함께 제국을 떠날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 산적들도 결국 모두 본디 살던 곳을 떠난 각성자들이고, 지금 그의 뒤에 서 있는 멍한 얼굴의 용병들도 각성자였다.

그가 굳이 이곳까지 구하러 온 소년 또한 각성자임을 생각하면 나한이 각성자들을 끌어모으려 하는 목적이 그리 개인적이고 순수한 이유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 곳을 잃은 각성자들을 끌어모으려 한 인물이나 단체… 그런 곳이 이 시기에 있었나? 이전 생에서는 없었는데.’

“마병단을 노린 건가? 아니면 반란이 목적인가?”

“어느 쪽도 아니야.”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며 입을 여는 유더에게 나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짤막하게 대꾸했다.

“정말 경계심 강한 형제군. 내가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든, 아니든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지? 내가 바라는 건 그 쓰레기를 치우고 떠나는 것뿐이라고.”

그가 손가락을 살짝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멍한 얼굴을 한 키올레가 유더의 손을 뿌리치려 팔을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놓칠 뻔했을 만큼 강한 힘이었다.

“놔.”

“싫다고 했잖, 아.”

대답하려는 순간 키올레가 몸부림을 치다 말고 정강이를 차려 했다. 유더는 그것을 피한 뒤 혀를 차며 키올레의 뒷목을 세게 내리쳤다.

보통 사람은 물론이고 단련한 기사라도 단숨에 기절할 만한 힘을 실었지만 키올레는 놀랍게도 쓰러지지 않았다. 그는 입을 멍하니 벌린 채 유더를 벗어나려 할 뿐이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지.”

“말했잖아. 네 쪽이, 이 녀석보다 더 마음에 안 든다고. 그, 리고.”

유더는 갈수록 격렬하게 반항하는 키올레를 제압하려 노력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기분 나쁘니까 내게 명령하지 마. 내게 명령할 수 있는 건 한 명뿐이니까!”

말이 끝남과 동시에 유더는 키올레의 정수리를 붙들어 머리만 남기고 땅에 파묻어 버렸다. 순식간에 푹 꺼진 땅 아래로 떨어져 파묻힌 키올레가 낮은 신음을 흘리며 꿈틀댔지만 단단하게 굳은 땅을 빠져나올 수는 없었다.

그와 동시에 유더의 팔도 크게 욱신 쑤셨다.

‘능력을 쓰지 않으려 했는데… 어쩔 수가 없군.’

유더는 결국 제 능력을 쓰도록 만든 원흉인 나한을 노려보며 허리에서 검을 뽑았다. 검신 위를 나선형으로 기어 올라온 불꽃이 활활 타기 시작하자 나한이 미간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다.

“공격할 셈인가?”

“네가 먼저 시작했어.”

나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웃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묘한 표정이었다.

“뭐, 좋아. 그렇다면 나도 최선을 다해 저 쓰레기를 없애고 가도록 노력해야겠군.”

본래 형제자매에게 능력을 쓰는 건 엄격히 제한되어 있지만, 너 정도 실력자라면 어쩔 수 없지.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한의 얼굴이 점점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자마자 머리와 몸이 급속도로 무거워졌다. 유더는 본능적으로 그가 제게 환상 능력을 쓰려 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나를 무력화시키고 그 사이에 목적을 달성하려고……!’

유더는 재빨리 땅에 파묻힌 키올레를 보호하려 능력을 썼다. 그러나 그 순간, 휙 하는 짧은 바람 소리와 함께 갑자기 눈앞의 풍경이 뒤바뀌었다.

‘유드레인.’

아주 이상한 감각이었다. 유더는 분명 동굴 안에서 무릎을 꿇은 채 키올레를 붙잡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으나, 동시에 저를 향해 말을 거는 아름다운 금빛 머리칼의 사내를 보았다. 흰 제복 차림의 키시아르 라 오르였다.

어느 쪽이 환상인가 하면 당연히 키시아르 쪽이다. 그는 지금 여기에 나타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유더가 아닌 유드레인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이제는 불릴 일이 없을 그 이름을.

냉철한 이성은 당연한 판단을 내렸으나, 그것을 알면서도 유더는 순간적으로 멈칫 몸을 굳혔다.

‘이따위 술수를.’

‘유드레인.’

키시아르가 다시 한 번 유더를 불렀다. 황홀하도록 매혹적인 낮은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무시해야 한다. 저 붉은 눈동자를 피해 고개를 돌려야 한다. 어떻게든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뭔가에 붙잡힌 것처럼 손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괜찮은 경험이었나? 내 심장에 칼을 꽂았던 건.’

키시아르가 가슴 부근에 올리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가 끼고 있던 검은 장갑 사이로 피가 끊임없이 울컥대며 흘러나오는 뻥 뚫린 구멍이 보였다. 그 상처의 정체를 유더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제가 꿰뚫은 상처였다.

어느새 유더는 제가 숨을 격렬하게 몰아쉬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건 전부 환상이야.’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 왜 저 키시아르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을까.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뛰는 것이 손끝을 통해 고스란히 느껴졌다.

키올레를 붙잡은 손에서 힘이 천천히 빠져나갔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환상 뒤쪽에서 회색 눈동자를 빛내며 저를 내려다보는 나한을 보았다.

그는 유더의 일그러져 가는 표정을 지켜보며 가만히 미소 짓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일그러진 머릿속에서 겨우 약간의 판단이 들었다.

‘아마도 이건, 대상자의 공포를 자극해 정신을 빼놓는 환상이겠지. 저 녀석은, 키시아르를 몰라. 그러니까 이건 순전히… 내 기억 속에서 뽑아낸 요소란 건데…….’

‘유드레인.’

겨우 이어지던 생각이 키시아르의 부름에 순식간에 또 박살났다. 키시아르의 환상이 다가와 유더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유더는 당장이라도 키올레를 붙잡은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나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에 휩싸였다.

‘대답해.’

실체 없는 피투성이 손이 다가와 뺨을 감쌌다. 환상임에도 진저리가 날 만큼 선명한 감각이 느껴졌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제 뺨을 적시고 흐르는 감각에 이를 악물었다.

‘대답해 유드레인.’

반사적으로 대답할 뻔했다. 하지만 대답하면 안 된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저 말에 대답하면, 그러면, 이 머리와 어깨를 짓누르는 강렬한 압력에 굴하게 되는 것이라고.

‘정신계. 정신계 능력에서, 벗어나려면. 일반적으로 통하는 방법은.’

점점 멍해져 가는 이성을 붙잡고 필사적으로 기억을 떠올렸다. 이 정도로 강렬한 환상 능력은 처음이었지만, 정신계 능력자라면 만날 만큼 만나 보았다. 보통 정신을 공격하려 하는 이런 능력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시전자를, 공격하거나, 아니면.’

헐떡이는 호흡 소리가 귓가를 북처럼 두드려 댔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붉은 눈을 노려보며 한 손에 쥐고 있던 검을 높이 들었다. 뒤이어 피와 살을 지닌 무언가가 무자비하게 썰려 나가는 작은 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

잠시 후 유더는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스스로 힘껏 벤 왼손 팔뚝에서 상당한 고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정신은 맑아졌고, 키시아르도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대신 또렷해진 시야에 들어온 것은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키올레를 향해 피 묻은 단검을 휘두르고 있던 나한의 모습이었다.

‘이 자식이.’

유더는 곧바로 제 검을 휘둘러 나한을 막았다. 쩡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두 개의 검이 거세게 부딪쳤다. 유더는 나한의 검을 쳐내는 것과 동시에 바람을 이용해 그를 동굴 벽으로 가차 없이 날려 보내고 키올레를 땅에서 도로 뽑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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