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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95화 (95/805)

95화

나한은 곧바로 유더의 요구에 따라 다음 사람을 깨웠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같은 질문에 전혀 답을 하지 못했다.

유더가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은 본가에서 어떤 특정 조건을 지닌 각성자를 잡아들였을 때 평소보다 더 많은 포상을 주었다는 사실과, 그들이 본가와 주고받은 얼마 안 되는 서신이 보관된 상자뿐이었다.

“어떤 각성자를 잡았을 때 본가에서 상을 주었다고? 다시 한 번 말해 봐.”

유더는 마지막으로 깨웠던 이에게 다시 한 번 같은 질문을 던졌다. 나한이 보여 준 환상을 보고 미쳐 버린 남자가 입을 헤 벌리고 웃으며 대답했다.

“알파인지, 오메가인지, 그거. 히히, 히히힛. 그중에서도 발정 난 상태인 놈들을 넘겼을 때 제일……. 그래서 일부러 발정이 날 때까지 내버려 뒀다가 보내라고, 관리관이 그랬어요. 히히힛. 끄흐흐흑.”

제정신이 아닌 듯 횡설수설 내뱉는 말이었으나, 그 답으로 알 수 있는 정보는 명확했다.

아페토 가에 머물며 연구를 하고 있다는 사제들은 제2성을 각성한 각성자들을 원한 것이다.

‘아이. 그리고 제2성…….’

어쩐지 별로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유더는 미친 듯 웃다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남자의 멱살을 잡아 끌어올렸다.

“이봐. 여기에 남는 서약서들도 있겠지? 어디 있는지 찾아내.”

남는 서약서 뭉치를 찾아낸 뒤 유더는 그것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이놈들이 허튼짓 하지 않도록 보고 있어.”

“감옥에 있을 그놈에게 가려고?”

나한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서약서만 쓰게 하면 되니까.”

“별로 좋은 생각 같지는 않아, 서약서도 절대적이지는 않으니까. 그자는 언제고 오늘의 자비를 원수로 갚게 될 텐데. 그냥 죽이는 쪽이 편하지 않을까.”

“네가 알 바는 아니지.”

유더의 말에 나한은 낮게 웃었다. 여전히 차갑고 잔혹한 기색을 다 지우지 못한 미소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래.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유더가 몸을 돌리자 나한의 낮은 목소리가 등 뒤를 붙잡듯 울려 퍼졌다.

“형제로서 해 준 충고였을 뿐이야.”

* * *

“응, 으으읍, 우우웁!”

다시 나타난 유더의 얼굴에 튄 피를 본 키올레는 사색이 되어 발버둥을 쳤다. 그 피가 제 것이 아니라 관리관이 죽으면서 뿜은 피라는 것을 설명하기도 귀찮았기에 유더는 손에 들고 온 서약서를 그의 눈앞에 들이댔다.

“조용히 하고 여기에 손가락이나 찍어.”

“으……?”

키올레가 몸부림을 멈추고 서약서를 보았다. 거기에는 유더가 오는 동안 가느다란 불꽃으로 적어 둔 몇 개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하나. 키올레 다 디아카는 오늘 일어난 사건에 대해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 된다.

둘. 키올레 다 디아카는 유더 아일을 비롯한 모든 타인에게 앞으로 일방적인 명령 및 결투 신청, 모욕적인 언행을 가할 수 없다.

셋. 키올레 다 디아카는 앞으로 스스로 가능한 능력 범위 내에서 유더 아일을 돕는다.

이 모든 사항을 두 사람 모두에게 계약의 인으로 남긴다.

키올레 다 디아카가 상기의 사항을 어길 시 계약의 인이 신호를 주어 알리게 될 것이며, 계약을 어긴 즉시 영원한 잠에 빠질 것이다.]

“이… 이게 뭐야.”

유더가 밧줄과 재갈을 풀어주자마자 키올레가 소리를 질렀다.

“영원한 잠이라니. 무슨 표현이 이래? 죽이겠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서명할 마음이 없으면 지금 당장…….”

“젠장! 하면 되잖아!”

키올레가 밧줄 자국이 난 손을 들어 눈을 질끈 감고 손가락을 찍었다. 그 순간 계약서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연기가 순식간에 두 사람의 손목 안쪽으로 스며들어 가 흔적을 남겼다.

“참고로 여기서 나가서 날 죽이려 해도 소용없어. 세 번째 사항 때문에 네가 간접적으로 날 죽이려 해도 계약 위반이 될 테니까.”

“…….”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는지, 키올레의 눈동자가 조금 떨렸다.

“그러면 네놈이 그냥 사고로 죽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건데?”

“내가 너와 상관없는 연유로 죽게 된다면 계약서는 효력을 잃어. 손목에 남은 계약의 인도 사라질 거고.”

“나한테는 영향이 없는 거겠지?”

“그래. 그러니까 이제 그만 일어나. 설마 누군가 부축해 주어야만 일어날 수 있다고 떼를 쓰는 건 아니겠지.”

그 말에 키올레가 이를 갈며 겨우 땅을 짚고 일어나 섰다.

“이제 어디로 가려는 거냐. 내 검은 봤어? 네놈 일행은 어디에 두고 온 거야? 설마 아페토 가의 개들을 모두 죽인 건가? 아니면…….”

대체 저 시끄러운 놈을 누가 황궁기사단 상급기사라 믿겠는가. 앞서 나가던 유더가 무어라 한마디 하기 위해 고개를 돌린 순간, 갑자기 싸늘한 감각이 등골을 훑고 지나갔다.

반사적으로 검을 잡으며 몸을 돌린 유더는 나한과 그의 등 뒤에 선 소년, 그리고 몽롱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각성자 용병들을 보고 멈칫했다.

“아. 벌써 끝낸 건가? 빠르군.”

“내가 지키고 있으라고 했던 놈들은?”

“그게 말이지. 잠깐 불운한 사고가 있었거든.”

나한이 유더처럼 피가 튄 얼굴로 조용히 웃었다.

“잠깐 조용히 있게 하려고 했을 뿐인데, 그게 싫었는지 그만 놈들이 죽어버렸지 뭐야.”

“뭐?”

“정말 미안하게 됐어.”

너무나 침착한 얼굴로 대답하는 나한의 눈빛에서 정말로 ‘불운한 사고’를 일으킨 사람다운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유더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온 나한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자. 그래도 이건 가져왔으니 받아.”

그것은 아페토 가의 관리관이 본가와 연락을 주고받았던 서신이 담긴 상자였다. 유더는 숨이 막힐 듯한 긴장 속에서 천천히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 순간 나한과 시선이 마주친 키올레가 맹수 앞에 선 초식동물처럼 몸을 굳혔다.

“이제 감옥에 갇힌 형제들도 도로 풀어주자.”

매끄러운 태도로 감옥 쪽을 향해 다가간 나한이 유더가 가두어 두었던 각성자 용병 셋을 도로 데리고 나왔다. 그가 무슨 능력을 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모두 몽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데다 무척 얌전했다.

‘도저히 이성이 있는 상태로는 보이지 않는군. 저런 능력도 쓸 수 있다면 이전에는 어째서…….’

나한은 왜 지금에서야 기다렸다는 듯 나서서 행동하고 있는 것일까. 불운한 사고로 죽었다는 아페토 가의 사람들은 정말 사고로 죽은 것뿐일까?

‘당연히 아니겠지.’

유더의 경계심이 방금 전보다 한층 더 강해졌다. 그 눈빛을 느낀 듯 고개를 돌린 나한이 빙긋 웃었다.

한쪽에는 끔찍한 흉터가, 다른 한쪽은 조각처럼 수려한 얼굴로 지은 기묘한 미소를 마주한 키올레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려던 걸음을 흠칫 멈추었다. 그 모습이 우습다는 듯 고개를 돌린 나한이 유더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안 나가나?”

“먼저 가.”

이런 상황에서 등을 보여 좋을 것이 없었다. 유더의 말에 나한이 어깨를 한번 으쓱하며 몸을 돌렸다.

“형제가 바라는 대로.”

나가는 길은 더없이 조용했다. 데브란과 탈출한 각성자들이 중간에 만난 이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갑자기 튀어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는 키올레마저도 겁에 질렸는지 조용히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으므로 서로를 반쯤 가린 어둠 사이로 들리는 것이라고는 동굴 바닥을 밟는 여러 개의 규칙적인 발소리뿐이었다.

‘……발소리.’

유더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옆을 보았다. 키올레의 화려한 고급 부츠가 곁을 흔들흔들 스쳐 지나갔다.

벽에 박힌 마정석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그의 얼굴이 잠시 눈에 들어온 순간, 유더는 그대로 키올레의 팔을 잡고 앞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

‘젠장. 역시.’

유더가 갑자기 팔을 잡아채 달렸음에도 키올레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의 표정은 감옥에서 나와 나한의 뒤에 서 있던 각성자 용병들처럼 그저 멍할 뿐이었다. 나한의 환상 능력에 잡아먹힌 상태가 된 것임에 틀림없었다.

‘이 녀석이 겁을 좀 먹었다고 입을 다물 성격이 아니었는데.’

언제부터였을까. 아까 감옥 앞에서 마주쳐 키올레가 뒤로 물러나려 했던 때부터인가? 열심히 기억을 돌이키며 뛰고 있던 유더는 잠시 후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어딜 가나 싶어 깜짝 놀랐잖아, 형제.”

분명 뒤로 돌아 한참을 뛰었는데, 어느새 그들의 앞에는 도로 멍한 얼굴을 한 각성자 용병들과 작은 소년, 그리고 나한이 서 있었다. 나한이 유더를 보며 침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경계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다 끝난 상황에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너라면 이 상황에서 경계하지 않겠어?”

유더는 싸늘하게 반문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페토 가의 인간들은 전부 죽였나? 그 다음은 누굴 죽일 셈이지? 넌 대체 누구야.”

“내가 누구인지는 이미 알고 있잖아.”

“이제 와서는 그것도 별로 믿음이 안 가는데.”

가던 길도 갑자기 뒤틀어 버릴 수 있는 환상능력자를 상대로 무엇을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과연 유더가 본 나한의 모습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짜였을까.

그는 정말로 떠돌이 각성자들을 모아 대장 노릇을 하고 있을 뿐인 조금 영악한 산적 대장일 뿐일까? 유더의 눈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의심을 읽은 듯 나한이 피식 웃었다.

“의심이 참 많군.”

뭐, 그런 점도 나쁘지 않지만. 하고 중얼거린 뒤 나한은 유더가 붙잡은 키올레의 팔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형제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없어. 그냥 그 손을 놔. 그러면 돼.”

‘…목표는 키올레였나.’

유더는 대답 대신 키올레의 팔을 더욱 꽉 잡았다.

“키올레 다 디아카.”

“…….”

속삭여 부른 이름에도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인형처럼 멍한 표정을 지은 키올레는 유더가 흔드는 대로 힘없이 흔들거렸다.

“키올레!”

뺨을 큰 소리가 나게 때려도 마찬가지였다. 유더는 도움이 되지 않는 키올레의 무능함에 한숨을 내쉬며 나한을 돌아보았다.

“설마 네가 안 풀어주면 평생 이 상태인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내 능력이 그런 만능은 아니야.”

하지만 조건을 알려 줄 생각은 없다고 나한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평소 같았다면 그대로 능력을 써서 눈앞에서 나한을 치워 버리려 했겠지만, 지금은 욱신욱신 쑤시는 손이 신경 쓰여 곧바로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유더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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