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94화 (94/805)

94화

유더는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진짜로 죽는 쪽이 낫다고 생각했다면 절대 그들처럼 말하지는 않는다. 잡히자마자 죽음을 각오할 만큼 위험한 임무를 하는 이들은 대개 몸속에 독약을 품고 다니거나, 혹은 잡히면 곧바로 폭발해 죽게 되는 서약서를 썼다.

‘독약을 품은 것도 아니고, 서약서를 쓴 것도 아닌 놈들이 말은 참 잘해.’

유더는 그런 이들을 다루는 방법을 나름대로 잘 알았다. 스스로 죽을 용기도 없는 놈들에게는 그저 상상력을 자극할 만한 겁을 주는 것이 최고였다.

아무 말 없이 다가가 검을 뽑으려 한 순간, 여태 유더가 하는 일을 보고만 있던 나한이 어깨를 붙잡았다.

“잠깐. 이 일은 나에게 맡겨 주지 않겠어?”

“내가 뭘 할 줄 알고?”

“고분고분한 상태로 만들어 두려는 거잖아. 그런 거라면 내 전문이야. 게다가 나도 나름대로 저들에게 갚아 줄 빚이 있으니까.”

나한의 시선이 그의 등 뒤에 숨어 가만히 묶인 이들을 보고 있던 소년에게로 향했다가는 다시 돌아왔다. 유더는 일부러 상상이라는 말에 힘을 살짝 준 것을 들으며 그의 능력이 무엇이었는지 새삼 떠올렸다.

‘환상 능력을 심문에 사용한다고?’

갑자기 흥미가 솟았다. 유더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좋아.”

“장담하는데 내가 더 빠를 거야.”

나한이 유더 대신 앞으로 나서자 관리관이 그의 흉터로 얼룩진 얼굴을 보며 공포와 혐오에 찬 표정을 지었다.

“넌… 또 뭐야.”

“조력자이자 형제의 복수자지.”

“형제? 저 벙어리 꼬마를 말하는 거냐?”

관리관의 눈이 나한의 뒤에 숨어 있던 소년 쪽을 향해 바쁘게 돌아갔다.

‘벙어리?’

여태 한마디도 하지 않기에 겁이 많은 편 같다 생각하기는 했지만, 설마 정말로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였나. 유더가 고개를 돌리자 소년이 움찔 움츠러들어 시선을 피했다.

‘음. 겁먹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유더가 소년에게 무어라 말을 건네려던 순간, 갑자기 뒤에서 뭔가 깨달은 듯 잔뜩 흥분에 찬 관리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렇군. 이제 알겠어. 네놈들, 옥에 갇혀 있던 놈들을 빼내러 온 거구나! 그래. 요즘 그런 미친놈들이 있다는 말을 내가…… 흐억!”

그러나 그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갑자기 숨 막히는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쓰러졌다. 마치 무언가에게 얻어맞기라도 한 듯한 모습에 함께 묶여 있던 이들의 표정도 동시에 이상해졌다.

“관리관님…?”

“자, 잠깐. 잠깐! 오지 마! 뭐야, 뭐냐고! 안돼! 으아악, 악!”

관리관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이리저리 돌아보며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고 몸을 꿈틀거렸다. 옆에서 누가 말을 걸어도 듣지도, 보이지도 않는 것 같았다.

‘뭐지. 아무것도 없는데.’

유더는 허공을 바라보며 극도의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는 그를 살피다 나한을 향해 눈을 옮겼다. 그는 관리관을 벌레처럼 내려다보며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의 손끝에서 작게 일렁이는 기운을 보니 역시 그가 능력을 사용한 모양이었다.

비명은 한참 동안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관리관의 얼굴에서 점차 인간다운 감정이 사라져 갔다.

그는 마침내 제대로 된 애원과 신음조차 내뱉지 못한 채 바닥에 실금하고 말았다. 지린내를 풍기며 묶인 손발을 벌벌 떨어대면서 허공을 향해 무어라 중얼거리는 모습이 마치 미친 사람 같았다.

“제발, 제발, 제발 그만. 그만. 내가, 잘못했. 흐으으, 허어억. 으으아아아.”

스스로 기괴하게 비트는 팔다리와 일그러지는 얼굴을 지켜보며 곁에 있던 이들도 극도의 공포심에 사로잡혔다. 붙잡힌 상태로도 제법 의연하게 유더와 나한을 노려보던 이들이 이제는 시선조차 마주하지 못하고 숨을 헐떡거렸다.

가장 강력한 공포는 실제로 겪는 것보다, 오히려 그것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다음이 제 차례가 될 것이라 상상할 때 오고는 한다. 유더가 보기에 나한은 그것을 아주 잘 알고 휘두르는 중이었다.

‘이전에 뭘 하고 살았는지 진짜 궁금해지는 건 아무래도 저쪽인 것 같은데.’

유더는 잔혹한 미소를 띤 나한의 눈빛을 살폈다. 그 남자가 관리관에게 보여주고 있을 환상은 대체 무엇일까.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하필 관리관이 무어라 말을 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능력을 사용하기 시작한 부분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그것보다 지금 더 신경이 쓰이는 점은 따로 있긴 하지…….’

유더는 슬쩍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팔짱을 끼어 살짝 드러난 소매 사이로 자줏빛으로 변한 팔목이 보였다. 검은 장갑 위로 기어 올라온 반점이 피부를 뒤덮은 상태였다.

‘아무 생각 없이 능력을 많이 쓰긴 했지만 설마 이렇게 될 줄이야.’

여태까지는 반점이 자란다고 통증이 생긴 적은 없었는데, 지금은 팔꿈치 조금 위쪽부터 손등까지 바늘로 찌르는 듯 찌릿한 통증이 간헐적으로 느껴졌다. 주먹을 쥐었다 펴 보아도 그 통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 당장 옷을 벗어서 어디까지 번졌는지 범위를 알 수 없는 것이 아쉽지만… 반점의 범위만큼 통증이 느껴지는 거라면 아마 지금은 팔꿈치를 조금 넘은 정도겠지.’

팔꿈치. 유더는 키시아르가 치료하기 괜찮은 범위라 말했던 한계도 대충 그 정도였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키시아르가 반점이 빨리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며 주었던 붉은 보석을 제대로 옷 안주머니에 넣어둔 상태임에도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팔꿈치 근처까지 번졌을 때 약한 통증이 생겼는데, 이 이상 번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

약간 궁금했지만 답은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유더는 다시 한 번 주먹을 쥐었다 편 뒤 숨을 길게 내쉬었다.

‘지금부터는 능력 사용은 최소화해야겠어.’

유더가 제 팔을 살피는 사이 나한은 가차 없이 다른 이들에게도 환상 능력을 사용한 상태였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사람들이 스스로 머리를 땅에 찧거나, 제 손가락을 스스로 부러뜨리며 울고 기는 모습이란 지옥도가 따로 없었다.

“이제 됐어. 대충 묻는 말에 답만 들으면 되니까 한 녀석만 정신을 차리게 해 줘.”

“아직 부족한데.”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고 있는 남자의 앞에 서서 웃고 있던 나한이 중얼거렸다.

“도움이 되겠다고 나선 건 너야. 놀고 싶은 거라면 빠져. 나는 바빠.”

“냉정하시군. 알겠어.”

나한이 제 발치에 쓰러져 자비를 구하며 머리를 찧고 있던 한 남자를 향해 손을 살짝 저었다. 유더는 그가 관리관이었음을 조금 늦게 알아보았다.

시간으로 치면 아주 짧은 순간이 흘렀을 뿐인데도 그는 마치 수십 살 정도는 더 먹은 것처럼 늙어 보였다. 땀과 피로 젖어 쭈글쭈글해진 피부 위로 미치광이처럼 번들대는 눈과 반쯤 하얗게 센 머리 때문에 더욱 그랬다.

“자. 이분의 말에 대답해라.”

“자, 비… 자비를…….”

‘상태가 심각하군.’

유더는 이전 생에서 수없이 많은 고문을 당했고, 스스로도 많은 이들의 목숨을 거두어 보았다. 그러나 이토록 빠르고 확실하게 사람의 정신을 미쳐버리게 만드는 이는 처음으로 보았다.

지금까지는 환상 능력을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은 능력이리라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경계심이 처음으로 들었다.

그만큼 관리관의 꼴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아페토 가의 관리관. 내 말이 들리나?”

유더가 부러 더욱 딱딱하고 냉정하게 묻자 몸을 떨던 관리관의 눈동자가 조금 초점을 되찾았다.

“아……. 아페…토.”

“그래. 넌 아페토 가의 관리관이지. 맞나? 대답해.”

“마, 마, 맞.”

관리관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름. 네 이름은 뭐지.”

“아, 아, 알반. 알반.”

“좋아, 알반. 너희는 여기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었지?”

관리관은 이전처럼 죽이라는 둥, 절대로 말하지 않을 것이라는 둥 하는 허세 따위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유더가 질문을 해 준 것이 너무나 고마워 참을 수 없다는 듯 아이처럼 엉엉 울면서 모든 말을 토해냈다.

‘역시 생각대로 데브란의 말을 듣고 했던 추측들과 그리 다르지 않군.’

그들은 본래 동부에서 아페토 가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파견된 이들이었으나, 2년 전부터는 본가에서 보내 준 각성자 용병들을 데리고 주변에서 배척당하는 각성자를 납치하는 일도 병행했다.

사로잡은 이들의 기를 죽이기 위해 어느 정도 고문을 한 뒤 아페토 가를 위해 일하겠다는 서약서를 쓰게 하고 본가로 보내면 그들의 일은 끝이었다.

“본가라. 거기로 보내진 각성자들은 어떻게 되지?”

“그, 그들은. 확실하게는 잘… 하지만… 들었습니다. 연구를 한다고.”

“연구?”

“사, 사제들이. 머물며 연구를, 한다고 했습니다. 본가에는, 신전과 선이 닿아 있는 분들이, 많으니까……. 아페토는, 본디, 태양신 신전에 많은 자식들을 보낸 가문이라… 시, 신전…. 우리와는 일주일에 한 번 연락을 하고… 하, 한 달에 한 번씩 방문…… 지금도…….”

유더는 침을 흘리며 묻지도 않은 부분까지 말하고 있는 관리관의 이야기를 한 귀로 흘리며 ‘사제’와 ‘연구’라는 부분에 집중했다.

“무슨 연구를 하려는 것인지는 들었나?”

“그, 그, 그, 그건.”

관리관이 고통스럽게 얼굴을 찡그리며 숨을 헐떡거렸다.

“마, 말하면 안… 하지만…….”

“말해.”

그의 곁에 서 있던 나한이 차갑게 일갈했다. 그러자 흠칫 몸을 굳힌 관리관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떨리는 입을 열었다. 그의 눈동자가 미치광이처럼 마구 돌아갔다.

“아아아. 아이를, 아이를 낳게 할……. 연구……!”

“아이?”

“트, 특별한, 특별한 아이라고……! 끄아아악!”

그 순간 관리관이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나한이 보여 준 환상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눈과 코, 귀에서 피를 뿜으며 순식간에 절명했다.

툭 쓰러진 시체 위로 침묵이 흘렀다.

비밀 유지 서약서를 쓰지 않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 유더는 차가운 눈으로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특별한 아이를 낳게 할 연구라니. 대체 그건 무슨 소리지.’

“…다음 사람도 깨워. 다시 물어봐야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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