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동생이 어디와 손을 잡았을지는 대충 짐작이 갑니다. 요즘 동부에서 아페토 공작가가 세력을 넓히려 노력하고 있죠.”
가케인이 그 말을 듣고 데브란을 향해 살짝 눈을 돌리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제클리스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잡혀 있을 때 나도 그 이름을 들었어.”
“그렇군. 아페토…….”
그렇다면 현재 유더가 남아서 상대하고 있을 이들도 그 가문의 사람들일까. 가케인은 아페토 공작가에 대해 잘 몰랐으나 키시아르에게 보낼 편지에 그 이름을 확실히 써 두기로 마음먹었다.
“아무튼 집안의 치부를 제때 정리하지 못해 많은 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게 된 점, 하르탄 가의 일원으로서 정말 죄송합니다. 특히 데브란 너에겐 할 말이 없어.”
제클리스가 정중히 기사식 인사를 하며 사과를 하자 데브란을 비롯한 평민 각성자들이 일제히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그렇게까지 할 줄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아니… 뭐, 제클리스 님이 날 팔아넘긴 건 아니니까요.”
“그래도. 자네 아버지와 데르밀라까지 하마터면 죽을 뻔했잖아. 내가 이곳에 있었다면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텐데…….”
그리 정중히 사과를 하니 데브란도 그에게 더 뾰족하게 굴 수가 없었다. 데브란은 제클리스의 뒤에 있는 여동생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쉰 뒤 고개를 저었다.
“제클리스 님도 가족을 잃지 않았습니까. 됐어요. 어쨌든 나와 가족들은 모두 살았으니까.”
가케인이 보기에 제클리스는 제 가족이 죽은 것보다 연인과 연인의 가족들이 입은 상처에 더 노심초사하는 듯 보였다.
가족간의 정이 그리 깊지 않은 것은 대부분의 귀족가에서 당연한 일이었기에 놀라운 일은 아니었지만, 데르밀라를 향한 그의 마음이 진심인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제클리스 님. 그러면 저희는 잠시 전서구를 한 마리 빌려도 되겠습니까? 단장님께 곧바로 보고 편지를 써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물론입니다. 저도 기사단에 연락을 해야겠군요. 아무래도 이곳에 오래 있어야 할 것 같으니 말입니다.”
제클리스는 이번 일을 마무리할 때까지 자카일을 방에 가두어 두겠다고 선언했다. 이내 그의 명에 따라 응접실로 들어온 하인들이 불안한 얼굴로 그림자 분신에서 벗어난 자카일을 데리고 나갔다.
자카일은 형이 정말로 하르탄의 영주 자리를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여겼는지, 넋이 반쯤 나간 채 끌려갔다.
“데브란. 넌 나와 잠깐 올라가서 단장님께 편지를 쓰고 오자. 그리고 지미, 우리가 올 동안 여기 계신 다른 분들에게 혹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네가 잘 지켜드려.”
“그럴게요.”
지미가 결의에 찬 얼굴로 허리에 찬 검 손잡이를 꽉 잡았다. 이전이라면 귀엽다고만 여기며 주변의 웃음을 살 만한 모습이었으나 방금 지미가 검기를 내뿜는 것을 본 사람들은 아무도 웃지 않았다.
가케인은 제클리스의 안내를 받아 하르탄 영주 성에서 일하는 이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전서구를 빌렸다. 데브란의 말과 제가 알아낸 정보를 취합해 최대한 간략히 편지를 쓰려 했지만 적을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 예상보다 시간이 걸렸다.
“조금 아깝네. 칸나가 여기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엉? 칸나? 아, 그 정과 부단장이 된 녀석?”
편지를 쓰다 말고 문득 떠오른 생각에 가케인이 중얼거리자 데브란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응. 물건에 담긴 정보를 읽는 능력이라서, 여기 있었으면 도움이 많이 되었을 거야. 제클리스 님의 편지도 칸나가 봤으면 곧바로 누가 쓴 건지 알았을 테고, 네가 어디로 끌려갔는지도 더 빨리 알았겠지. 이 마을 사람들이 입을 열지 않아서 정보를 얻기가 좀 까다로웠거든.”
처음에는 그저 작은 사건인 줄 알았던 일이 이렇게 예상외로 커질 줄은 몰랐다. 이곳에 오기 전 데브란의 실종 사건에 아페토 공작가라는 예상외의 거대한 집단이 엮여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거 생각보다 일이 더 커질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일단 본래의 목적이었던 데브란은 찾아냈고, 무사히 보호했으니 그들이 할 일은 여기에서 끝이었다. 혹 일이 더 커지게 되더라도 거기서부터는 단장인 키시아르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을 가케인은 잘 알고 있었다.
‘유더는 공작가의 사람들을 상대로 혼자서 괜찮을까……. 그것도 산적 대장 놈하고 단둘이잖아. 강하단 걸 알면서도 갑자기 걱정이 되네.’
가케인은 편지를 담고 날아간 전서구가 완전히 시야 속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 몸을 돌렸다.
“가자, 데브란.”
“예정대로 곧바로 떠날 거야?”
“그래야지.”
“흠…….”
가케인은 왠지 미적지근한 데브란의 낮은 침음을 들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래. 뭔가 마음에 걸리는 점이라도 있어?”
“음… 사실 우리가 바로 여길 탈출하려 했던 건 자카일 혼자 있을 거라 여겨서였잖아. 그런데 지금은 제클리스 님이 와서 상황이 바뀌었으니까… 굳이 다친 사람들을 데리고 바로 떠날 필요까지는 없지 않아?”
너도 유더와 여기서 합류하는 쪽이 더 편하지 않겠느냐는 데브란의 말에 가케인 또한 잠시 고민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야 이 정도쯤 다친 건 아무렇지도 않지만 상처를 제대로 봐야 할 사람들도 있고…….”
‘맞는 말이긴 해.’
그들이 떠나면 제클리스 혼자서 자카일을 감시해야 하고, 유더에게 혹 무슨 일이 생겨도 곧바로 달려갈 수 없게 된다. 가케인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러면 오늘 밤까지만 여기서 보내면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형, 가케인 형!”
그때, 갑자기 밖에서 다급히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리며 문이 벌컥 열렸다. 흥분한 얼굴의 지미가 달려와 가케인과 데브란에게 손짓을 했다.
“빨리 나와 봐요. 산에서 또 엄청난 불이 났어요!”
“뭐?”
“아까보다 훨씬 먼 곳에서 일어난 불이에요. 아무래도 그쪽에 유더 형이……!”
가케인은 지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들이 전서구를 날려 보내기 위해 방문한 곳은 하르탄 성에서 제일 높은 지붕 바로 아래쪽에 위치해 있었기에 나가자마자 곧바로 바깥 풍경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그리고 지미의 말대로 정말 멀리 있는 산속에서 거의 하늘을 뚫으려는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고 있는 중이었다.
“저 정도 크기라면…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다 봤겠는데.”
가케인을 따라온 데브란이 그 불을 보고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데브란. 너도 저 정도 불을 일으킬 수 있겠어?”
“아니. 내가 일으킬 수 있는 제일 큰불은 아까 그 정도야. 저건… 솔직히 상상 초월인데. 저 정도 크기는 마병단의 불 능력자들을 다 모아도…….”
유더다. 유더가 일으킨 것이다. 가케인의 감이 날카롭게 번쩍였다.
‘유더. 대체 거기서 무슨 일을…….’
* * *
유더 아일이 동굴 가장 안쪽에 위치한 넓은 공간으로 들어섰을 때, 안의 풍경은 예상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낯이 익은 관리관과 그의 측근 몇 명이 둘러앉아 무료한 얼굴로 무어라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는 뜻이었다.
“기운을 좀 빼놔야 입을 열 맘이 들 테니 그 귀족 녀석 심문은 새벽쯤 하는 게 낫겠지. 네가 해라, 3호. 그리고 본가 쪽에서는 아직 연락이 없으신가?”
“별다른 일이 없다면 아마 오늘 내로…….”
“응? 거기 누구냐!”
유더와 나한이 들어온 것을 눈치챈 이가 놀란 얼굴로 입을 벌렸다. 유더는 그들이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먼저 손을 올려 한 번 가볍게 휘둘렀다.
“으아악!”
동굴 안은 갑자기 불어닥친 회오리바람으로 인해 엉망이 되었다. 안에 있던 모든 인간과 물건들이 바람에 휩쓸려 정신없이 공중을 날았고, 와중에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 살려!”
“뭐야, 무슨 일이야!”
한참 동안 회오리 속에서 날아다니는 가구와 뒤섞여 부딪치느라 만신창이가 된 이들을 바라보던 유더는 문득 한쪽 손에서 올라오는 찌릿한 통증을 느끼고 고개를 내렸다.
‘뭐지.’
하지만 곧바로 살펴볼 만큼 상황이 여유롭지는 않았기에 그는 곧 시선을 돌렸다. 충분히 섞을 만큼 섞었다는 생각이 든 뒤 가라앉힌 바람 사이로 부서진 가구와 뒤섞여 엉망진창이 된 사람들이 땅에 떨어져 신음했다.
“아악……. 악……!”
“내, 내 팔……!”
“나한. 전부 모아서 묶을 테니 도와.”
“참 빠르고 간편하군. 이 많은 사람을 그리 쉽게 제압하는 사람은 세상에 아마 형제뿐일 거야.”
형제라고 부르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음에도 나한은 무서운 줄을 모르는지 같은 짓을 끝도 없이 반복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지적하는 것보다 눈앞의 사내들을 모두 묶는 쪽이 더 급했기에 유더는 미간만 한 번 찌푸리고 일에 집중했다.
쓰러져 있던 이들을 모두 묶어 한곳에 모아 두니 그 수가 7명이나 되었다. 유더는 그 중 아까 관리관의 명을 받아 키올레와 싸웠던 각성자들은 뒷목을 때려 확실하게 기절시킨 뒤 따로 격리해 두었다.
일사불란하게 끝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관리관과 그의 부하들은 유더와 나한의 정체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어 공포에 질렸다.
“너… 너흰 대체 누구냐. 어디서 보낸 놈들이야……!”
“그건 알 것 없고.”
유더는 부서진 가구에 얻어맞아 얼굴이 퉁퉁 부어 있는 관리관을 향해 다가갔다.
“내가 시간이 별로 없으니 짧게 끝내자고. 너희들은 아페토 공작가 소속인가?”
“…죽여라!”
관리관은 유더의 물음을 무시하고 이빨이 몇 개 빠진 입을 우물대며 외쳤다.
“네가 어디서 온 놈이든 우린 절대 입을 열지 않을 거다. 그냥 죽여!”
‘죽이라고… 말은 참 편하게 하지.’
죄도 없는 각성자들을 잡아들여 반역자에게나 사용할 법한 악질적인 결박을 한데다, 등 뒤에 싸구려 폭탄을 붙여 두기까지 한 놈들이 조금 얻어맞았답시고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꽥꽥 소리치는 모습이 우습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