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92화 (92/805)

92화

“……맙소사! 데르밀라!”

“제클리스!”

다른 이들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 듯 한달음에 달려온 그가 데브란의 동생을 숨이 막히도록 끌어안고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렸다. 곧장 그에게 무어라 외치려던 데브란조차 두 사람의 기세를 막지 못했다.

“데르밀라! 데르밀라! 당신이지? 정말 당신인 거지?”

“맞아요. 나예요.”

“이럴 수가, 세상에. 난 당신이 죽었다는 말을 들은 뒤에, 아, 정말로, 믿을 수가 없어서……. 난 정말이지……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서로를 끌어안고 한참 동안 통곡을 한 뒤에야 제클리스 하르탄은 겨우 진정하고 대화가 가능한 상태로 되돌아왔다.

“미, 미안합니다 여러분. 믿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난 바람에……. 그래서, 어.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여러분은 누구시죠?”

“저도 기억이 안 나십니까, 제클리스님?”

데브란이 비꼬듯 묻자 제클리스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너는 물론 기억하지, 데브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자카일은 또 왜 그런 상태로 데려온 거고.”

데브란은 동생의 손을 꽉 잡은 채 아직도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을 하고 있는 제클리스를 보며 실로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가케인은 아무래도 데브란 대신 자신이 나서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클리스 하르탄 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제클리스 하르탄입니다.”

“저는 데브란 하르투데의 실종 건을 조사하기 위해 펠레타 공작 전하의 명을 받고 방문한 마병단 소속 가케인 볼룬발트입니다. 실례지만 기사단에 일이 있어 며칠 후에 돌아오실 것이라 들었는데, 예상보다 빨리 돌아오셨군요.”

“아니, 그게……. 실은 어제 장례식 도중 급한 일이 있다는 편지를 받고 떠난 것이었는데, 오늘 아침 들른 마을에서 우연히 마주친 동료가 그런 일은 없다는 말을 하더군요. 뭔가 명령이 잘못 하달된 것 같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곧장 다시 마을로 되돌아온 참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가케인과 데브란의 시선이 동시에 자카일에게로 향했다. 자카일은 제 형을 본 이후부터 반가운 표정은커녕, 내내 시선을 피한 채 낭패한 기색이 역력한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거 어쩌나. 제클리스 님을 오래오래 쫓아내고 그사이에 우릴 다 죽이고 싶었을 텐데 원하던 대로 안 되어서? 엉?”

“…….”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제클리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동생의 얼굴과 데브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자카일이 무슨 짓을 했습니까? 혹시… 데브란이 가족들을 죽이고 자살했다고 알려진 것과 관련된 겁니까?”

과연 기사답게 눈치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가케인은 데브란에게 눈짓을 보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드릴 말씀, 잘 들어 주십시오.”

가족 간에 정이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자카일의 형제인 이상 그에게는 조금 충격적인 이야기일 것이다.

가케인은 입을 틀어막은 그림자 분신에게서 벗어나려 몸부림을 치고 억눌린 고함을 지르는 자카일을 무시한 채 냉정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희는 현재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자카일 님과 관련되어 있다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가케인의 이야기 중간중간, 데브란과 그의 여동생, 그리고 각성자들이 모두 나서 사이에 빈 부분을 채워주었다.

제클리스는 처음에 무척 충격을 받아 믿을 수 없어 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이야기가 끝나갈 때쯤에는 냉정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모두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 되어 저희는 함께 합류해 이곳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그랬군요. 잘 알겠습니다.”

제클리스의 입술 사이로 긴 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연인의 눈물 가득한 얼굴과 상처투성이인 데브란, 그리고 검은 제복 차림의 가케인과 지미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축 늘어져 무시무시한 시선으로 노려보고만 있는 자카일의 얼굴이었다.

“잠시 자카일을 풀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야기는 들어 보아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 이상 뭘 더……!”

가케인은 분노하여 목소리를 높이는 데브란에게 손을 들어 가로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전부 다 풀어 드리면 도주하실 수도 있으니 입만 잠시 풀어드리는 건 이해해 주십시오.”

“그건 괜찮습니다.”

가케인이 보기에 제클리스는 이미 그들의 말에 거짓이 없음을 믿고 있는 상태였다. 자카일의 입을 막고 있던 그림자 분신이 천천히 손을 내리자 제클리스가 그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형. 저놈들의 말을 믿는 건 아니지?”

“자카일.”

자카일이 제 이름을 부르는 형을 보며 창백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억지로 얼굴 근육을 움직인 탓인지 기이하게 일그러져 더욱 이상해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전부 거짓말이야. 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걸 형도 알잖아. 내가 어떻게 아버지와 누님을 배신한단 말야? 저놈들이 날 노리고 거짓말을 하는 거야!”

“…….”

“내가 손을 잡으면 누구와 잡는다고. 정말 말도 안 돼. 그렇잖아. 형도 알다시피 난 영주 자리 같은 덴 관심 없어. 전부 다 형에게 넘길 거야. 그러면 되잖아. 응? 형은 날 믿지?”

“자카일.”

제클리스가 다시 한번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자카일은 언제나 쓸데없는 몽상에만 가득 차 불쾌하다고만 여겼던 형의 눈동자가 그토록 차갑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거짓말은 그쯤 해라.”

일순 자카일의 등골을 타고 소름이 돋았다.

“설마 지난 1년간 네가 보였던 그 모든 이상한 행동들을 가족들이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고 여긴 건 아니겠지.”

“……뭐?”

“넌 어릴 때부터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욕심은 우리 형제 중 제일 많았었지. 아버지가 무리해서라도 학자의 길을 열어주시려 노력했는데도 그 기회를 차버리고 오더니, 1년 전부터 수상한 자들과 접촉해대는 걸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했을까.”

순간 자카일은 너무 놀라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무, 무슨 소리야?”

“아버지가 누님께 영주 자리를 상속하는 일을 앞당기려 마음먹으신 이유가 바로 너 때문이었다는 소리야. 네가 하는 대로 놓아두면 분명 다른 세력을 영지 내로 끌어들여 우리 모두를 위험하게 만들 것이 뻔했으니까.”

제클리스는 한숨을 내쉬며 동생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너무 늦었던 모양이구나. 네가 설마 내 연인까지 끌어들여 제 욕심을 채우려 할 줄은 몰랐다. 제법이구나. 무슨 짓을 해야 내가 이성을 잃을 줄 정확히 알고 저질렀어.”

“혀, 형. 아니야. 내가 그런 게 아니야. 들어 봐! 저런 증거도 없는 이야기와 평민 애인 따위에게 눈이 멀어 친동생을 내치려는 거야?”

“자카일. 그녀의 이름은 데르밀라야. 아니. 이젠 데브란의 성을 받아 데르밀라 하르투데가 되겠군.”

“그게 지금 뭐가 중요해!”

“적어도 내 연인을 죽이려 하고 나를 멀리 보내버리려 가짜 편지를 보낸 동생보다는 훨씬 중요하지.”

제클리스가 품속에서 편지 하나를 꺼내 보였다.

“이 편지가 진짜 기사단에서 보낸 것이 아니라면 범인을 찾아야겠지? 데브란을 잡아 고문했다는 놈들을 데려와 확인해 보면 꽤 재미있는 결과가 나올 것 같은데 말이다.”

“…내가 보내지 않았어.”

“그들도 그렇게 말할까? 네가 영주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면, 어째서 내가 이 성으로 돌아오자마자 많은 하인들이 너와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었는지부터 설명해 주어야 할 게다. 그들은 자카일 네가 영주 자리를 물려받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던데.”

그제야 자카일의 얼굴이 마구 일그러졌다.

“……그건! 멍청한 평민들이 그냥 지껄이는 소리고!”

“그래? 그러면 내가 이 영지를 물려받아도 괜찮겠구나.”

“뭐? 하, 하지만 형은 기사단에…….”

“나는 데르밀라의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어. 영지를 물려받아 그녀와 결혼하고 널 내보내는 쪽이 더 나을 수도 있겠지.”

“하…하하. 거짓말이지……?”

자카일이 어설프게 웃으며 형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나 제클리스의 냉정한 눈빛에서 농담을 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아냐. 아니야. 날 흔들려고 거짓말을 하는 거야. 형이 어떻게 기사단을 그만두고 이따위 작은 마을의 영주 자리 따윌 받아들이겠어. 그럴 리 없어. 아니야.’

하지만 만약 정말로 제클리스가 하르탄의 영주가 되겠다 말한다면, 자카일이 그것을 뒤집을 힘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자카일은 스스로를 다독이면서도 불안감을 지우지 못했다.

동부에서 오래도록 내려온 전통은 법보다 더한 힘을 지니고 있다. 아페토의 사람들조차 그것을 뒤집지는 못할 것이다. 한 살이라도 더 나이가 많은 장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갖겠다는데 감히 누가 반발할 수 있단 말인가.

자카일은 제 앞에 펼쳐져 있다 생각했던 너른 꿈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듯한 환상을 보았다. 그의 모든 계획은 하르탄의 영주가 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하르탄의 영주 자리를 얻지 못한다면?

단순히 귀족가의 무능한 막내아들일 뿐인 그에게 과연 그 누가 새로운 기회를 주려 할까…….

“아니야. 아니야!”

자카일은 고개를 저으며 몸부림을 쳤다.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지? 응? 혀, 형은 그 여자만 있으면 된다고 말했잖아. 그 여자가 멀쩡히 살아 돌아왔는데 내게 왜 이러는 거야! 내가 불쌍하지도 않……! 으읍!”

가케인이 그쯤에서 도로 그의 입을 막았기에 고함은 이내 억눌린 신음으로 변했다. 동생이 욕심으로 일그러진 눈빛을 훤히 드러내고 발악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제클리스가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감사합니다.”

“더 이야기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뭐, 보시다시피 더 들을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모든 일의 정황이 이리 확실한 것을요.”

제클리스의 눈 속에서 동생을 향한 동정의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약간 지친 얼굴로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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