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괴물이라니. 너무하네.”
가케인이 가볍게 투덜거리며 그림자 분신을 움직였다. 지미를 안은 가케인을 가볍게 든 분신이 열린 창밖을 향해 거침없이 몸을 날렸다.
“우악!”
추락하는 감각에 지미가 비명을 질렀지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느껴진 것은 고통이나 충격이 아니었다. 그들을 안은 그림자 분신은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땅에 착지했던 것이다.
“형, 이런 건 마음의 준비를 하게 먼저 말 좀 해 주세요!”
“미안. 급해서 깜박 잊었어.”
가케인은 그림자 분신으로 이런 일도 가능하다는 것을 유더와 함께한 지옥 훈련 때 배웠다. 그림자는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거의 타격을 받지 않았기에 높은 성을 일일이 뛰쳐 내려가는 것보다는 이쪽이 훨씬 나가기 좋은 방법이었다.
“뛰자.”
그들은 숨이 가쁘도록 뛰어 성 뒤편으로 이어지는 뒷산으로 향했다. 산은 꽤 크고 깊었지만 성안에서도 크게 보이던 불기둥을 찾기에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불기둥이 치솟는 근원지에 도착했을 때, 가케인과 지미가 마주한 광경은 두 집단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한쪽은 허름한 옷에 부상자가 대부분이었고, 다른 한쪽은 제대로 된 갑옷을 걸치고 무기를 든 경비대와 그들을 지휘하는 젊은 귀족 청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두 집단은 서로 무기를 마주한 채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가케인과 지미를 보고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먼저 반가운 얼굴로 소리친 것은 부상자 집단 쪽에 있던 커다란 덩치의 사내였다.
“너, 지미구나! 그렇지! 옆에 있는 녀석이 그러면 가케인이겠군!”
“데, 데브란 형이에요? 얼굴이 그게 뭐예요!”
상처투성이라 본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인 데브란을 보며 지미가 경악한 얼굴로 외쳤다. 그러나 데브란은 기분 좋은 얼굴로 크게 웃기만 했다.
“살아난 대가로는 싼 편이지! 난 아무렇지도 않아. 지금 아주 기분이 좋다고. 하하핫.”
“데브란!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지? 옆의 다른 분들은 누구고?”
가케인의 외침에 데브란이 보란 듯이 무기를 겨눈 경비대원들 쪽을 가리켜 보였다.
“저 비열한 도련님이 내게 누명을 씌워 팔아넘기려 했거든. 옆에 있는 이 친구들은 나와 비슷한 이유로 잡혀 있던 이들이야. 모두 각성자지. 그리고 이쪽은 내 가족들.”
“가족?”
데브란의 말대로 그의 옆에는 그와 닮은 노인 한 명과 그를 부축한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세 사람이 가족이라는 것은 얼굴만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만했다.
‘데브란이 죽였다던 그 가족들이 멀쩡히 살아있었다니. 그렇다면 역시…….’
가케인의 시선이 경비대 뒤에 서 있는 자카일 쪽을 향해 돌아가자 그가 분노에 찬 눈을 번들대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 말을 믿는가? 모두 거짓말이야!”
“하지만 자카일 도련님…….”
자카일의 명에 따라 데브란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탈출한 각성자들을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던 경비대원들의 표정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각성자를 배척한다 해도 그들은 작은 마을에서 오랫동안 이웃사촌으로 살아온 세월이 더 긴 사람들이었다. 자카일의 말과 달리 눈앞에 있는 이들이 진짜 데브란과 그의 가족들이란 것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데브란이 가족들을 죽인 것이 아니라면, 불을 낸 것도 저 녀석이 아닐 수 있지 않습니까. 다시 돌아왔으니 적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 정도는 들어 보시는 것이…….”
창을 겨누고 있던 경비대 중 한 명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말은 누가 들어도 타당했으나 자카일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분노한 자카일이 가지고 온 검을 빼내어 경비대원의 목에 겨누며 고함을 질렀다.
“살인범과 동조하려 하다니, 너도 범죄자임에 틀림없구나!”
“아, 아닙니다!”
자카일의 검 끝에 목이 찔린 경비대원이 사색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내 아버지와 누님을 죽인 놈과 할 말 따위는 없어! 당장 저놈들을 잡아 가둬!”
“아… 알겠습니다.”
하지만 경비대원들은 차마 쉽게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불기둥을 일으키고 있는 데브란을 비롯해 그의 옆에 서 있는 각성자들이 보란 듯 능력을 사용하고 있는 모습에 겁을 집어먹었기 때문이었다. 양측의 긴장이 더욱 팽팽해졌다.
그리고 거기까지 형세를 파악한 가케인이 취한 행동은 몹시 신속하고 간결했다.
“데브란. 도와줄까.”
두 집단 사이에 선 가케인이 데브란을 향해 부드럽게 말을 걸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아무래도 너흰 굳이 싸우고 싶어 하진 않는 것 같고 저 도련님 하나만 해결하면 될 것 같은데. 그렇지?”
“그렇기는 한데, 뭘 어떻게 하려고?”
데브란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이렇게 하려고.”
“저 치들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억!”
기가 막힌 얼굴로 가케인과 데브란이 나누는 대화를 보고 있던 자카일이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그들이 대치하고 있는 동안 어느새 그의 바로 뒤쪽까지 슬그머니 길게 늘어나 다가갔던 가케인의 그림자가 불쑥 몸을 일으켜 그의 멱살을 쥐고 번쩍 들어 올렸기 때문이었다.
“으아악! 뭐야, 이 괴물! 놔! 날 놓으란 말이다!”
“자카일 도련님!”
데브란과 각성자들 쪽만 경계하고 있던 경비대원들이 혼비백산해 몸을 돌렸다. 그러나 이미 붙잡혀 공중에서 버둥대는 자카일에게 용감하게 다가가려 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 틈을 타 가케인의 그림자 쪽으로 다가간 지미가 검을 뽑아 새파란 검기처럼 보이는 기운을 드러내고 자카일의 얼굴에 겨누자 공포에 질린 외침은 더욱 커졌다.
“거, 검기! 저런 꼬마가!”
“저 아이, 설마 근처에서 각성했다는 그……!”
“자. 도련님. 이제 경비대원들을 뒤로 물리라고 하고, 우리끼리 이야기 좀 하지요?”
그림자에게 붙잡힌 채 공포에 질려 있는 자카일을 향해 가케인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가 경비대원들과 자카일의 눈에는 마치 악마처럼 보였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거기 있는 지미의 검 실력을 보게 될 겁니다. 그걸로 어디까지 벨 수 있을지 궁금하지 않아요? 사람 팔다리 정도는 스치기만 해도 썰려 나간다던데.”
“히, 히이익.”
이곳에 있는 이들은 태어나서 소드 마스터는커녕, 오러를 다룰 줄 아는 기사조차 제 눈으로 본 적이 없는 평범한 이들이었다. 그런 경비대원들의 눈앞에 지미가 드러낸 검기 능력은 그야말로 재해와도 같은 충격을 선사했다. 내심 마병단에서 파견되어 온 이들을 무시했던 자카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 얼굴 가까이에서 흔들리는 검기를 보며 이를 악문 자카일이 간신히 떨리는 입술을 열어 목소리를 내었다.
“모, 모두 뒤로 물러나.”
“하지만 도련님!”
“물러나라면 물러나! 아니면 네놈이 대신 죽던가!”
거친 외침에 반응해 경비대원들이 어쩔 수 없이 뒤로 천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가케인은 경비대원들이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거의 듣지 못할 정도까지 물러난 것을 확인한 뒤에야 지미에게 눈짓을 해 검을 도로 집어넣도록 했다.
그리고 그제야 데브란 또한 아직도 타오르고 있던 거대한 불기둥을 없앴다. 마을 전체를 검게 그슬렸던 불의 흔적과 달리, 실제 데브란이 일으킨 불이 사라진 곳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역시 마을에 남은 불의 흔적은 네 능력으로 한 게 아니었구나. 그렇지?”
“당연하잖아.”
가케인의 질문에 시원하게 대답한 데브란이 자카일을 노려보며 가케인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여기까지 탈출해서 갑자기 불을 일으킨 건 또 뭐고.”
“유더가 시킨 대로 한 거야. 그 녀석이 우리 모두를 구해 줬거든. 나가서 불을 일으키면 너희들에게 신호가 갈 테니까 그렇게 해서 불러내라고 말했어.”
“유더가?”
눈을 조금 크게 떴던 가케인이 이내 데브란의 뒤에 있는 일행들의 면면을 살폈다. 그러나 그 속에 익숙한 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왜 정작 유더는 보이지 않는 건데?”
“그 녀석은 우릴 먼저 내보내고 할 일이 있다고 하더라고. 내 생각에는 거기 있는 빌어먹을 자식들을 모두 해치우고 나서 올 생각인 것 같아.”
가케인은 데브란이 증오 가득한 얼굴로 내뱉은 그 빌어먹을 자식들이 누구냐고 물으려 했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유더가 돌아오면 알게 될 사실이었다.
“그러면 유더와 함께 있던 녀석도 같이 남았어?”
“처음 보는 녀석이 한 명 있기는 했어.”
“알겠어. 유더의 전언은 우리와 합류하라는 것으로 끝이야?”
“아니. 여기서 일어난 상황들을 곧바로 단장님에게 전달하고, 하르탄을 빠져나가 왔던 길로 돌아가라고 하더군.”
“……탈출하라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라니. 그러면 유더는 언제, 어디서 합류할 생각이란 말인가. 약간 걱정이 되었지만 가케인은 유더가 지닌 능력과 판단력을 믿기로 했다.
유더가 여기 없는 이상 이제부터 데브란을 비롯한 모든 이들을 대신 움직여야 할 사람은 바로 그였다. 한시라도 허투루 허비할 수는 없었다.
“좋아. 단장 보좌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니 명을 따라야지. 거기 계신 분들, 꽤 오래 이동해야 할 텐데 다들 상태는 괜찮으십니까?”
가케인의 물음에 뒤에 있던 각성자들이 일제히 앞다투어 괜찮다고 소리를 쳤다. 모두 데브란과 그리 다르지 않은 부상자들이었지만 표정만은 몹시 밝았다. 유더가 구해 주었다더니, 모두 마병단에 대한 믿음이 하늘을 찌르게 된 듯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가케인의 그림자에 꽉 잡혀 있는 자카일만은 기뻐할 수 없었다. 그는 앞에서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으며 저에게 무척 좋지 않은 상황이 일어나고 있음을 눈치 빠르게 파악했다.
아페토 가에서 흥미를 보이기에 직접 넘겨주었던 데브란이 멀쩡히 탈출을 한 데다, 그들을 구해 주었다는 이는 아예 거기서 끝장을 보고 올 것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았지만 정말로 죄수들이 살아 눈앞에 있으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빌어먹을 아페토 자식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굴더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