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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89화 (89/805)

89화

“와, 형. 그걸 사람들이 그렇게 솔직하게 다 말해줬어요? 바깥에서 만난 마을 사람들은 하나도 말해주지 않으려고 했었잖아요. 대체 무슨 방법을 쓴 거예요?”

“검은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단체로 우르르 다니면서 질문할 때와 한 명이 약한 척을 하면서 살갑게 다가올 때는 다르니까.”

가케인이 씩 웃으며 침대 앞 의자에 걸터앉았다.

“아무튼 이 정도만 들어도 대충 감이 오지 않아?”

“데브란 형이 사라진 건 역시 자카일 그 사람 때문일 것 같아요.”

지미의 추리를 들으며 가케인이 눈꼬리를 부드럽게 휘었다.

“내 생각도 그래. 유더가 돌아오면 그냥 자카일 쪽을 대놓고 심문해 보자고 말하려고.”

“좋아요.”

가케인과 지미의 시선이 같은 뜻을 품고 웃음 속에 잠겼다. 지미는 가케인을 바라보며 동경의 눈빛을 감추지 못한 채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케인 형. 형은 알파 각성자라고 그랬죠?”

“알파? 응. 맞아.”

“부럽다.”

갑자기 흘러나온 부럽다는 말에 가케인이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가?”

“다른 형, 누나들이 그랬는데… 2성 발현을 하면 키가 갑자기 막 커진다면서요. 형도 그랬어요?”

“키?”

가케인이 멍하니 반문했다. 그것은 지금껏 그가 알파로 발현했다는 말을 들은 이들의 반응 중 가장 특이한 질문이었다.

“아니, 난 별로… 각성 전부터 이미 키는 지금과 그리 다르지 않았어. 잘 모르겠는데.”

“에버 누나는 마병단 들어오기 얼마 전에 발현했는데 지금도 계속 커지고 있댔어요. 그리고 단장님도 엄청 크잖아요.”

“단장님… 음. 그렇지.”

가케인은 지미의 말을 들으며 머릿속으로 키시아르 단장을 떠올렸다. 가케인의 키도 평범한 사내들 사이에 서면 어디서든 눈에 띌 만큼 큰 편이었으나 키시아르는 체격 자체부터가 남달랐다.

그 정도로 큰 사람은 종종 둔해 보이게 마련이라지만 키시아르 라 오르의 육체는 신이 직접 만들어내어 빚은 것처럼 완벽했기에 그저 압도적인 기분만을 느끼게 할 뿐이었다.

가케인은 아직도 종종 제가 제2의 성을 발현했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곤 했지만 키시아르 단장은 그 이상한 사실조차 아주 당연한 듯 받아들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 같은 이가 제2성을 발현했다면 그 자체조차 남다른 축복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가케인은 단상에 오른 키시아르를 처음 보았던 순간 그에게서 느꼈던 거대하고 압도적인 알파의 기운을 떠올렸다. 알파로 발현한 동료들을 이후 꽤 많이 만났지만 누구도 키시아르와 같지는 않았다. 그는 그런 존재였다.

“단장님은 황족이라 본래부터 그런 체격이셨을 거야. 아마도.”

“그래요?”

“지미. 넌 사실 제2성 발현을 하고 싶은 거야?”

가케인은 조심스럽게 지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지미가 울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 키야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알아서 커질 텐데.”

입을 열어도 좋을지 망설이는 눈빛이었던 소년이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제가 어린 것 때문에 부모님이 너무 걱정하시는 것 같아서요. 그래도 지금 당장 발현하는 걸 원하는 건 아니고요… 임무에 방해가 되긴 싫어요.”

“부모님? 아. 이 근처에 사신다고 했지. 이번 휴가 때 뵈러 가지 않았어?”

가케인의 질문에 지미가 고개를 저었다.

“수도 안에 있는 아버지 친구 분의 댁에 머무르다 왔어요. 부모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거든요.”

“왜……. 아.”

왜냐고 물으려던 가케인은 문득 제 이름을 나한이라 밝힌 산적 대장이 지미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고 멈칫했다. 가케인이 무엇을 떠올렸는지 안 것처럼 지미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가게가 많이 바쁜 시기라 이렇게 갑자기 휴가를 나와도 만나지 못할 거라고 그러셨거든요. 전 그 말이 진짜인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니 역시 아닌 것 같아요. 편지를 보냈을 때도 어머니가 다시 만날 때는 부모님이 수도에 거래를 위해 올라올 때일 거라고 그랬었거든요. 아마 두 분은 제가 고향에 다시 돌아오길 바라지 않으셨던 거겠죠.”

가케인이 살았던 남부에서는 각성자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심하지 않았기에 지미에게 해 줄 좋은 위로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가케인은 망설이다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솔직하게 조언하기로 했다.

“2성 발현을 한다고 꼭 키가 커지는 것도 아니고, 몸만 커진다고 어른이 되는 것도 아니야. 네 부모님은 현명한 분들이시니 분명 잘 계실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정 염려가 되면 단장님이나 유더에게 말해. 분명히 도와줄 테니까. 아, 물론 나도 그렇고. 우리 돌아갈 때 너희 마을 쪽으로 들렀다 가자고 할까?”

“괜찮아요.”

“부모님이 보고 싶을 것 아냐. 여기서 몇 시간 거리라고 하지 않았어? 그 정도 일정 변경은 크게 무리되지 않을 테니 솔직하게 말해.”

“아니 진짜, 진짜로 괜찮아요.”

황급히 고개를 저은 지미가 잠시 후 어설프게 웃으며 가케인을 올려다보았다.

“너무 어린애 같은 고민이라고 말하지 않아 줘서 고마워요, 가케인 형.”

“넌 좀 더 어린애처럼 굴어도 돼. 내 동생들이 네 절반만이라도 의젓했었다면 좋았을 텐데.”

가케인이 일부러 보란 듯이 한숨을 푹 내쉬자 지미가 뜻밖의 말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생이 있었어요?”

“말도 마. 다섯이나 있어.”

“우와! 전 혼자라 형제자매가 있는 기분을 느낀 적이 없어요.”

“느껴서 좋을 기분은 아니야. 엄청나게 시끄럽고, 싸우기는 또 얼마나 자주 싸우는데. 하루 종일 정신이 없지.”

가케인은 지금쯤 집에 있을 어린 동생들을 오랜만에 떠올렸다. 그리운 얼굴들을 이번 휴가 때는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영영 보지 못할 것은 아니니 괜찮았다.

“그건 마병단 분위기와 같네요.”

지미의 말에 가케인이 피식 웃었다.

“그렇네. 마병단하고 그리 다를 것도 없어.”

“유더 형은 어떨까요? 유더 형도 형제자매가 있을까요?”

“유더?”

“형은 알죠? 유더 형이랑 가장 친하잖아요.”

갑자기 이야기가 유더 쪽으로 튀었지만 가케인은 지미의 반짝이는 눈을 보며 이내 납득했다.

이번 임무 내내 보인 유더의 강한 모습에 지미는 완전히 푹 빠진 상태였다. 주인을 따르는 강아지처럼 뒤를 쫓는 모습을 보면 유더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어 하는 것도 당연해 보였다.

‘유더랑 가장 친하다라… 그렇게 보이면 고맙긴 하지만.’

사실 보이는 것만큼 친한지는 잘 모르겠다는 것이 가케인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가케인의 눈에 비치는 유더는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 만큼 깊은 눈빛을 지닌 비밀스러운 존재였다.

그는 스스로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았고, 말수도 극도로 적어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동떨어진 존재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기묘할 만큼 타인의 시선을 끄는 데다 압도적인 강함을 지녔으니 그가 다른 이들의 동경과 질시를 먼저 산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그가 마병단을 위해서라면 위험을 무릅쓰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는 배려심 깊은 사람임이 알려진 뒤엔 달라졌지만, 그래도 유더는 여전히 비밀스러운 사람이었다.

평민 출신임에도 타인을 이끌고 움직이게 만드는 데 거리낌이 없으며, 가진 능력의 끝이 어디인지 물어보는 것조차 무서울 만큼 강하다. 그 능력이 정말 20살밖에 안 된 청년의 경험 안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일까?

키시아르 라 오르가 태어날 때부터 신이 빚어낸 인간 위의 존재처럼 느껴지는 사람이라면, 유더는 다른 의미로 남달랐다. 유더 아일은 오랫동안 가케인이 바라 왔던 ‘강함’을 글자 그대로 현실에 이끌어 낸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바로 그 때문에 가케인은 유더에게 큰 흥미를 가지고 매혹되었다.

비록 유더는 가케인에게 다른 이들보다 더 큰 관심을 보이지는 않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않는 듯하니 괜찮았다. 가케인은 끈기에는 자신이 있는 편이었다.

“유더에게 형제자매는 아마 없을 거야. 그렇게 들은 것 같거든.”

“그렇구나. 유더 형과 제게 공통점이 있기는 했네요.”

신이 난 얼굴로 웃던 지미가 갑자기 창가 쪽을 돌아보았다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형, 그런데 저기… 사람들이 나와서 이쪽을 보면서 뭐라고 하고 있는데요?”

“뭐?”

가케인도 자리에서 곧장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지미의 말대로 하루 종일 마을을 돌아다니며 각자 할 일을 하던 하르탄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성 주변에 모여 손가락질을 하며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가케인은 그들의 시선이 성이 아니라 그 너머의 무언가를 향하고 있음을 깨닫고 순간 묘한 기분을 느꼈다.

‘설마?’

그 순간 그들이 머물고 있는 방문을 누군가 거세게 두드렸다.

“안에 계십니까?”

“무슨 일입니까.”

“뒷산. 뒷산 쪽에서 큰불이 났어요! 데브란이 일으켰던 것과 비슷한 불이에요!”

문을 두들긴 이는 젊은 하인이었다. 그의 공포에 질린 얼굴을 보며 가케인은 빠르게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들이 있던 방 창문 쪽에서는 마을 전경이 내려다 보여 성 반대쪽 뒤편에 있는 산은 볼 수가 없었는데, 복도로 나가 반대쪽 창을 보니 정말로 거대한 불기둥이 산에서 치솟고 있었다.

성에서 일하는 하녀와 하인들이 모두 모여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을 보며 가케인은 그들 중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

“저 불이 언제부터 올라왔습니까?”

“바, 방금요.”

“자카일 님께서는 지금 어디 계시죠?”

“경비대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셨어요!”

자카일이 경비대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는 것은 그도 이 상황을 예상치는 못했다는 뜻이리라. 가케인은 알겠다고 말한 뒤 저를 따라온 지미를 돌아보았다.

“지미. 가자.”

“저 불, 유더 형의 신호일까요?”

지미가 다른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모르지. 하지만 뭔가 일이 생긴 건 분명해. 연습용 검은 챙겼지?”

“네.”

지미가 굳은 얼굴로 허리에 찬 작은 연습용 검을 들어 보였다.

“좋아. 이리로 와.”

가케인은 지미를 한 손으로 번쩍 들어 안은 뒤 그림자 분신을 불러냈다. 발밑에서 쑥 하고 일어난 검은 그림자를 본 하인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괴물이야!”

“괴물이라니. 너무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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