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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88화 (88/805)

88화

순식간에 지옥까지 떨어졌다 겨우 살아난 얼굴로 키올레가 유더를 노려보았다. 물론 그 눈빛은 유더의 마주 바라보는 새카만 시선 앞에서 이내 찬바람 앞의 작은 불꽃처럼 사그라지고 말았다.

“인정, 사과, 그리고 뭐든지 하겠다는 선언. 3가지 모두 지금까지 한 말 중 제일 나아. 나쁘지 않은 설득이야.”

유더의 말에 키올레가 약간 희망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유더는 이내 서늘한 얼굴로 반문했다.

“그런데 뭘 믿고?”

“뭐?”

“말이라면 누구든 할 수 있어. 내가 그 말의 진실성을 어떻게 믿지? 여기서 나가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잡아떼면 그만인데.”

“빌어먹을. 그러면 뭘 어, 쩌란 거냐. 여기서 기사의 맹세라도 하란 거냐?”

“맹세 정도로는 약하지.”

“그럼 뭘 어쩌자는 거야.”

대체 무얼 하겠다는 것인지 조금도 예상치 못하고 있는 키올레의 찌푸린 얼굴을 보며 유더는 입술 끝을 올려 빙긋 웃었다.

“좋아. 확실하게 네 설득을 믿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올 테니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뭐? 잠깐. 날 풀어주는 게 먼저잖아!”

화들짝 놀란 키올레가 필사적으로 유더의 옷자락을 쥐고 잡아당기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유더는 그의 손을 어렵지 않게 빠져나가며 자리에서 일어나 옷자락을 털었다.

“잠깐이면 돼. 그사이에 죽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입 다물고 있어.”

“뭐라고? 안돼. 구해 준다고 했잖아! 잠깐! 이봐! 어딜 가려는 거야!”

기가 죽었어도 역시 키올레는 키올레였다. 유더는 돌아서려던 것을 멈추고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먼저 소리친 주제에 정작 키올레는 유더가 다가오자 찔끔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겁내긴.’

유더는 그의 목에 걸려 있던 재갈을 잡고 도로 위로 끌어올렸다.

“읍-!!”

눈을 부릅뜬 키올레가 발버둥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온갖 굴욕을 겪고 겨우 살아날 방안을 찾은 줄 알았는데 또다시 지옥으로 굴러떨어졌다 싶을 테니 그 필사적인 모습도 이해는 갔다.

‘하지만 사람 말을 믿을 줄도 알아야지.’

“뭐든 하겠다고 했으면 일단 얌전히 기다리는 법부터 익혀.”

“으으으읍! 으으!”

“간다.”

유더는 키올레가 갇힌 감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뒤를 이어 나한과 작은 소년이 빠져나오기를 기다린 뒤 도로 문을 닫고 잠가 버렸다. 키올레가 안에서 무어라 억눌린 소리를 내는 것이 들렸지만 그것을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저자는 아마 절대로 약속을 지키지 않을 거야.”

나한이 무표정한 얼굴로 싸늘한 말을 내뱉었다.

“나도 알아.”

“그런데 어떻게 지키게 하려고?”

“말했잖아. 방법을 찾으러 다녀올 거라고.”

유더는 가볍게 대꾸하며 성큼성큼 나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쓰러져 있는 능력자 3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올 때는 상처 하나 없이 깔끔하게 돌만 던져 기절시켰었는데, 현재 그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만신창이였다. 누가 그랬는지는 뻔했다.

‘데브란과 다른 이들을 어지간히 괴롭혔던 모양이군.’

유더는 그들을 바람의 힘으로 들어 올려 열려 있는 감옥 중 아무 곳에나 분산하여 집어넣은 뒤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한 곳은 아까 들어오던 중 보았던 갈림길이었다.

아까는 감옥이 있는 곳으로 향했지만,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가야 했다. 그곳에 오늘의 마지막 목표가 있을 터였다.

“…아하.”

유더의 뒤를 따르던 나한이 그제야 무언가를 짐작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거기엔 방법이 있겠어.”

얼마 지나지 않아 곧 길이 점점 넓어지며 안쪽에서 작은 목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들려오는 목소리들의 침착함으로 미루어보아, 그들은 밖에서 무슨 상황이 일어났는지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데브란과 죄수들이 나가면서 마주친 놈들을 잘 정리했단 뜻이지.’

소리 없이 다가오는 불행의 그림자를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이들을 향해 유더는 망설임 없이 나아갔다.

* * *

“……늦네.”

“네?”

“뭐야. 벌써 일어났어, 지미?”

유더의 지시대로 성으로 돌아온 뒤, 침대에 누운 지미 곁에 앉아 줄곧 창밖을 보고 있던 가케인이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잠든 아이가 듣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 내뱉은 혼잣말이었는데 답이 들려오는 바람에 괜스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 나 때문에 깬 건 아니지?”

“아니요. 후아암……. 깊이 잤더니 금방 깼어요. 그런데 뭐가 늦다는 거예요?”

자기 전에는 약간 미열이 있었던 탓에 붉게 상기되어 있었던 소년의 뺨은 잘 자고 일어난 덕인지 평소의 깨끗한 피부색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제2성 발현을 앞둔 이들이 흘리는 기이한 향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혹시 몰랐기에 가케인은 지미의 이마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떼었다. 역시나 열은 없었다.

“음… 아니. 유더가 내 생각보다 늦는 것 같아서.”

“유더 형요?”

잠에서 막 깬 기색이 역력한 지미가 졸음이 다 떨어지지 않은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침대 옆에 있는 커다란 창문 밖으로 점점 기울어져 가는 해가 보였다. 주홍빛 노을은 아름다웠지만, 그 아래 있는 검게 탄 건물들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하기가 어려웠다.

지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가케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게요… 해가 지기 전엔 오실 줄 알았는데. 그래도 유더 형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면 약속한 것처럼 신호를 보내 주셨겠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형.”

제법 냉정하고도 의젓한 태도로 위로를 건네는 지미를 보며 가케인은 다시 한번 멋쩍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야지. 어쨌든 네가 깨어나서 다행이다. 사실 슬슬 바깥을 살피러 가려고 했거든.”

“바깥… 아. 그 자카일이란 사람을 살피러요?”

“응. 아까 네가 자고 있을 때 물을 가져온단 핑계로 잠깐 나가서 분위기를 살폈었는데, 자카일이 성에 없는 것 같더라고.”

“없었다니. 그럼 어디에 간 거예요?”

“그것까진 몰라. 지금은 돌아왔을지도 모르니 나가서 다시 보려고.”

“우와. 저도 갈래요.”

지미가 눈을 빛내며 침대 밖으로 내려오려 했다. 가케인은 손을 뻗어 소년의 동그란 머리를 꾹 눌러 제자리에 앉히면서 고개를 저었다.

“넌 안 돼.”

“왜요!”

“지금 이 성 사람들은 네가 장거리 여행으로 인해 몸이 좋지 않아서 누워 있는 상태라고 알고 있거든. 내가 널 돌보면서 필요한 물이나 수건 같은 걸 가지러 나가는 척하는 게 가장 의심받지 않고 바깥을 살피기 좋아.”

가케인의 타당한 답변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지미가 아쉬운 얼굴로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그러면 얼른 다녀오세요. 전 여기 있을 테니까.”

“그래. 하지만 바깥을 살피는 일도 중요하니까 내가 돌아올 때까지는 네가 계속 보고 있어 줘야 해. 혹시라도 유더가 불꽃이나 다른 신호를 쏘아 올리는 게 보이면 곧장 내게 달려오고.”

“알겠어요.”

곧바로 단호한 표정을 짓고 고개를 끄덕이는 지미를 보며 가케인은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났다. 지미는 또래보다 훨씬 상황 판단이 냉정하고 똑똑하니 어련히 알아서 잘 할 것이다. 이제 그는 그의 일을 해야 했다.

가케인이 방 밖으로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복도 맞은편에서 저들끼리 수군대며 이야기하고 있는 하녀들이 나타났다.

그녀들은 이 성에 방문한 불청객을 꺼려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가케인은 조금도 그런 태도에 기분 나빠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인사하며 먼저 다가섰다.

“안녕하세요. 혹시 수건 좀 얻을 수 있을까요?”

“수건요? 그건 왜 물으시는지요?”

나이 든 하녀가 의심의 눈초리로 물었다.

“우리 일행 중 꼬맹이의 상태가 좀 안 좋아서요. 열이 나는데 물수건이 필요하거든요.”

“꼬맹이라면… 당신들과 함께 있던 그 갈색 머리 꼬마 말씀이신가요?”

“맞아요. 불쌍하게도 너무 먼 거리를 급하게 이동하다 보니 무리가 된 모양이에요. 아직 어리니까 어쩔 수 없죠.”

동부 사람들은 각성자를 확실히 싫어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들의 경계심을 사기에 지미는 아직 많이 어린 아이였다.

지미만 한 아들이 있을 연배의 하녀들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동정의 눈빛을 교환했다. 날이 서 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모든 것이 가케인이 바랐던 바였다.

“제가 가지고 올 테니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세요.”

“고마워요. 정말 친절하시군요.”

거기다 화려한 미모를 지닌 젊은 미남이 웃는 얼굴로 사근사근하게 말을 거는 것을 싫어할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가케인은 제 외모가 사람들의 호감을 사기에 좋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것을 십분 이용하여 하녀들의 경계심을 풀었다.

덕분에 수건을 가져온 하녀가 돌아왔을 때쯤에는 이미 그들에게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대부분 자연스럽게 손에 넣은 뒤였다.

“지미. 다녀왔어. 별일 없었지?”

“네. 자카일은 돌아왔다고 하던가요?”

멀쩡한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지미가 재빨리 몸을 돌렸다. 가케인은 하녀들에게 얻은 새 수건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갔다가 1시간도 안 되어 금방 돌아왔다고 해.”

“그럼 그냥 마을 사람 중 누군가를 만나고 온 것 아니에요?”

“그건 아냐. 자카일은 1년 전부터 때때로 혼자 성 밖에 나갔다 돌아오고는 했다더군. 그런데 그렇게 나가서 그가 만난 이들이 좀 수상해. 이 근방에서는 본 적이 없는 낯선 사냥꾼들과 만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어 전 영주가 내심 걱정이 많았던 모양이야.”

“사냥꾼이라면…….”

“그들의 정체까지는 몰라. 하지만 더 괜찮은 정보도 하나 들었어.”

“뭔데요?”

“데브란의 누이동생이 자카일의 형과 깊은 관계였다고 하는데, 그 사실을 얼마 전 자카일이 죽은 영주에게 알려주었다고 하더라고. 영주는 화가 나서 데브란의 동생을 성에 가뒀고, 이후 휴가를 나온 데브란이 이곳에 찾아왔었던 모양이야.”

마을을 돌아다니면서는 얻지 못했던 깊은 정보를 순식간에 줄줄 뱉어내는 가케인을 보며 지미가 놀란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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