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나는 단장님의 명을 받아 실종된 우리 단원을 구하기 위해 이곳까지 왔어. 그리고 이제 막 그 명령을 거의 해결한 참이지. 그게 마병단 단장 보좌인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너는?”
“…….”
“부하를 지키지 못하고, 제 목숨도 위기에 빠트리고, 상황 판단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사적인 분노에 눈이 멀어 또다시 앞뒤 보지 않고 내게 달려드는 게 네가 할 일인가? 고귀한 귀족이라면서 그 정도밖에 생각을 못 해? 이 상황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 앞으로 뭘 해야 할지보다 날 쓰러트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대체 머리통은 뭐 하러 달고 있는 거냐.”
“뭐…어……?”
키올레의 눈동자와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귀족이든, 평민이든 죽으면 끝이야. 찌르면 똑같이 붉은 피가 나오지. 그까짓 혈통이 여기서 얼마나 중요할 것 같아?”
“너…….”
드디어 키올레가 무언가를 알아들은 것처럼 무어라 소리치려던 말을 삼키고 입을 다물었다.
“날 구해 줄 생각이 없었구나. 그래… 그래서 날 마지막까지 내버려 둔 거였어……. 내게 복수하려고…….”
‘내가 네게 복수 따윌 해서 뭘 하겠냐.’
하지만 겁을 먹은 모습은 나쁘지 않았다. 유더는 그의 착각을 굳이 정정해 주지 않고 시선을 똑바로 한 채 싸늘히 입을 열었다.
“내가 왜 널 구해 줘야 하는지, 그 이유를 내게 납득시켜. 그러지 못한다면 넌 여기서 죽는다, 키올레.”
“납, 득? 내가, 널?”
눈을 부릅뜬 키올레가 멍청한 얼굴로 반문했다.
“그래.”
“그러면 날, 안 죽일 건가? 정말로?”
“제대로 설득한다면.”
“하……. 하하.”
농담이 아닐까. 그러한 뜻을 담은 눈동자가 유더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미동 없이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본 그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저 녀석은 지금껏 사느냐, 죽느냐를 두고 고민해 본 적 따위 없었겠지.’
설마 이 상황에서조차 유더를 설득하는 짓을 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말할 만큼 멍청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라 믿고 싶었다.
유더는 키올레의 표정이 재미있을 정도로 다양하게 변하는 것을 죽 지켜보았다. 의심과 혼란, 실낱같은 희망과 그 속에서 발버둥 치는 자존심이란 이름의 아집, 분노와 고통,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서서히 무너지고 남겨진 단 하나의 감정까지.
“…여기서 날 나가게 해 주면, 그래. 아버지께서… 네게 보상을 줄 거야.”
마침내 키올레가 입을 열어 말한 첫마디는 유더의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 발언이었다.
“기각.”
“왜?”
고개를 젓자마자 키올레가 분노로 붉어진 얼굴로 버럭 소리쳤다.
“필요 없으니까. 다음.”
“필요가 없어? 디아카 가문이라고! 무려 디아카의 보상이란 말이야! 너 같은 평민들은 돈이면 껌벅 죽잖아! 뭐가 더 필요하단 거야? 보물? 보석이면 되는 건가? 아니면 검? 명마를 원해? ”
“돈이든 보석이든 보물이든 난 관심 없어. 물질적인 건 일절 필요 없으니까 다른 걸로 설득해.”
“젠장! 그러면… 지위. 지위를 줄게. 그, 황궁기사단 정기사 자리 정도면 되겠어?”
“기각.”
몇 년 뒤에는 유명무실한 단체가 될 황궁기사단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다고. 유더는 두 번 들을 것도 없이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키올레의 얼굴 위로 분노와 고민이 뒤섞여 일렁거렸다.
“…아, 좋아. 그럼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널 마병단 단장으로 올려 달라고 할게. 이건 바로는 안 되겠지만 이 정도면 너도 만족하겠지.”
마병단 단장이라니. 유더는 순간 실소할 뻔했다. 일단 지금껏 키올레가 내민 것 중 가장 끔찍한 제안인 것은 둘째치고, 디아카 공작가의 후계자는커녕 수많은 자식 중 하나일 뿐인 자가 마병단 단장 자리를 그리 쉽게 입에 올린 것이 어이가 없었다.
‘디아카 가에서 마병단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 만하군.’
유더는 키시아르가 이 자리에 없어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차갑게 대꾸했다.
“그런 건 됐다고 몇 번을 말해야 하지? 지위와 관련된 것도 이제부턴 빼.”
“빌어먹을 놈 같으니, 그거 말고 대체 뭘 더 달란 거야!”
“꼭 무언가를 주지 않고는 남을 설득할 수 없는 거냐, 넌? 게다가 네가 말한 것 중 스스로 가진 힘으로 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잖아. 그딴 건 설득이라고 하지 않아.”
그 순간,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말을 들은 듯한 키올레의 표정이라니.
“내가 요구한 건 네가 여기서 살아나가야 할 이유를 말하라는 것이었어. 필요도 없는 돈이나 지위 따위가 아니라. 그 간단한 것조차 제시하지 못하는 네가 죽은 이보다 정말 더 대단하다고 생각하나?”
키올레의 죽은 부하는 적어도 제가 살기 위해 적 앞에서 무릎을 꿇을 줄 알았다. 물론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그 대가로 죽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그런 그가 지금의 키올레보다는 나았다.
“…….”
“여기에 있는 이들이 널 살려 둔 이유는 네가 대단해서가 아니고, 그저 네 가문에 대한 정보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야. 그걸 빼고 네가 살아야 할 이유는 현재 전혀 없다는 뜻이지. 어차피 죽을 널 내가 왜 힘들여 구해 줘야 할까. 너라면 널 모욕하고 귀찮게 달려드는 녀석을 구해 주고 싶겠어?”
유더는 머리를 한 대 맞은 양 얼빠진 얼굴로 입을 벌린 채 숨을 씨근대는 키올레를 보았다. 누구도 그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디아카 가문의 아들이란 이유만으로 누구보다 먼저 귀한 취급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게 당연하지 않다는 걸 스스로 말하게 해 주마.’
어차피 키올레는 여기서 살려 내보내야 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 정도쯤은 바꾸어 두어야 살려줄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뒷일을 위해서도 이 정도 수고는 들여야 했다.
“하, 지만, 다른 죄수들은. 그들은 그냥 구해줬잖아……. 왜 나만…….”
유더의 싸늘한 시선 속에서 정말로 제 신분이나 능력은 현재 이 상황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확신했는지, 키올레의 목소리가 한층 작아졌다. 그는 난생처음 자신의 근본부터 부정당하는 기분을 맛보는 중이었다.
자신을 욕하고 좋지 않게 보는 이들은 여태 수도 없이 많이 보았지만, 그들은 결국 디아카라는 이름과 귀족이라는 신분만은 무시하지 못했다.
신분과 권력은 키올레 다 디아카를 지탱해 준 가장 단단한 갑옷이었다. 그러나 그 갑옷이 사라진 현재, 키올레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와 허탈함에 사로잡혔다.
“단지 능력을 각성했다는 이유만으로 아무 죄 없이 갇힌 선량한 제국민들이니 당연히 구해 줘야지.”
“그럼 내가… 그 평민들보다 못하다는 거냐?”
“못해.”
유더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두 번이나 내게 졌음에도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계속 의미 없는 검을 겨누려 하는 너와 고마움을 아는 그들이 어떻게 같겠어? 짐승도 저보다 강한 상대에겐 알아서 꼬리를 내려. 너와는 다르게 말이야.”
“지, 금, 나를 감히, 짐승…….”
키올레가 충격으로 새하얗게 질린 채 말을 더듬거렸다. 표정을 보아하니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기절이라도 할 듯했다.
“돼, 됐어. 네놈이 구해 주지 않아도 상관없어. 어차피 그놈들은 날 죽이지 못할 거야. 조금만 기다리면 반드시 아버지께서 날 구하러 오실 테니까!”
“과연 그럴까.”
나직한 목소리에 키올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네가 사라졌다는 건 현재 아무도 몰라. 훈련을 온 다른 기사들도 널 찾으러 오지 않고 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떻게 알겠어? 여기 있는 놈들이 널 죽이고 묻어두기엔 충분한 시간이지.”
“뭐…….”
“네가 죽어도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다 키올레. 후계자도 아닌 자식 한 명이 훈련 도중 사고로 사망하는 건 놀랍지도 않은 일일 테니까. 설령 범인이 밝혀지더라도 공작가끼리는 물 위에서 서로 반목하지 않으니 그대로 묻히겠지. 그냥 그 정도야.”
너는, 그저 그 정도.
“아…….”
차가운 선언에 키올레의 헐떡이던 숨이 그대로 멈추었다. 아무리 멍청해도 그도 공작가의 일원이니 유더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깨달았으리라. 맞는 말이니 반박할 수 없겠지.
화를 내지 못하는 것을 보니 드디어 제 눈앞에 있는 진짜 현실을 깨우친 모양이었다. 유더는 키올레의 표정을 보며 드디어 그 끝을 모르던 고집의 뿌리를 약간 꺾었음을 느꼈다.
“뭐, 그래도 죽겠다면야 말리진 않겠다. 대화는 여기까진가?”
“…….”
“좋아. 더 할 말은 없는 듯하니…….”
“…잠, 잠깐.”
키올레가 다급히 유더를 불렀다.
“알, 겠어. 네가, 나보다 강해. 인정… 인정하겠어. 사, 사과도 하겠다.”
막 몸을 돌리려던 유더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키올레는 조금이라도 그를 붙잡기 위해 최대한 몸을 꿈틀거리며 고개를 들려 노력했다.
“평민이라고 불렀던 게 화가 났던 거라면, 그것도 철회하겠어. 여기서 나가게 해 준다면… 두 번 다시 네게 결투를 신청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그 외에도 네가 시킨다면,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는 뭐든 할 테니까!”
밧줄에 묶인 손이 유더의 제복 자락을 꽉 붙잡았다.
“그러니까 구, 구해 줘. 난 여기서 죽고 싶지 않아…….”
드디어 원하던 답이 나왔다.
그러나 유더는 그것을 얼굴로 드러내지 않으며 천천히 몸을 숙여 앉았다.
“뭐든지 하겠다고?”
“그, 그래.”
“내가 가문과 기사단을 배신하는 행위를 하라 말해도?”
“…….”
그 순간 키올레의 눈동자가 얼어붙었다.
‘허, 참. 겁먹기는. 정말 애송이군.’
유더는 그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럴 생각까진 없어. 넌 그 정도 능력이 안 되는 인물이니까.”
“너, 너 이 자식……. 날 가지고 노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