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85화 (85/805)
  • 85화

    “고마워……. 고마워 유더.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을 거야.”

    “감사해요. 정말로 감사해요.”

    유더는 울먹이며 연신 감사의 인사를 하는 남매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조금만 더 늦었어도 데브란의 가족은 이미 죽고, 데브란 본인은 수도로 끌려갔을지도 몰랐다.

    “벌써 인사하는 건 됐어. 그런 건 여길 안전하게 빠져나간 뒤 하르탄 영주 성안에 있을 가케인, 지미와 합류하고 나서 해.”

    “가케인과 지미? 그 둘도 왔어?”

    “그래. 하지만 영주 성안에 있으니 들어가서 접선하는 건 힘들 거야. 들어가지 말고 마을 바깥에서 크게 능력을 써. 성에서도 보일 만큼 큰 불을 피우면 가케인이 알아보고 와줄 거야.”

    물론 가케인은 그 불을 피운 사람이 유더인 줄 알고 오겠지만, 아니라는 것을 곧 알게 되겠지. 유더는 가케인 정도의 판단력이라면 어렵지 않게 모두를 안전하게 데리고 대피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기로 했다.

    어쨌든 그는 1주일의 휴가 기간 동안 한숨도 놀지 않고 죽을 만큼 훈련을 거친 정예가 아닌가. 현재 마병단 내에서 가케인보다 훌륭하게 그 임무를 수행해 낼 만한 사람은 없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었다.

    “아… 알겠어.”

    “우리도 도울게요.”

    데브란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로를 의지해 서 있던 다른 죄수들이 서로 손을 들어 용기 있는 발언을 했다. 그들 중 오래 갇혀 있던 이는 벌써 3달이 넘게 이곳에 있었다고 말했다.

    상처투성이에 뼈가 불거질 만큼 마른 사람들의 물기 어린 눈동자에 일제히 희망과 고마움이 실린 것을 보니 기분이 약간 이상해졌다.

    이전 생에서는 이렇게 사람을 구하거나 살리는 임무를 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 새삼스레 생각났기 때문일까. 아니면…….

    “무슨 능력들을 가졌습니까?”

    유더는 그 근질근질한 부담감을 씻어내기 위해 빠르게 그들에게 질문을 했다. 대부분은 신체 강화 능력자들이었고, 데브란과 같은 소수의 속성 능력자도 있었다. 유더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속성 능력자와 일반인을 가운데 두고, 나머지가 빙 둘러 보호하는 형태로 이동하세요. 동굴 밖으로 나가는 동안 사람을 꽤 여러 명 만났지만 그 중 각성자는 없었으니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겁니다. 밖으로 나가면 무슨 일이 있어도 되돌아오지 말고 무조건 하르탄 영지로 가서 제 일행과 합류하십시오.”

    합류 이후에는 최대한 하르탄 영지를 빨리 떠나라고도 말했다. 거기에는 자카일 하르탄이 있으니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될 곳이었다.

    “그러면 너는 어떻게 하려고 유더?”

    “난 그 관리관이란 놈을 만나고 나서 따라갈 거야.”

    “괜찮겠어? 혼자서 어떻게…….”

    “여기까지도 혼자서 왔지만 멀쩡했어.”

    정확히 말하자면 완전히 혼자서는 아니고, 나한이라는 불청객과 함께였지만 굳이 그 말은 하지 않았다. 데브란은 순간적으로 걱정해야 하는지, 아니면 재수 없어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눈빛을 지었으나 이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넌 강하니까 괜찮겠지. 그놈들이 머무는 곳에 마법사도 늘 한 명 있으니까 조심해야 해. 고문은 검을 쓰는 놈들이 하는데, 실력이 만만치 않아.”

    마법사도 한 명 이상 있을지 모른다는 정보는 유용했으므로 머릿속에 잘 박아두었다.

    “가기 전에, 잠깐만. 거기. 데르밀라…라고 했던가요.”

    “네.”

    유더는 데브란과 말을 끝낸 뒤 그의 여동생을 낮게 부르며 가까이 와 달라는 뜻으로 손짓을 했다.

    데브란이 마병단에 와 있는 동안에도 하르탄에서 시간은 줄곧 흘렀다. 오랫동안 자카일 하르탄의 형과 비밀스러운 관계를 유지해 왔다는 그녀라면 무언가 정보를 더 알고 있을 요지가 컸다.

    “자카일 하르탄이 모든 일의 원인 제공자 같은데, 혹 뭔가 알고 있는 것 없습니까.”

    “자카일 도련님이요?”

    데르밀라는 예상보다 훨씬 똑똑한 눈동자를 지닌 데다 몹시 심지가 굳은 성격이었다. 그녀는 그 말만 듣고도 곧바로 그간 그들에게 있었을 일을 대충 추측해낸 듯 입을 벌렸다.

    “세상에. 그러면 설마 그 도련님이 하르탄을 노리고……?”

    “아마도.”

    “역시 그랬군요. 아아. 어쩐지……. 전 절대로 제클리스 님이 절 버린 게 아닐 거라 믿었어요. 제클리스 님은 가족들 모두 욕심이 너무 많아서 답답하다고 늘 말씀하셨거든요. 영주님은 제클리스 님을 강제로 다른 마을 귀족과 혼인을 시켜 조금이라도 혼맥을 많이 만들고 싶어 하셨죠. 그리고 자카일 도련님은 노력 없이 얻고만 싶어 한다고도…….”

    노력 없이 얻고만 싶어 한다. 딱 지금의 자카일과 맞는 상황이 아닌가. 유더는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었다.

    “사람 보는 눈은 괜찮은 분 같군요.”

    “맞아요. 귀족이시지만 정말 진실하고 멋진 분이에요.”

    하지만 그런 그도 결국 자카일의 농간에 속아 기사단으로 돌아가지 않았던가. 다시 돌아오겠다고 한 것을 보면 그도 연인의 죽음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던 모양이지만, 기사단에 묶인 바쁜 몸이 매일 영지 안에서 음모만 꾸미는 동생을 파악하기란 어려웠으리라.

    “사실 그분은 지금 당신 가족이 죽은 줄 알고 있을 확률이 큽니다.”

    유더는 마을 사람들은 데브란이 가족을 죽이고 집을 태운 뒤 마을 반을 방화하고 나서 감옥에 갇혀 자살한 것으로 알고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혹시라도 세 가족이 마음이 약해져 마을 사람들에게 얼굴을 비추는 일은 막아야 했다.

    “신경은 좀 쓰이겠지만 이곳을 완전히 벗어나 안전한 수도로 들어가고 나면 오빠를 통해 연락해요.”

    “그럴게요. 아, 그러고 보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데르밀라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한 듯 퍼뜩 시선을 돌렸다.

    “몇 년 전에 제클리스 님이 제게 미안한 얼굴로 사과를 한 적이 있었어요. 기사단에서 기반을 새로 쌓고 나면 저와 결혼해 이곳을 영영 떠나려 하셨던 계획을 어쩌다 보니 동생에게 들키고 말았다고……. 하지만 어차피 두 분 모두 영지나 작위를 상속받으실 수는 없는 위치이시니 그 정도는 충분히 비밀로 해 주실 거라고도 말씀했어요. 저는 그 이후 그 말을 잊었는데 어쩌면…….”

    그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정보는 아니었으나 동기로서는 충분해 보였다.

    위에 경쟁자가 둘이나 있는 것과, 하나밖에 없는 건 상대할 기분이 다르지 않겠는가. 자카일 하르탄은 어쩌면 그때부터 혹시나 하는 꿈을 꾸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카일 님은 다니던 학교를 중간에 그만두고 1년 전 돌아오신 뒤, 계속 주변 마을을 아무 이유 없이 돌아다니셔서 영주님의 걱정거리라는 소문이 많았어요.”

    “1년 전이라… 돌아온 뒤 각성자들과 관련해서는 뭔가 이상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말입니까.”

    “이상했죠. 솔직히… 오빠가 그렇게 도망치듯이 수도로 간 것도 모두 그분이 오빠를 너무 적대적으로 대하신 탓이라 생각했어요. 그분은 각성해서 힘을 얻은 사람들을 유난히도 싫어하셨거든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데르밀라, 절대로 마을 안으로 돌아가지 않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건 불에 탄 당신 집에서 주운 건데 필요하다면 돌려드리죠.”

    살아 있는 데브란의 가족을 찾았으니 이제 그의 집에서 주운 이중브로치는 효용을 다했다. 유더가 품에서 이중브로치를 꺼내 보여주자 데르밀라가 입을 크게 벌렸다.

    “그, 그건.”

    유더는 조용히 가져가라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저었다. 데르밀라는 감격한 얼굴로 유더의 손에서 브로치를 소중히 받아갔다. 유더는 여동생의 기쁨에 찬 표정을 본 데브란이 심각하게 부담스러운 표정으로 저를 보는 것을 보며 잠시 너무 빨리 돌려주었나 후회할 뻔했다.

    “그럼 이제 갈 사람은 어서 가십시오. 알려드린 주의사항은 모두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유더는 데브란에게 가케인과 지미를 만나면 해야 할 일들도 몇 가지 귓속말로 일러주었다. 그중에는 옆 마을로 가서 공공 전서구를 쓸 수 있게 되는 대로 현재까지의 상황을 키시아르에게 전달하라는 말 또한 들어있었다.

    갇혀 있던 죄수들은 자신들이 갇혀 있는 동안 알게 된 정보들을 최대한 짜내어 유더에게 알려준 뒤 비틀대는 발걸음으로 서둘러 동굴 바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억!… 어억!”

    “끄윽!”

    ‘아 맞다. 나가는 길에 기절한 3명에 대해 말하는 걸 잊었군.’

    유더는 데브란과 갇혀 있던 사람들이 사라진 지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들려오는 억눌린 비명을 들으며 그가 미처 잊고 말하지 못했던 작은 사항을 떠올렸다.

    몸에 붙어 있던 폭탄을 떼어내고 자유를 얻은 각성자들은 성치 않은 몸으로도 의지가 철철 넘쳐흘렀다.

    사실 그렇게 강한 의지를 발할 수 있을 때일수록 각성자가 내는 능력은 더욱 강한 힘을 발휘한다. 유더는 그들의 건강 상태와 상관없이 탈출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생각지 않았다.

    ‘자 그럼 이제 남은 건 키올레 다 디아카 한 명과…….’

    유더는 여태 조용히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있던 나한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환상으로 숨긴 한 명, 이제 내보내.”

    “들켰군.”

    “그 녀석이 네가 찾던 동료겠지.”

    유더는 나한이 감옥에서 데리고 나온 이들의 기척과 실제 눈에 보이는 사람 수가 정확히 1명분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후 그는 내내 지나치게 조용하게 무언가를 숨기듯 서 있었다.

    “그래, 맞아.”

    유더의 말에 긍정한 나한이 손가락을 움직이자 그의 곁에 있던 어두운 동굴 벽이 한 꺼풀 벗겨지며 소년 한 사람이 창백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유더는 나한이 숨긴 이가 그렇게 어렸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소년의 나이는 지미와 거의 비슷해 보였다. 갇혀 있던 이들 중 단연 최연소자였다.

    “…저렇게 어린 녀석에게 너희 산적들이 모두 먹을 식량과 물품 구매를 시켰다고?”

    “의심할 필요는 없어. 이 작은 형제는 그런 일에 최적화된 능력을 지녔거든.”

    쓰레기를 보는 듯한 유더의 눈빛에 나한이 서늘한 얼굴로 웃으며 대꾸했다.

    “무슨 능력인데.”

    “친구를 만드는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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