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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84화 (84/805)

84화

그것을 깨닫자 그들은 방법을 바꾸었다. 아버지와 여동생의 목숨을 미끼로 회유도 했고, 뼈가 부러지지 않는 선에서 가혹한 고문도 가했다.

또한 능력을 쓰지 못하도록 불을 감지하면 곧바로 폭발하는 마법을 건 폭탄을 몸에 붙여 두었기에 아무 짓도 할 수 없었다.

데브란에게는 그저 제가 마병단으로 돌아가지 않아 그쪽에서 이상을 깨닫기를 바라는 것만이 희망일 뿐이었다.

가족은 소중했지만, 마병단을 배신하는 것도 그만큼 싫었다. 놀랍게도 마병단에 들어간 지 고작 몇 달 만에 그의 마음은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단단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 정말로 그의 앞에 단장이 보낸 희망이 나타났다.

데브란은 눈앞의 검은 머리 사내가 330명의 마병단원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녔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왔다는 것이 키시아르 단장이 자신에게 보여 준 믿음과 구원으로 느껴져 눈물이 났다. 그의 인내와 믿음은 헛되지 않은 것이다.

“가족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이라……. 살아 있는 걸 보여줬나?”

“아니. 하지만 목소리는 들려줬어. 내가 있는 곳 밖에서….”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는 유더 아일의 눈빛은 몹시 냉정했으며, 데브란을 동정하거나 경멸하지 않았다.

이전에는 그 냉정함을 먼발치에서 보며 실력이 뛰어나서 그런지 좀 재수 없어 보인다고 몰래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그 태도가 그리도 든든할 수가 없었다.

“불이 나던 날, 불을 지른 진짜 범인이 누구인지는 봤어?”

“못 봤어. 하지만 누구인지는 알아.”

“누군데?”

유더 아일이 차갑게 물었다.

“관리관이라는 놈의 부하들이야. 하나는 바람을, 하나는 불을 써서 조정하느라 힘들었다고 말했었어…….”

“그 말을 들으니 나도 누군지 알 것 같군.”

유더는 키올레 다 디아카와 싸우던 관리관의 각성자 부하들이 쓰던 능력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중 불을 쓰는 이와 바람을 쓰는 이가 한 명씩 있었는데, 사실 지금은 돌에 맞아 바깥에 쓰러져 있는 중이었다.

‘그건 아무래도 좋아. 자카일 하르탄이 생각 외로 음험한 놈이었다는 게 좀 놀라울 뿐.’

유더는 자카일 하르탄에게 꿍꿍이가 있어 보인다는 정도까지는 파악했었으나, 이 사건의 범위가 예상보다 이리 넓을 줄은 몰랐다.

자카일 하르탄. 늙은 하르탄 전 영주의 막내아들. 작위도, 영지도 상속할 수 없는 가장 낮은 서열의 자식이었으나 ‘우연히도’ 영주와 장녀가 죽으며 그의 운명이 바뀌었다.

아버지와 상속자였던 누나가 죽고 바로 손위의 형은 기사단에서 승승장구해 더 좋은 작위를 받을 예정이라 작은 영지에는 관심을 두지 않을 테니, 결과적으로 자카일이 영지를 물려받게 될 것이다. 정말 ‘우연히도’ 말이다.

그런 우연이 세상에 정말 그리 흔히 있을까? 유더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제 그 편견에 다시 한 획을 더했다.

‘동부에서 세력을 늘리고자 했던 아페토 가와 계승서열이 낮은 자카일이 서로 손을 잡고 모든 일을 꾸몄다면 전부 다 잘 이해되지.’

늙은 영주가 작위 상속이라는 중요한 일을 앞두고 갑자기 데브란의 동생을 멀리 보내려 한 건 누군가 하필 그때 그에게 큰 아들과 관련된 정보를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누가 그랬을까. 큰 사건을 일으켜 작위 상속을 막아야만 했던 이가 아니었을까?

자카일은 화재가 나던 날 우연히도 옆 마을에 아버지의 심부름을 가 있느라 상황 판단이 늦어졌다고 말했다. 유더가 아는 한 가장 의심스러운 이가 바로 그런 이들이었다.

키올레와 싸울 때 아페토 가문의 관리관은 자카일이 도와달라고 보고한 일에 대해 몹시 귀찮아했다. 사실 그 말이야말로 유더의 추측이 옳다는 제일 큰 증거나 다름없었다.

‘데브란 본인의 이야기를 들으니 모든 것이 더욱 확실해지는군.’

다만 그들의 실수는, 그 완벽한 증거에 마병단원 데브란 하르투데를 끼워 넣으려 했다는 것이다.

자카일은 제 계획을 위해 희생양으로 쓸 예정이었던 평민 여자의 혈육인 데브란이 갑자기 휴가를 얻어 돌아오니 그를 치워 버리고 싶어 했을 것이고, 아페토 가에서는 키시아르에 대해 알 수 있는 마병단원을 사로잡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으리라.

둘은 이해관계가 잘 맞아 데브란을 함정에 몰아넣고 그를 죽은 것으로 위장했다.

예상대로라면 마병단에서 데브란의 실종을 알아차리더라도 조사단을 파견하기까지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 여겼으리라.

그러나 키시아르가 예상보다 훨씬 빨리 사람을 보냈고 거기에 바로 유더 자신이 포함된 것이 그들의 불행이었다.

아니, 불행이 되도록 만들어줄 예정이었다. 지금부터.

유더는 발치에 엎드린 데브란의 흐느낌을 들으며 차가운 분노를 잘 갈무리했다. 무슨 꼴을 당했든 데브란은 아직 살아 있었다. 사지 또한 멀쩡했고, 여기서 빠져나가면 이 일련의 사건에 대한 증인 또한 되어줄 테니 아주 잘 모셔야만 했다.

“데브란. 놈들이 네게서 정보를 얻어내지 못할 경우, 어떻게 처리하려고 했을 것이라 생각하지?”

유더는 앞으로 할 일을 생각하며 천천히 마지막 질문을 했다. 맞아서 퉁퉁 부은 데브란의 눈빛이 증오와 공포로 어두워졌다.

“…아페토의 본가로 보낼 거라고 했었어. 거기엔 더 실력 있는 고문자들과 마법사들이 있고… 나는 좋은 실험체가 될 거라고….”

말을 잇던 데브란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나.”

“실험체?”

“놈들이 내게 계속 했던 말이야. 실험체라는 말과 함께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저들끼리 자꾸 했었어.”

그렇다는 건, 아페토 가에서 납치한 각성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 뭔가의 실험이란 뜻인가?

‘…그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보긴 했지.’

유더는 이전 생의 기억들을 더듬었다. 각성자가 나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온갖 마법사들과 사제들이 달라붙어 그 힘의 원천과 특이사항을 알아내고자 노력했다.

대부분은 물 위에서 연구를 했지만 물 아래에서 세상에 밝힐 수 없는 방식으로 연구를 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도 했다.

물론 각성자들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며 많은 것이 밝혀지고, 날이 갈수록 변화하는 인구가 더욱 늘어나면서 비인륜적인 짓을 해 가면서까지 연구를 하려 하는 움직임은 점차 둔화되었다.

‘그냥 둔화된 건 아니고… 그때쯤엔 워낙 어지러운 사건이 많았으니까 그 탓도 있겠지만.’

유더는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지웠다. 데브란에게 들을 것은 다 들었으니 이제부터는 움직일 때였다.

“데브란. 일어날 수 있겠어?”

“하, 할 수 있어.”

며칠간 고문을 당했음에도 데브란의 근성은 죽지 않았다. 본디 체격이 크고 뼈대가 굵어서인지 데브란은 후들대면서도 벽을 짚고 일어나 섰다. 유더는 고통의 신음을 이를 악물고 참아내는 데브란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야 마병단답지.’

“지금부터 나가서 다른 방에 갇혀 있는 사람들도 전부 풀어줄 거야. 그 사람들이 어떤 연유로 갇혔는지만 파악하고 너와 함께 내보낼 테니 이곳을 탈출해. 그 과정에서 네 가족들을 찾게 되면 더 좋고, 혹 내가 먼저 찾게 된다면 무조건 보호해 데려가겠다고 약속할 테니 안심해도 좋아. 네 능력은… 아. 폭탄을 붙였다고 했었나. 그건 어디 있지?”

“등… 등에.”

데브란이 허둥지둥 허름한 셔츠 자락을 걷었다. 손이 닿지 않을 만한 교묘한 위치에 작고 검은 마정석 하나가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사실 그것은 무척 저급 마법을 심어 넣은 싸구려 마정석이었기에, 터지는 조건만 충족하지 않는다면 떼는 것이 그리 힘들지 않았다.

유더는 곧바로 마정석을 떼어낸 뒤 그것을 주머니 안에 넣었다. 데브란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안도의 숨을 흘렸다.

“떼어낸… 거지?”

“그래.”

“이렇게 쉽게…….”

“방법만 알면 별 것 아냐. 받아.”

유더는 동굴 밖에서 만나 기절시켰던 놈들의 소지품에서 가져온 단검 하나를 데브란에게 던졌다. 데브란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그것을 쥐었다.

“능력은 쓸 수 있겠어?”

“괜찮아. 나가면서 마주치는 놈들 모두… 가만두지 않겠어.”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도 전혀 기가 죽지 않는 데브란 같은 이가 고작 싸구려 마정석 폭탄 따위를 두려워하며 고문받다니. 이전 생에서는 갓 입단한 신입조차 두려워할 일이 없는 물건이었는데 말이다.

유더는 돌아가면 마법사들이 만들어 낸 그런 싸구려 장난감들을 해체하는 방법도 마병단 훈련 과목으로 넣는 방안을 강력하게 추천하기로 마음먹었다. 키시아르라면 분명 수락하리라.

“가자.”

옥 바깥으로 나간 유더는 모든 옥의 문을 열고 나한과 데브란에게 눈짓을 했다.

“사슬은 내가 전부 해체할 테니 수습해서 여기로 데리고 나오는 건 나눠서 하자.”

이후는 아주 빠르고 신속하게 작업이 이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올레가 갇혀 있는 마지막 감옥을 제외하고 8개의 감옥 안에 갇혀 있던 13명의 죄수와 2명의 침입자가 모두 옥 중간의 작은 공간에 모였다.

갇혀 있던 이들은 대부분 데브란처럼 동부 출신의 각성자로, 아페토 가로 끌려가고 싶지 않다고 반항하여 여태 갇혀 있던 경우가 다수였다.

그리고 데브란에게는 몹시 다행히도, 갇혀 있던 이 중에는 그의 가족도 있었다.

“아버지! 데르밀라!”

“오빠!”

데브란의 여동생은 데브란처럼 목소리를 낼 수 없게끔 목을 조이는 결박 방식으로 묶여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나이가 들어 그 결박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 여겼는지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약을 먹였다는 것도 곧 밝혀졌다.

하지만 그 정도는 살아 있으면 얼마든지 치료할 수 있었다. 데브란은 가족을 끌어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토록 걱정했던 가족이 바로 옆방에 갇혀 있었음에도 서로의 안부조차 확인하지 못한 채 침묵 속에서 고통에 몸부림쳐야만 했을 이들을 보며 유더는 다시 한번 깊이 숨을 내쉬었다.

이토록 철저하게 가두어 두고 죽이지 않은 것은 역시 마병단원 데브란의 가치를 아페토 가에서 그만큼 높이 쳤다는 뜻이다.

왜일까. 그 정도로 마병단과 관련된 정보를 알아내야 할 필요성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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