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데브란 하르투데. 데브란 하르투데가 여기 있나?”
“…….”
목소리가 울려 퍼진 이후에도 감옥은 여전히 조용했다. 심지어는 키올레의 신음조차도 잦아들어 음산한 분위기만 더욱 강해지고 말았다.
“데브란 하르투데. 나는 너를 구하러 온 마병단원이다. 단장님께서 너를 데리고 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 있다면 대답해.”
말을 끝낸 뒤 유더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숫자를 세었다. 100까지 세고 나서도 아무 반응이 없으면 그냥 모든 문을 한꺼번에 다 열어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10까지 세었을 때쯤, 어느 옥 안쪽에서 누군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저, 정말, 로, 마, 병단?”
지독하게 쉰 목소리 속에서 의심과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유더는 목소리가 들린 옥 쪽으로 다가가며 열쇠 꾸러미를 더듬었다.
“데브란. 본인이 맞나?”
문 안에 열쇠를 꽂기 전, 마지막으로 확신을 위해 묻자 옥 안의 검은 그림자가 겨우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목이 졸려 죽어가는 것 같은 쇳소리를 내며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데, 브란, 이다.”
유더는 나한을 돌아보며 가볍게 눈짓을 했다. 이제 환상 능력을 해제해도 좋다는 뜻을 알아들은 남자가 곧바로 살짝 손을 움직여 능력을 해제해 주었다.
유더는 들고 있던 열쇠 꾸러미로 문을 열기 시작했다. 다행히 세 번째 시도에서 철컹거리는 소리가 나며 잠금장치가 열렸다.
옥 안은 아주 좁고 더러웠다. 피와 오물이 낭자해 악취가 풍기는 그곳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유더는 그의 손과 발을 결박한 쇠사슬이 벽 위쪽에 걸린 두 개의 고리를 통과해 목을 조르듯 감싸고 있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그 결박 방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고문당한 손발이 찢길 만큼 고통스럽게 뻗어야만 겨우 목에 묶인 사슬에 힘이 풀리고, 조금이라도 힘을 풀면 그대로 스스로 제 목을 조르는 형태의 결박.
가장 위험한 죄인에게 쓰는 방식 중 하나였다. 이전 생에서 유더 또한 당해 보았기에 저것이 얼마나 악독한 고통을 주는 방식인지 잘 알았다.
저렇게 묶여 있는 죄인은 잠도 제대로 잘 수 없다. 피로에 지쳐 묶인 손발에서 힘을 풀면 그대로 제 목이 졸려 죽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 옥에 갇힌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척만 느껴질 뿐 소리를 내지 못했던 이유도 모두 같은 방식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인가. 유더는 예상보다 참혹한 현장에 미간을 찌푸리며 허리에 찬 연습용 검을 뽑았다.
“부, 불가능. 이 사슬은, 평범한 것이……!”
데브란이 평범한 힘으로는 사슬을 끊을 수 없을 것임을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유더가 뻗은 검 끝에 닿은 사슬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 더 빨랐다.
철크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두 팔이 힘을 잃고 땅에 떨어졌다. 목을 감싼 쇠사슬도 그에 따라 의미를 잃게 되었다. 데브란이 겨우 숨통이 트이는 소리를 내며 억눌린 기침을 마구 토해냈다.
“쿨럭, 쿨럭!”
유더는 안을 좀 더 밝히기 위해 불을 불러냈다. 데브란의 얼굴을 좀 더 확실히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데브란. 내 얼굴이 보이나?”
“보, 보여. 신과의, 유더…….”
데브란은 헐떡이면서도 제대로 유더를 알아보았다는 뜻을 표시했다. 피투성이에 오물로 얼룩진 상태이기는 해도, 어딘가 부러졌거나 영구적으로 손상된 듯 보이지는 않았다. 데브란을 붙잡아 이 꼴로 만들었으나, 적어도 그들이 그를 죽일 생각은 없었음이 확실해졌다.
“그래. 정신은 아직 멀쩡한 모양이니 됐어. 이제 말해 봐. 네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
그 말을 들은 데브란은 몹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본래는 몹시 강건했을 법한 청년의 상처투성이 손이 유더의 옷자락을 꽉 잡았다. 덥수룩한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형형한 갈색 눈 사이로 분노가 일렁거렸다.
“…속았, 어. 나는, 처음부터, 모든 것이 함정이었던 거야…….”
속았다? 누구에게?
유더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데브란과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누구에게?”
“그자들이, 내가 없는 사이, 데르밀라를, 팔아넘기려 했어. 그래서, 나는……!”
“잠깐. 파악하기 힘드니 간결하게 대답해 봐.”
유더는 기침을 토하면서도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무어라 부르짖는 데브란의 어깨를 두드렸다. 냉정한 목소리에 데브란이 잠시 원망하는 눈빛을 보냈으나, 손을 들어 공중에서 작게 물로 만든 공을 띄우자 이내 얌전해졌다.
“일단 물부터 마시고.”
“……고마워.”
유더가 입 안에 넣어 준 물 공을 삼킨 뒤 데브란은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그의 눈빛이 한결 침착해졌다. 유더는 이제야 그가 제대로 된 대화가 가능한 상태가 되었음을 파악하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휴가를 갔던 때부터 시작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래 좋아. 휴가를 받은 뒤, 나는 곧장 고향으로 갔어.”
데브란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그는 휴가를 가기 전 가족들에게 미리 연락하지 않았는데, 그 덕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을 보고 놀라는 마을 사람들의 묘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집에 도착하자 확실해졌다.
‘얘야, 데브란! 영주님께서, 글쎄 데르밀라에게 옆 마을에 가서 결혼하라는 명을 내리셨단다!’
젊은 시절 사고를 당한 탓에 다리 한쪽이 부자유한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데브란에게 매달렸다.
‘결혼해야 할 자는 홀아비에 대장장이인데, 성질이 거칠어 사람을 둘이나 죽였단다! 데르밀라가 싫다 하니 아예 성으로 끌고 가 가두어 버리셨어. 그대로 결혼식 날까지 데리고 있다가 보내 버릴 거라고 하시는데 이를 어쩌면 좋으냐.’
데브란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결국 올 것이 온 것이다.
아버지는 모르는 사실이지만 그의 여동생은 남몰래 영주의 큰아들 제클리스와 사랑에 빠진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제클리스는 평민과의 결혼 따위는 절대 허락해 주지 않을 아버지의 눈을 피해 멀리 있는 기사단에 입단했다.
그곳에서 새로이 기반을 닦은 뒤 데르밀라를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여동생에게 들었을 때 얼마나 속이 터졌었던가.
그래서 데브란은 능력을 각성한 뒤 마을에서 멸시받으면서도 기어이 마병단에 합격했을 때 너무나 기뻤다. 그는 귀족들을 조금도 믿지 않았다. 여건만 되면 가족들을 빨리 빼내 오고 싶을 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제클리스가 영주에게 압박을 넣어 떠나지 못하도록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정도가 그가 예상했던 최악이었는데, 설마 이렇게 빨리 일이 터질 줄은 몰랐다.
휴가를 나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숨이 턱 막혔다.
‘제클리스 님은요? 지금 마을에 안 계신가요?’
‘그분은 왜? 그분이야 당연히 아직 기사단에 계시지…….’
이유는 모르겠으나 영주가 데르밀라를 옆 마을에 악의적으로 보내려 하는 것을 보면 큰아들과 평민 여자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든 들킨 것임에 틀림없었다.
영주가 데르밀라를 그저 치워 버리고 싶은 것뿐이라면 이르긴 하지만 제가 찾아가 가족과 함께 수도로 떠나겠다고 부탁하면 되지 않을까?
어차피 하려던 부탁이 그저 빨라졌을 뿐이고 영주도 마병단에 적을 둔 그와 껄끄러운 일을 만들고 싶진 않을 것이다.
데브란은 이제 제 뒤에 있는 마병단의 존재와 펠레타 공작 키시아르 라 오르의 이름을 믿었다.
“나는 영주성에 찾아갔어. 영주님은 병환이 깊다며 날 만나 주지 않으셨지만 작위를 물려받으러 오셨다는 장녀 주피엘님은 내 말을 듣는 쪽이 더 낫겠다고 판단하셨지. 덕분에 데르밀라를 데리고 무사히 집에 돌아올 수 있었어. 난 휴가가 끝날 때 아버지와 데르밀라를 데리고 수도로 함께 가기로 했지. 하지만 그날 밤… 영주님이 다시 날 불렀어.”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데브란은 아버지와 여동생에게 집 안에서 나오지 말라고 부탁한 뒤 홀로 영주성으로 향했다. 그러나 영주성에 들어선 그가 마주한 것은 성을 집어삼킬 듯 태우는 거센 불길이었다.
“한눈에 봐도 일반적인 불이 아니었어. 그날 거기에 불을 쓸 수 있는 각성자가 있었던 거야.”
데브란은 불을 불러낼 수 있는 능력뿐만 아니라, 이미 일어난 불을 어느 정도 다룰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불은 통제를 벗어나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번져갔다.
그는 자신을 범인이라고 오인하여 분노해 달려온 마을 사람들에게 붙잡혀 감옥에 갇혔다. 아버지와 여동생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다음날, 영주님의 막내아들인 자카일 도련님이 돌아와 내가 범인이라고 선언했지. 그리고 나는…….”
데브란은 감옥 안에서 죽도록 맞은 뒤 낮인지, 밤인지도 알 수 없는 때에 얼굴에 자루를 뒤집어쓰고 사형수들이 묻히는 죽음의 바위 근처에 산 채로 묻혔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는 이곳이었다.
‘일어났나? 이제 대화를 좀 해 보자고.’
정신을 차린 데브란에게 낯선 사내가 인사를 했다. 그는 자신을 ‘높으신 분’의 명을 따르는 자라 소개했다.
‘본래는 재미없는 일이나 하고 있었지. 중간에 네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야.’
그 사내와 주변 부하들의 말을 통해 데브란은 많은 사실을 알았다. 그들은 디아카 공작가의 지지세력이 강한 동부에서 몰래 아페토 공작가의 세력을 넓히는 작업을 하는 이들이었다.
자신들을 지지하기로 하고 손을 잡은 ‘계약자’의 부탁을 들어주고 있었는데, 갑자기 중간에 데브란이 나타났다고 말했다.
‘그 많은 각성자들 중에서도 넌 좀 특별해. 펠레타 공작 그 여우 같은 작자의 측근을 사로잡을 수 있게 되다니, 운이 좋았지.’
그 사내는 데브란에게서 마병단과 펠레타 공작의 정보를 얻어내려 했다. 하지만 데브란은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마병단은 그의 삶을 구원해 준 곳이었고, 황제와 키시아르 단장은 처음으로 그를 인정해 준 이들이었다. 천대받으며 살아온 평민 출신이라지만 결코 배신만은 하지 않기로 맹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