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81화 (81/805)

81화

“키올레 다 디아카 때문입니다. 그가 이 훈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패악을 부리고 뛰쳐나온 길이라…….”

“흐음. 그런 놈을 기사님이 하인처럼 돌봐 주느라 어쩔 수 없이 따라왔다가 우리와 마주쳤다 이거군. 참 재수도 없어.”

조금만 더 늦게 오거나, 아니면 얌전히 거기 있었더라면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일도 없었는데. 관리관의 말에 부하 기사 또한 같은 생각을 했는지 이를 갈며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에 있었던 건 몰랐던 건가?”

“정말 몰랐습니다.”

“우리가 나누는 말은 어디까지 들었지?”

“……능력자가 4명이 있다는 식의 말부터 들었습니다. 하지만 전 제대로 듣지 못했고, 거기 계신 분의 얼굴을 키올레가 알고 있다며 분노하는 바람에 아페토의 이름을 듣게 된 것뿐입니다. 전 당신들이 어느 가문 사람인지 몰랐습니다.”

“얼굴을 알고 있다고?”

관리관이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돌려 키올레를 노려보았다. 키올레는 피를 흘리면서도 여전히 오만함을 잃지 않은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우릴 본 적이 있었나, 디아카 가의 멍청이가?”

“그래. 거기 네놈 뒤의 그 자식. 아페토 둘째가 항상 데리고 다니는 녀석이잖아. 이전에 감히 내 구두에 술을 쏟았던 놈!”

키올레의 말에 관리관 옆에 있던 남자가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키올레가 자신을 정말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 듯했다.

“……기억력이 생각보다 좋았던 모양이군.”

“나를 바보로 아나? 그때 처벌하려 했는데 그 능구렁이 같은 놈이 네놈을 몰래 빼돌리고 그냥 넘어가 버렸지. 나는 다른 건 몰라도 그런 일은 절대로 잊지 않아!”

키올레의 외침을 통해 모든 이들이 그가 사소한 원한조차 절대로 잊지 않는 성정임을 알게 되었다.

‘약하면서 오만한 주제에 원한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니… 그런 놈이 제일 귀찮지.’

유더는 이전에 2번이나 그를 때려눕혔던 기억을 떠올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관리관 또한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가느다란 눈을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파비엘이라고 했던가? 기사님 덕분에 수고가 조금 줄 것도 같으니, 일단 감사를 표하네.”

“그러면……!”

살려 주는 것이냐고 묻고 싶었던 듯한 부하 기사가 고개를 들자마자 그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어느새 다가온 사냥꾼 차림의 능력자 한 명이 날카롭게 변한 손을 휘둘러 그의 목을 찔렀기 때문이었다.

“커, 억!”

부하 기사는 제 목을 붙잡은 채 쓰러졌다. 솟구치는 핏줄기 속에서 그는 곧 절명하고 말았다.

“파비……! 윽!”

“기절시켜서 끌고 와. 후환은 없을 것 같으니, 죽이기 전에 디아카에 대한 정보나 조금 뽑아내야겠다.”

유더는 사냥꾼 옷을 입은 이들에게 머리를 얻어맞고 쓰러진 키올레가 파비엘의 시체와 나란히 짐짝처럼 실려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기척이 어느 정도 멀어진 뒤에야 유더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던 나한이 손을 떼었다. 약간 바랜 듯이 변했던 주변의 색도 다시 선명하게 돌아왔다. 그들의 모습을 감추어 주고 있던 환상 능력이 끝났다는 뜻이었다.

유더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 파비엘의 시체에서 흐른 피가 묻은 땅을 내려다보았다.

“시체까지 가져가다니, 아예 실종 처리를 할 생각인가.”

피가 묻은 땅을 본 나한이 흘긋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유더는 곧바로 고개를 저어 그의 말에 반박했다.

“아니. 범인을 조작하기 위해서겠지.”

그들이 원하는 것은 키올레에게서 디아카 공작가의 정보를 심문한 뒤, 얻어낼 만큼 얻어내면 죽이고 버리는 것이다. 디아카 공작가의 의심을 사지 않으려면 범인을 따로 만드는 것이 제일이었다.

죽은 기사를 범인으로 조작하는 것이 제일 쉽겠지만, 여의치 않다면 현재 하르탄에서 머무르는 마병단원들에게 시선을 돌리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미 거기까지 생각해 두었을 가능성도 농후했다. 어느 방향이든 유더에게 그리 기껍지는 않았다.

‘일단 따라가서 목적지를 확인해 두고, 그다음에는…….’

“아페토. 디아카.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방금 들은 것들 모두 유서 깊은 공작가 이름들이지. 맞나?”

생각을 이어나가며 아페토 가의 사람들이 키올레를 데리고 사라진 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던 유더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스스로를 감싼 환상마저 모두 해제했는지, 나한은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상태였다. 밤하늘처럼 검푸른 머리칼 밑으로 드러난 회색 눈동자 한쪽이 유더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래. 맞아.”

“놀라운 일이야. 내 형제들은 이곳 귀족들이 황제를 싫어할 뿐, 저들끼리는 사이가 끈끈하다고 했었는데 그렇지만도 않나 보군.”

“…….”

디아카의 영향이 강한 지역에서 수상한 일을 자행하며, 그 모습을 발견한 디아카 가의 일원을 서슴없이 죽이려 드는 아페토 가 사람들. 그 모습을 보았으니 그리 여길 만도 하지만, 유더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는 이전의 생에서 황제의 수족 노릇을 하며 4대 공작가의 많은 일면을 보았다. 유더의 눈에 비친 그들은 마치 여러 개의 머리를 가졌으나 몸은 하나인 전설 속의 뱀 괴물 같았다.

수시로 서로를 물어뜯고 더 좋은 먹이를 차지하기 위해 싸웠지만 그것이 결코 전체의 존속보다 우선하지는 않았다.

이를테면 아페토 가 사람들이 디아카 가의 아들 키올레를 죽인 것이 밝혀지더라도, 디아카 가는 아페토 가에게 드러내 놓고 항의하지 않을 것이다.

물밑에서 작게 사적인 복수 정도는 할 수 있어도, 결코 가문 대 가문의 문제로 깊이 끌고 가지는 않는다. 그것이 건국 때부터 천 년을 이어져 내려온 4대 공작가의 암묵적인 법칙이었다.

‘질서가 유지되는 한, 영광도 영원함을 알기 때문이지.’

유더가 이전 생에서 모셨던 황제는 그 사실에 대해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때문에 이번 일만 보고 공작가들끼리 사실 사이가 나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서로 죽고 죽이며 으르렁대다가도 다른 사안에서는 목숨을 바쳐 서로를 지키려 하는 아주 기묘한 집단이었다.

하지만 그런 복잡한 사실을 나한에게 일일이 설명할 마음은 없었다. 유더가 침묵을 지키자 나한은 이내 말을 돌렸다.

“이제부터는 들킬 위험이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커질 거야. 저들이 향한 곳에 우리와 같은 형제들이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르니. 그렇지만 너라면 계속 갈 생각이겠지?”

“그래.”

유더의 답은 짧고 간결했다. 나한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소리 없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는 이내 도로 환상을 제 몸 위에 덧씌웠다.

그들은 아페토 가 사람들의 흔적을 쫓아 더 깊은 산을 올랐다. 많은 인원이 한 번에 움직인 덕에 발자국이나 핏자국이 선명해져 흔적을 뒤쫓기가 이전보다 훨씬 쉬워졌다. 다행이었다.

“저기, 동굴 안쪽으로 이어지는군.”

그 흔적은 깊은 골짜기로 이어지다 마침내 어느 동굴 안쪽으로 이어졌다. 핏방울이 떨어져 있던 것이 아니라면 발견하지 못했을 만큼 바위 사이에 교묘히 숨겨진 곳이었다.

귀를 기울이니 안쪽에서 사람 목소리 같은 것도 아주 작지만 확실하게 들려왔다. 본거지가 그 안에 있음이 분명했다.

‘위치를 확인했으니 여기서 돌아가 가케인과 지미에게 연락을 한 번 취해도 되겠지만…….’

예상보다 훨씬 많은 사람의 기척이 안에서 느껴지는 것이 영 신경이 쓰였다. 연락은 꼭 지금 당장 취하지 않아도 되지만, 동굴에 있을 이들은 지금이 아니라면 찾지 못할 수도 있다. 유더는 마음을 가다듬고 나한 쪽을 쳐다보았다.

“아까처럼 모습을 숨긴 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글쎄. 숲속에서 나무로 보이게 하는 건 쉽지만, 동굴 안에서는 무엇으로 보이게 해야 숨길 수 있을지.”

“어렵단 소리군.”

유더는 들어가자마자 마주치는 놈들을 모두 때려눕히기로 결심했다. 이런 때는 바람에 실어 돌을 날려 보내는 것이 제일이었다.

“뭘 찾아?”

“날려 보낼 돌.”

“돌을 날린다고? 왜?”

“몸을 숨기고 들어가기 어렵다면 마주치는 놈들마다 때려서 기절시키는 쪽이 제일 빠르니까.”

유더의 말에 나한이 순간 묘한 표정을 지었다.

“농담은 아닌 것 같군.”

“난 그런 쓸데없는 건 안 해.”

“…그렇다면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지금 안에서 누군가 나오고 있으니까.”

그의 말대로 동굴 안쪽에서 들리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그림자가 어른대기 시작했기에 유더는 나한과 함께 우거진 나무 사이로 살짝 몸을 숨겼다.

안에서 나온 사람은 아까 관리관이라 불린 남자를 따랐던 사냥꾼 차림의 부하 중 두 사람이었다. 유더는 그들이 손에 큰 물통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아마 물을 뜨러 나온 것이라 짐작했다.

‘둘 다 각성자였던가… 오히려 잘 됐어.’

발밑을 손으로 더듬어 작은 조약돌 두 개를 잡은 유더는 그대로 그것들을 던지며 바람의 힘을 한껏 실었다.

잠시 후 과일이 돌에 맞아 깨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유더는 그들을 향해 다가가 몸을 뒤집어 이리저리 살폈다.

“죽였나?”

“기절했을 뿐이야.”

유더는 나한의 질문에 대꾸하면서도 기절한 이들의 소지품을 뒤져 단검 하나와 연초 몇 개를 찾아냈다. 아무래도 물만 뜨러 나온 것이 아니라 연초를 피우며 잠시 쉬려 했던 모양이었다.

‘별 건 없군.’

유더는 단검으로 그들의 옷자락을 찢어 팔다리를 묶고 입안에 천 뭉치를 쑤셔 넣은 뒤 방금까지 그들이 숨어 있었던 나무 뒤쪽에 잘 숨겨 두었다. 그리고는 일련의 장면을 바라보고 있던 나한을 향해 망설임 없이 뒤돌아섰다.

“아까 동굴 안에서 무엇으로 변해야 숨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었지.”

순간 유더가 무슨 말을 할지 깨달은 듯, 가느다랗게 뜬 나한의 눈동자 속에 감탄인지, 어이없음인지 모를 기색이 서렸다가는 사라졌다.

“그랬지.”

“이제 정해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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