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아페토의 개들이란 말에 관리관의 표정이 일변했다. 비굴하게 숙이고 있던 그의 얼굴 위로 서려 있던 수많은 고민이 차갑게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저희가 하는 말을 들으셨습니까?”
“그래. 들었다!”
“그렇군요. 혹 이곳에 함께 훈련을 오신 다른 기사분들께선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그놈들에 대한 건 왜 묻는 거지?”
“그거야…….”
귓가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끌던 관리관이 주변에 서 있던 이들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며 싸늘하게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키올레 가의 멍청한 막내가 사라지면 얼마 만에들 찾아올지 궁금하니까 그렇지.”
“뭐?”
“그냥 신경 쓰지 말고 처리해 버려라! 어차피 둘뿐이니까!”
“예!”
관리관과 그의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는 부하를 제외하고 8명의 사내들이 일제히 앞으로 나섰다. 유더는 그들 중 무기를 든 이가 거의 없었던 이유를 곧 알게 되었다.
무기를 뽑은 3명 이외에는 일제히 위협적인 기운이 소용돌이치며 손과 발이 기괴하게 변형되거나, 불과 물 같은 속성 능력들이 발휘되기 시작한 것이다.
“…각성한 형제가 5명이나 끼어 있었군.”
잠시 그들이 대치하는 사이 유더의 어깨를 잡은 나한이 옆으로 밀어 자리를 옮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쩐지 내가 찾던 실종된 형제가 어디로 갔는지도 알 것 같아지는데.”
“키, 키올레님! 적이 너무 많습니다! 정말 이대로 상대하실 겁니까? 일단 물러서는 편이……!”
키올레의 뒤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기사가 숨을 헐떡이며 외쳤다. 그는 실전 경험이 거의 없었던 듯 검을 잡은 손이 떨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상한 말을 하는군, 파비엘. 디아카의 일원은 절대로 이런 벌레 같은 놈들 앞에서 물러나지 않는다. 하물며 저 중에는 내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힘을 지닌 놈들도 끼어 있지. 그런데 나더러 물러서자고? 당연히 모두 죽여야지!”
“하지만……!”
“파비엘. 지금 저놈들 앞에서 등을 돌리려는 것이라면, 설령 살아남는다 해도 디아카가 너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저놈들이 무섭나? 붉은 돌이 준 능력이랍시고 불꽃이나 뿜으며 으스대는 저 벌레들이?”
불꽃이나 뿜으며 으스대는 벌레들이란 부분에서 키올레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음. 저건 아무래도……. 나 때문인가.’
유더는 키올레가 상황 판단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만큼 격렬하게 내보이는 분노의 원천이 자신과 있었던 일 때문인 것 같음을 그제야 깨달아 묘한 기분을 느꼈다. 아무래도 저 젊은 기사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
파비엘이라는 기사의 얼굴 위로 공포와 울분이 스쳐 지나갔다.
“아닙니다….”
“그래. 그래야지. 네가 아버님의 명으로 날 이곳까지 데려와 감시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마 승급을 시켜 주겠다고 하셨겠지. 하지만 그것도 결국 내가 반대하면 끝이다. 알고 있겠지?”
“예…….”
“한미한 남작 집안 출신인 네가 쓸모를 보일 때는 지금뿐이다.”
싸늘하게 중얼거린 키올레의 시선이 검처럼 변한 팔을 휘두르며 달려오는 적에게 향했다.
“어차피 저놈들은 후환이 무서워 우릴 죽이지 못해! 모두 말뿐이다! 가라!”
아니, 아마 충분히 죽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유더는 그렇게 말해 주지 못하는 것이 조금 안타깝다고 생각하며 그들이 격돌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능력자가 5명에, 검을 꽤 잘 쓰는 이가 3명이나 끼어 있었지만 키올레와 동료 기사는 꽤 잘 싸웠다.
능력자들을 상대로도 상당히 분전하는 키올레를 보며 유더는 그간 자신에게 맞아 기절했던 경험이 그에게 아주 도움이 안 되지는 않은 모양이라 생각했다.
이제까지 오간 말로 미루어보아 저 디아카 가문의 오만한 기사는 우연히도 이곳에 훈련을 와 있었던 것 같았다. 다른 기사들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아마 주변에 다른 기사들도 있으리라. 싸움이 길어지면 아페토 쪽에 불리했다.
“젠장. 하필 이런 시기에 갑작스럽게 훈련을 와서는……. 일이 귀찮게 되었어. 망할 놈의 디아카.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군.”
“훈련을 온 기사들이 머무는 곳은 여기에서 멀다고 들었습니다. 설마 마주칠 것이라 생각한 이는 관리관님이 아니라도 아무도 없었을 겁니다. 그러니 위에서도 이동하라는 지시를 내리지 않으신 것 아니겠습니까.”
키올레와 부하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며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아페토 가의 관리관과 그의 부하가 큰 소리로 분노를 토했다.
“대체 저놈은 수도에서 무슨 짓을 했기에 여기로 갑자기 온 거라더냐?”
“제가 알기로는, 기사단 내에서 계속 난동과 패악을 부리는 바람에 마음에 쌓인 심화를 진정시킨다는 명목으로 공작이 직접 이르게 훈련을 보냈다 들었습니다.”
“심화는 무슨. 저런 놈이 마음에 쌓일 것이 있을 것 같으냐? 제 놈이 다른 이들의 마음에 심화를 쌓아주겠지! 아비 잘 둔 덕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나서는 멍청한 어린놈!”
맞는 말이군. 이죽대는 관리관의 목소리를 들으며 유더는 상당히 공감을 느꼈다.
“아페토의 이름을 들은 이상 절대로 살려둘 수 없어. 여기서 죽여서 후환을 방지한다. 다들 더 몰아붙여라! 고작 둘을 상대로 뭐 하는 거냐!”
관리관의 날카로운 외침에 싸우던 이들의 움직임이 순간 멈칫 멈추었다가는 더욱 강렬히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능력 자체는 전투에 사용하기 좋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경험이 너무 적었다. 장애물이 많은 숲에서 동료 여럿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싸우려면 요령이 필요한데 그런 요령을 제대로 아는 이가 거의 없는 듯했다.
‘…각성한 지 얼마 안 된 이들을 모은 건가. 서투르기 짝이 없어.’
키올레와 동료 기사는 의외로 침착하게 그들을 상대했으나, 관리관의 명령이 떨어진 뒤 적들이 죽기 살기로 달려들기 시작하자 금세 수세에 몰렸다.
“으, 윽! 키올레님! 이, 일단 물러서서 분산시키는 것이!”
“…지금 물러서 봤자 아무것도 안 돼! 너는 대체 기사단에서 뭘 배운 거냐!”
위급한 와중에도 키올레의 고집은 변함이 없었다. 키올레의 상황 판단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래도 역시 2명이 8명을 상대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돌아서서 도망치며 분산된 인원을 따로 상대했다면 승산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각성자에 대한 키올레의 과도한 원한이 결국 일을 망친 셈이었다. 유더는 키올레과 동료 기사의 몸에 점차 상처가 느는 것을 보며 어떻게 할지 잠시 고민했다.
아페토 쪽은 확실히 잡아다 정보를 알아내야겠지만, 키올레 쪽은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여졌기 때문이었다.
죽어가는 것을 방치하자니 이후 마병단원들이 근처 마을에 있었던 것을 알게 될 디아카 공작가에서 꼬투리를 잡아올 가능성이 농후했고, 그렇다고 살리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면 키올레 본인에 의해 나중에 후환이 생길 수 있었다.
‘이전 생에서 보이지 않기에 금방 죽었을 사람이라 생각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그때는 여기서 죽지는 않았었겠지.’
어찌 생각하면 유더 때문에 생긴 마병단 전체휴가가 여기까지 상황을 비틀어버린 셈이나 다름없었다.
“큭!”
“뭐 하는 거야, 파비엘!”
그때, 한창 싸우고 있던 키올레의 주변에서 또다시 큰 소요가 일어났다. 생각에 잠겨 있던 눈을 뜬 유더는 갑자기 앞으로 나서서 무기를 버리고 양손을 든 부하 기사를 보고 의외로운 기분을 느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키올레 다 디아카, 네 멍청함 때문에 여기서 죽고 싶지 않아! 투항할 테니 살려주십시오!”
키올레보다 더 많이 다친 부하 기사는 오른팔과 양다리에 수없이 많은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더 이상 검을 드는 것도 힘들다 판단하자 키올레를 배신하고 투항을 시도하려 생각한 모양이었다.
“…네놈, 기사로서 수치를 모르는구나!”
“수치를 모르는 건 너다, 키올레! 내가 왜 너 때문에 죽어야 하는 거냐! 사생아 주제에 집안의 힘만 믿고 거들먹대는 너 때문에!”
“뭐, 라고?”
키올레가 새빨개진 얼굴로 검을 들어 부하 기사의 목을 내리치려 했으나, 그보다 관리관이 손을 드는 것이 더 빨랐다. 그가 손을 들자마자 검을 든 사냥꾼 차림의 부하 중 한 명이 키올레의 검을 쳐내 공격을 막아주었다.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는 거센 소리와 함께 키올레가 검을 떨어트렸다.
전투가 소강되며 주변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허. 이것 참. 이런 경우는 또 생각지 못했군.”
관리관이 투항한 기사를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 자존심 강하다는 황궁기사단에도 자네처럼 실리를 따질 줄 아는 기사님이 있었군그래. 나 같아도 저런 녀석을 위해 죽고 싶지는 않았을 거야. 모두 이해하네.”
“…….”
“살려 달라… 살려줄 수는 있지. 하지만 아무 보답 없이 동정을 베풀 수는 없어서 말이야. 그냥 있어도 둘 다 죽일 수 있는데, 내가 왜 기사님을 살려줘야 할까?”
“뭐든… 뭐든 답하겠습니다. 비밀도 지키겠습니다.”
“파비엘, 너…….”
키올레의 눈가가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나 부하 기사는 그를 돌아보지 않고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관리관은 그 모습이 퍽 유쾌했던 듯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참 보기 좋은 모습이야. 신의와 충성을 바친다는 그 고귀한 기사님들께서 서로를 배신하는 모습……. 그것도 한쪽은 눈엣가시 같은 디아카니 더 좋고 말이지.”
“…….”
유더는 관리관이 가느다란 뱀 같은 눈을 움직여 주변에 늘어서 있는 부하들에게 미묘한 신호를 주는 것을 보았다. 그는 뒤이어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나갔다.
“기사님들이 여기로 온 것을 누군가 알고 있나?”
“함께 여기까지 온 8명의 다른 기사들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찾으러 오지는 않을 겁니다.”
“왜지?”
관리관의 질문에 부하 기사가 분노에 찬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