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누군가 여기 묻혀 피를 흘리고 있다 사라진 건 분명해 보이는군. 양을 보아하니 혼자서 빠져나가진 않았을 것 같은데, 누가 데려갔을까.”
유더와 같은 추측을 끝낸 나한이 조용히 고개를 돌려 숲 안쪽을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제멋대로 쌓인 낙엽 더미 속에서 발자국을 파악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누군가 이곳에 왔었다는 것을 알고 나니 몇몇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부딪쳐 부러진 듯한 어린 나뭇가지, 바위 틈새 사이로 자라다 짓밟힌 잡초, 그리고 흰 돌멩이 위에 찍힌 희미한 갈색 신발 자국. 아마도 그 갈색은 피를 밟아 남겨진 자국이리라.
‘둘… 아니면 셋 정돈가.’
그런 흔적들을 통해 대충 이곳에 있었을 이들의 인원수를 짐작한 유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가려고?”
“그래.”
“일단 돌아갔다가 네 일행들과 함께 다시 오는 쪽이 낫다는 판단은 들지 않나? 앞에 어떤 적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누가 있든 상관없어.”
진주탑에서 평생 공격 마법만 수련해 온 대마법사나, 전장 경험이 풍부한 소드마스터 정도가 아니라면 현재 유더에게 상처를 입힐 만한 실력자는 이 세상에 거의 없다. 그조차도 유더 쪽이 실전 경험이 더 많을 것임을 생각해 보면 누가 와도 쉽게 지지 않을 터였다.
두렵지 않은 적보다는 기껏 찾아낸 흔적을 놓치지 않는 쪽이 더 중요했다.
“겁이 나면 혼자 돌아가.”
“이런. 누가 이 구덩이를 찾아내 주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겁쟁이였다면 너희들을 따라오지도 않았겠지.”
그러면 대체 왜 쓸데없는 질문을 한단 말인가? 역시 의뭉스럽기가 키시아르 못지않은 놈이라 생각하며 유더는 미간을 찌푸렸다.
따라오려면 따라오고, 말라면 말라는 뜻으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하자 잠시 후 등 뒤에서 나한의 발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흔적은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만 골라 점점 더 깊은 산속으로 이어졌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
나한이 다시 말을 건 것은 골짜기 근처에 다다라 숲 반경이 훌쩍 넓어지기 시작했을 때였다. 유더는 신중하게 흔적을 찾으며 대충 대꾸했다.
“뭐가.”
“깊은 곳으로 갈수록 점점 길이 넓어지고 있어.”
“주변 마을 사람들이 이용하던 길과 합쳐지는 위치일 수 있지.”
“아니. 그것과는 조금 다른…….”
무어라 중얼거리던 나한이 갑자기 유더의 팔을 붙잡았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주변 공기가 일렁이며 색이 미세하게 훅 바뀌었다.
“뭐 하는 짓이야.”
“누군가 오고 있어.”
그의 말대로 잠시 후 맞은편 길 아래서 몇 명의 낯선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사냥꾼처럼 보였으나 그들의 손에는 사냥꾼들이 흔히 들고 다니는 올가미나 덫 해체용 단검 같은 도구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유더와 나한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듯 평이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점차 가까운 곳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직도 입을 열지 않는다고? 정말 지독한 놈이군.”
“네. 황제에게 성씨 하나 받았다고 저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는지, 고집이 아주 말도 못 합니다.”
“쯧. 독종엔 약도 없어. 다 죽어가는 놈이 아직도 그리 팔팔하다니. 제어하려고 불렀단 놈들은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아무래도… 그 펠레타 공작이 전 제국에서 가장 쓸만한 놈들만 털어 모은 놈들 중 하나 아닙니까. 노력은 하고 있지만 힘들다는 건 감안해 주십시오.”
“가족을 미끼로 삼아도 안 된다면 그냥 적당히 손봐서 올려보내는 쪽이 나을지도 모르겠군.”
유더는 본능적으로 그들이 이야기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데브란.’
역시 데브란은 아직 살아 있었던 것이다. 구덩이 속에서 피를 흘리며 묻혀 있다 끌려간 이가 데브란인지는 모르겠지만, 길은 맞게 찾아온 듯하니 다행이었다.
“아, 그리고… 관리관님께 보고드릴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뭔데?”
“하르탄 막내 도련님이 도와 달라고 하더군요. 펠레타 공작이 벌써 눈치를 챘는지 사람을 보냈다고 합니다.”
“사람을?”
관리관이라 불린 이가 걸음을 멈추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흐릿하게 갈색 머리칼과 얼굴이 보였다. 유더는 순간 그가 이전의 생의 기억 속에 존재하고 있는 남자라는 것을 깨닫고 어깨를 흠칫 굳혔다.
‘저자는…….’
4대 공작가 중 한 곳인 아페토 공작가. 유더의 기억 속 그곳은 다른 공작가들보다 조용한 편이지만 음험하기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인상을 지닌 곳이었다.
그리고 5년 뒤쯤 새로이 아페토 공작 작위를 받을 2공자의 직속 부관이었던 이가 바로 저 관리관이란 남자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억보다 더 젊은 모습이지만 틀림없었다. 마병단장으로서 참여했던 파티에서 몇 번이나 얼굴을 보고 인사를 받았었으니까.
‘이름이 뭐였는지까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틀림없어.’
디아카 공작가의 세력이 강한 동부에 아페토 공작가의 사람들이 와 있다니. 못 올 것은 없겠지만 하필 이런 산속에서 마주친 것이 이상했다. 그것도 정황상 바로 그들이 데브란 하르투데를 데려간 것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더더욱.
대체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으므로 유더는 빠르게 기억을 더듬으며 눈앞에서 이어지는 대화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네. 4명을 보냈는데 전부 능력자들이라고 합니다.”
“조금 빠르긴 하지만 그런 자들을 보낼 거라 예상하긴 했잖나. 무시하면 어차피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돌아갈 거야. 무시하라고 해. 그런 것보다는 그자의 형 쪽이나 더 신경 쓰라 말하라고!”
“저도 그렇게 전달했습니다만,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 모양입니다. 그놈들이 까뒤집고 다니는 통에 디아카 쪽에서 뭔가 눈치를 채면 어떻게 하냐며 사람을 보내 달라 하더군요.”
“여기도 사람이 없는데 보내주긴 무슨. 디아카를 배신하고 제 아비와 누나를 죽일 때 이 정도 상황조차 예상치 못했다던가? 이런 작은 마을 영주 자리 따위에 눈이 멀어 손을 잡은 건 그쪽이면서, 쯧! 그 겁쟁이는 그냥 무시해.”
“알겠습니다.”
“어차피 이곳에서 찾을 만한 놈들도 다 찾았고, 곧 뜰 거니까 대충 상대하면 그만이야.”
관리관이 혀를 차며 걸음을 옮겼다. 표정 가득히 못마땅한 기색이 흘러넘쳤다.
‘자카일 하르탄이 아페토와 손을 잡고 디아카를 배신한 뒤 전 영주와 누나를 죽였다……. 영주 자리를 노리고 말인가.’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영주 자리는 그렇다 쳐도, 그 일들이 데브란과는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유더는 방향을 바꾸어 위쪽으로 향하는 관리관 일행을 보며 저도 모르게 걸음을 옮겨 따라가려 했다. 그러나 팔을 붙잡고 있던 나한이 그것을 막았다.
“그 이상 가까이 다가가지는 마.”
“…….”
“환상을 덮어씌워 우리를 나무로 보이도록 해 두기는 했지만, 기척을 눈치채는 예민한 자들이 있을 수도 있어.”
너처럼. 하는 중얼거림이 들릴 듯 말 듯 흘러나왔다.
바로 그때, 마지막으로 일행의 뒤를 말없이 따르던 사냥꾼 차림의 사내 중 한 명이 갑자기 고개를 휙 돌려 유더와 나한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저기!”
“뭐야?”
“방금 저쪽에서 무슨 소리가 났습니다!”
아무래도 나한의 조언이 너무 늦었던 모양이었다. 사냥꾼 차림을 한 사내들이 일제히 경계 태세를 갖추었고, 관리관 또한 몸을 돌리며 냉혹한 눈빛을 드러냈다.
“누구냐! 당장 모습을 드러내!”
아직 환상까지 알아차리지는 못한 것 같았지만, 어차피 무언가 있다는 것을 눈치챈 이상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더는 오른손을 슬그머니 움직여 허리에 대충 차고 있던 연습용 검집 위에 얹었다.
“…셋을 세면 그냥 환상을 해제해.”
“혼자서 전부 상대하려고?”
“문제없으니 시간만 제대로 지켜.”
유더는 눈앞에 있는 이들의 인원수와 위치를 전부 머릿속에 새겨 넣으며 조용히 숫자를 되뇌었다.
“하나… 둘…….”
“하! 그래. 나왔다. 이제 어쩔 텐가?”
셋을 세려던 입이 그대로 멈추었다. 유더는 잡아 뽑으려던 검집에 얹었던 손을 풀지 않은 채 뒤를 돌아보았다. 유더와 나한이 있던 곳 근처의 바위 뒤쪽에서 두 사람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한 사람은 누구인지 몰랐으나, 다른 한 사람은 몹시 익숙했다. 그는 바로 디아카 공작가의 일원이자 황궁기사단 소속 기사인 키올레 다 디아카였다.
‘…저자가 왜 여기에.’
“눈치들은 더럽게 빠르군. 대체 여기서 뭣들 하고 있는 거지?”
“…….”
“나는 황궁기사단 상급기사 키올레 다 디아카다. 이곳은 우리 디아카 가의 주선으로 황궁기사단이 매년 훈련을 하러 오는 곳 중 하나인데. 너희들 같은 자들이 머문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어. 너흰 대체 누구냐.”
키올레의 눈빛은 여전히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그의 시선이 아페토 공작가에서 온 이들의 면면을 주의 깊게 살피는 것을 보며 관리관이 앞으로 나섰다. 유더는 그의 눈동자 속에서 쉴 새 없이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것을 보았다.
“아, 황궁기사단 기사님들이셨군요.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이곳에는… 음. 훈련을 하러 오신 것입니까?”
“방금 내가 한 말을 듣지 못한 건가? 그렇다고 했잖아!”
“저희는 그저 지나가던 사냥꾼들일 뿐이라… 곧 돌아갈 예정입니다. 그러니 너무 노하지 마십시오.”
관리관은 키올레가 어디까지 들은 것인지 알 수 없으니 일단 시치미를 떼기로 결심한 듯했다. 그러나 키올레의 눈에 떠오른 것은 그저 경멸의 기색뿐이었다.
“사냥꾼들이라. 하.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나?”
“…정말입니다. 저희는…….”
“아페토의 개들이 감히 무서운 줄 모르고 여기까지 오다니. 죽음이 두렵지 않은 거겠지. 네놈들이 이곳에서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었던 것인지 알아내어 아버님께 보고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