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그건, 왜…….”
“경비대원이 그것도 모른다고 말씀하진 않겠죠.”
시선을 정통으로 마주한 젊은 경비대원의 눈동자 속에 꺼림칙한 기색과 의문이 가득 찼다. 하지만 유더는 그에게 제 질문의 의도를 밝히지 않았다.
“대단한걸. 과연 모든 걸 말해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어.”
젊은 경비대원이 모든 답을 마치고 허둥지둥 떠난 뒤, 여태 한 발짝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한이 유더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 남자가 어젯밤 만났던 경비대원이란 걸 알아보고 노린 건가?”
“아니.”
하지만 덕분에 결과적으로는 더욱 협박 효과가 잘 나왔으니 운이 좋았다. 망설임 없는 발걸음으로 데브란이 살았던 집으로 향하는 유더를 따르며 나한이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자카일에게 이름을 말하겠다는 말을 그렇게 심각한 협박으로 받아들일 줄은 생각도 못 했어. 왜지? 말해 보았자 자카일은 제가 원하는 대로 된 것뿐이라 별 신경도 쓰지 않았을 텐데.”
“가장 윗사람이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도, 그 아랫사람은 다르니까.”
이를테면 대단히 꼬장꼬장하고 무서워 보였던 나이 든 경비대장 같은 이 말이다.
“……아하.”
말뜻을 눈치 빠르게 알아들었는지 나한의 눈빛이 묘하게 빛났다.
“직급 낮은 이는 그저 언급되는 것만으로도 윗사람들에게 경을 칠 수 있으니 싫어한단 건가. 흠. 그런 미묘한 부분은 어떻게 잘도 알았지? 혹시 제국군 출신인가?”
“그런 말까지 대답해 줘야 하나?”
아쉬운 것은 내 쪽이 아니라 네 쪽이라는 뜻을 담아 유더가 조용히 반문하자 나한이 낮게 웃었다.
“내가 호기심이 좀 많거든. 특히 너처럼 능력 있는 형제를 만나면 더욱.”
“너 같은 형제 없다고 말했을 텐데.”
“차갑기가 거의 빙산의 숨결 급이군. 그 정도쯤은 말해줄 수 있잖아.”
“알고 싶다면 너부터 이야기해.”
귀찮을 정도로 호기심을 보이는 주제에 먼저 정보를 내놓기는 싫었는지, 나한은 곧 입을 다물었다. 이후에는 데브란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침묵이 이어졌다.
‘여기군.’
모든 것이 검게 타버린 폐허는 멀리서 보았을 때도 엄청났지만, 가까이서 보니 참혹한 느낌이 더욱 생생했다. 유더는 새카맣게 타 무너진 잔해로 가득한 폐허 주변을 천천히 한 바퀴 돌며 살펴보았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본 이웃집과 길도 검게 그을린 자국으로 가득했지만 데브란의 집만큼 상태가 심각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곳들은 이렇게 무너지지는 않았으니까.
유더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엉망이 된 잔해를 내려다보고 있자 나한이 곁에 다가와 섰다. 유더는 그를 흘긋 바라본 뒤 입을 열었다.
“너도 여기까지는 왔었겠지?”
“그랬지.”
나한이 가볍게 수긍했다.
“다른 곳보다 여기서 일어난 불이 파괴 목적에 더욱 가까운 것 같다는 추측 외에 더 알아낸 건 없었지만.”
그의 말대로였다. 유더는 데브란의 집을 태운 불이 목적을 가지고 일점사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마을의 다른 부분들은 그을린 범위만 클 뿐, 그저 스쳐 지나간 정도에 불과하다면 이 집을 태운 불은 정말로 모든 것을 없애버리기 위해 일으킨 느낌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집이 형태조차 남지 않을 만큼 전부 파괴되지는 않았으리라.
“이 마을 사람들은 여기에 접근하는 것조차 불길하다고 생각하더군. 안에 있던 시체도 다 타 버렸을 테니 이대로 대충 묻어버릴 모양이야.”
“글쎄…….”
유더는 폐허에 쌓인 잔해, 그 안쪽에 숨겨져 있을 곳을 향해 시선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겉은 다 탔다 해도 안도 그럴까.”
“흠? 시체가 안에 남아 있을 거란 뜻인가? 하지만 혼자서 저 잔해들을 치우기는 어려울 텐데.”
유더는 고개를 갸웃하며 쳐다보는 나한을 돌아보지 않고 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데브란의 집 주변에서 소리 없이 거대한 바람이 일며 쌓여 있던 잔해들을 일제히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땅이 미세하게 지진처럼 울리며 거대한 힘 앞에서 순응했다.
잠시 후 그들은 공중으로 떠오른 잔해 아래 드러난 데브란의 집 바닥의 민낯을 고스란히 볼 수 있게 되었다.
“…안쪽은 의외로 꽤 멀쩡했군.”
나한이 잔해와 바닥을 번갈아 바라본 뒤 낮게 중얼거렸다.
“이거라면 안에서 시체의 흔적을 발견할 수도 있겠어.”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본 뒤 두려움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오래된 돌을 깔아 만든 집 바닥은 불에 거의 타지 않아 깨끗했다.
그러나 2명이나 이곳에서 죽었다면 으레 남을 법한 사체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뼈도, 피도, 그 이외의 다른 것들도 전혀 없었다.
“잔해는 대부분 집에 있던 가구와 그릇, 천뿐인 것 같은데. 그 외에는… 이건 삽인가?”
둥둥 떠 있는 잔해 사이를 돌아다니던 나한이 자루가 다 타 버린 작은 삽을 툭 건드렸다. 유더는 아마 벽과 문이 있었던 듯한 구역으로 다가가 타다 만 잔해를 건너 넘어갔다.
그 위에 떠다니는 잔해의 원래 모습을 추측해 볼 때, 아마도 여기에는 침대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때 유더는 타다 남은 나무 조각과 천 사이에서 문득 무언가 작게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뻗은 손에 잡힌 것은 작고 둥근 금속 덩어리였다.
불 때문에 본래의 모습을 파악하기는 어려웠지만, 보석이 달려 있던 액세서리였던 것은 확실했다.
“그게 뭐지? 브로치?”
“…그런 것 같군.”
유더는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형태를 확인해 보았다. 평범한 브로치 같았지만 끝부분에 힘을 주어 어루만지자 안쪽이 덜걱거리며 미세하게 비틀렸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유더의 눈 속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중 브로치?’
일반 브로치라도 평범한 농민이 가지기에는 어려운 물건인데, 그것은 무려 안에 무언가를 숨길 수 있는 장치가 된 이중 브로치였다.
유더는 이전 생에서 귀족들이 그런 이중 브로치 안에 소중한 사람의 초상화를 끼워 보관하는 모습을 더러 본 적이 있었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로맨틱하다는 이유로 언제나 인기가 높은 제품이었다.
손가락에 힘을 주어 브로치를 열기 위해 애썼으나 불에 타 형태가 변한 탓인지 잘 열리지 않았다. 유더는 몇 번의 시도 끝에 겨우 브로치를 열었다. 그 안에 숨겨져 있었을 작은 초상화는 다행히 타지 않은 상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그것을 본 순간 유더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은 그의 곁에서 브로치 안을 함께 들여다본 나한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르탄 가의 문양과 십자 문양이 그려진 망토를 두른 기사라. 아무래도 거기에 해당할 것 같은 사람은 한 명뿐이겠어.”
“…….”
자카일 하르탄에게는 은십자 기사단 소속의 형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데브란 하르투데에게는 아버지와 여동생이 있었다.
유더는 데브란이 동료 단원들에게 동생 때문에 영주가 거주지 이전 신청을 받아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토로한 적이 있다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데브란과 그의 가족들은 사라졌지만, 자카일 하르탄의 형은 죽지 않았다. 그리고 폐허가 된 데브란의 집에서 찾아낸 고급 브로치 속 남자의 모습.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유더는 브로치를 도로 닫고 그것을 품속에 넣었다.
“밖으로 나가. 도로 원래 상태로 만들 거니까.”
“찾을 건 이제 다 찾았나 보군?”
나한이 눈치 빠르게 답하며 폐허 밖으로 빠져나갔다. 유더는 그의 뒤를 따라 다 타버린 집 밖으로 나간 뒤 힘을 천천히 해제해 타고 남은 잔해들을 도로 원래 있던 자리에 내려놓았다.
풀썩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먼지가 엄청나게 일었지만 바람으로 몸을 감싼 유더에게까지 날아온 재는 한 줌도 없었다.
“다음은 어디로 갈 거지? 역시 뒷산?”
“…그래.”
이곳에 오기 전 그들은 젊은 경비대원에게서 사형당한 사형수의 시체는 하르탄 영지 뒤쪽에 이어진 클레이먼 산속에 있는 커다란 바위 주변에 대충 가매장한다는 말을 들었다.
비록 자살했다 하더라도 데브란은 사형수였으니, 그의 시체는 분명 그곳에 묻혔을 것이다.
물론 그가 정말 죽었다면 말이다.
집 안에서 타 죽었다던 사람들의 시체도 발견되지 않았는데, 과연 데브란의 시체라고 온전히 발견될까. 아니라는 데에 내기라도 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생각은 한 시간 정도 걸려 도착한 클레이먼 산에서 이내 확실하게 증명되었다.
‘역시 없군. 아무것도.’
사형수의 시체를 가매장하는 장소로 사용한다던 큰 바위는 금방 찾아냈다. 젊은 경비대원의 말대로 그 바위가 마치 커다란 괴물이 두 발로 서서 포효하는 것 같은 기이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어 알아보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경비대원은 그 바위를 마을 사람들이 ‘죽음의 바위’라 부른다고 말했다.
그러나 죽음의 바위 주변에는 최근에 무언가 묻힌 것처럼 보이는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여 유더가 가볍게 바람과 땅을 움직여 주변을 뒤집어 보았지만 찾아낸 것은 아주 오래전 묻힌 것 같은 백골 조각 몇 개뿐이었다.
“여기. 이쪽으로 좀 와 보지 그래.”
그때, 멀지 않은 곳으로 사라졌던 나한이 유더를 불렀다.
“이쪽에 구덩이가 있어.”
나한이 발견한 구덩이는 바위 주변보다는 숲 안쪽에 더 가까운 곳에 있었다. 사람 하나를 묻을 수 있을 만큼 좁고 깊었지만, 역시나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부터 이 상태였나?”
“아니. 발견했을 때는 위에 낙엽이 위쪽에 이렇게… 덮여 있었지.”
나한이 발을 움직여 주변에 치워 두었던 낙엽 덩어리들을 본래 있었던 대로 대충 덮어두었다. 구덩이가 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대충 위쪽만 덮어둔 것이 분명한 모습이었다.
유더는 낙엽을 도로 한쪽에 밀어두고 드러난 구덩이 앞에 무릎을 꿇었다. 허리를 숙여 안을 들여다보니 안에서 무언가 비릿하고 축축한 냄새가 풍겼다.
오랫동안 쌓여 썩고 있던 낙엽이 풍기는 진한 풀내음에 뒤섞이기는 했어도 그 비린내는 유더에게 몹시 익숙한 냄새였다.
유더는 손을 뻗어 구덩이 안쪽 흙을 아무렇게나 한 줌 집어 올렸다. 검은 장갑 안에서 진득하게 부서진 흙 사이로 채 마르지 않은 액체가 찔끔거리며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피.’
의심할 여지 없이 그것은 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