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착각이라고 보기에는 지미에겐 정말로 약간 미열이 있었다. 순간 이곳에 오기 전 유더가 했던 당부가 떠올랐는지 가케인도 재빨리 곁으로 다가와 지미의 양 뺨을 덥석 잡았다.
“으악. 왜 이래요.”
잠시 후 그가 유더를 향해 은밀한 눈빛을 보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제2성을 발현하려 하는 기색은 아직 느껴지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유더 말대로 진짜 열이 있긴 한 것 같아. 지미, 상태가 좋지 않으면 말을 했어야지.”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그랬죠! 저 정말 괜찮아요. 이 정돈 아무것도 아니라구요. 설마 저 먼저 돌아가라고 하실 생각은 아니시죠?”
지미가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애원의 눈길을 보냈으나 유더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단순히 피로와 과로가 겹쳐 난 미열이라 해도 우습게 보아서는 안 된다. 현재 일행을 책임지는 것은 유더가 아닌가.
“가케인. 지미를 데리고 먼저 성에 돌아가.”
“내가? 그러면 넌…….”
혼자 보내려 하면 절대로 돌아가지 않을 기색인 소년 때문에 유더는 가케인을 함께 보내기로 했다. 가케인의 시선이 유더와 등 뒤의 나한을 향해 바쁘게 움직였다.
“저 녀석과 둘만 있어도 괜찮겠어?”
“무슨 일이 생기면 걱정해야 할 건 내가 아니라 저쪽일 거야.”
“그건 그렇지만…….”
한숨을 내쉰 가케인이 잠시 후 나한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내가 필요해지면 성으로 불꽃이라도 날려 보내. 몸은 거기 있어도 내 그림자는 멀리까지 보낼 수 있을 테니까.”
“알겠어.”
유더는 그들이 묵을 손님용 방 창문에서 영지 전체가 보였던 것을 생각하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케인이 그림자를 보낼 일이 생길 것 같지는 않지만 미리 견제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곧 잠도 같이 잘 사이인데 참 각박하게 구는군.”
“잠을 자? 누가? 너랑?”
나한의 말에 가케인이 기막혀하며 반문했다.
“주어진 숙소 방이 2개뿐이니 당연히 누군가는 나와 함께 자야 하지 않겠어?”
“…….”
미처 그 생각은 하지 못했던 듯 가케인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그렇다면… 차라리 내가…….”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우선 움직이자.”
유더는 손을 들어 쓸데없는 대화가 더 이어지는 것을 막았다.
“그런 이야기라니. 이것도 충분히 중요한 이야기야, 유더!”
“지미의 건강이 그것보다 더 중요해.”
“저는 정말 괜찮다니까요, 형. 믿어주세요!”
시무룩한 얼굴로 서 있던 지미가 때를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지미.”
유더는 잠시 나한을 돌아본 뒤 지미를 향해 허리를 숙여 귀 가까이에 입을 대었다.
“이전부터 네가 계속 미열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어. 피로 때문에 상태가 심화되었을 수도 있으니 오늘은 쉬어.”
“누, 누가 그래요?”
“단장님께서.”
키시아르의 이름이 나오자 지미의 고집은 곧바로 꺾였다. 스스로도 뭔가 짚이는 것이 있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알겠어요……. 갈게요.”
“오늘 잘 쉬고, 내일 문제 없이 멀쩡하다는 판단이 들면 네가 싫다고 해도 일을 계속 시킬 거야.”
“…정말이죠?”
유더의 말에 지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유더는 다시 반짝이기 시작한 소년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단호하게 끄덕였다.
“기껏 데려온 일꾼을 안 쓰는 건 내 손해니까.”
“헤헤. 좋아요! 그럼 가자마자 잘래요. 사실 굉장히 졸렸거든요.”
단숨에 밝아진 지미를 두고 허리를 편 유더는 가케인을 향해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아직 낌새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도, 혹시 발현할 것 같으면 지미는 침대에 눕혀 두고 넌 곧바로 옆방으로 이동해. 그다음에 그림자를 통해 날 불러.”
“알겠어. 다른 건?”
“격리할 때는 지미 방의 문을 잠가. 그리고…….”
유더는 멀리 있는 하르탄 영주의 성을 향해 살짝 눈길을 돌렸다. 그 안에서 자카일 하르탄이 지금쯤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성안에 있는 자카일 하르탄의 동태를 살펴. 어디론가 이동한다면 그때도 날 불러.”
“그 녀석을 감시하란 거지? 좋아. 나도 수상하다고 생각하는 중이었으니까.”
유더가 알아차린 자카일의 의심스러운 모습을 가케인도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유더는 가케인과 지미가 성으로 돌아간 뒤 나한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둘만 남았군. 이제 뭘 할 셈이지? 아까처럼 계속 마을 사람들을 찾아다닐 건가?”
“아니.”
이미 찾아볼 사람은 다 찾았다. 하지만 아무도 정보를 주려 하지 않으니, 이제는 다른 방법을 쓸 생각이었다.
“강제로 말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찾아갈 거야.”
“강제로 말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
나한의 눈이 흥미로 빛났다.
“그게 누구지?”
유더는 대답 대신 조용히 한곳을 가리켰다. 불에 탄 방앗간을 수습하기 위해 여러 사람이 낑낑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마을의 치안을 지키기 위해 파견된 경비대원들이 몹시 많았다.
“경비대원? 그들도 그다지 도움은 되지 않을 텐데?”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찾던 동료의 집이나 무덤 위치 정도는 확실히 알고 있겠지.”
이런 작은 마을에서 경비대원이란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하는 공식 일꾼에 가깝다.
영주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그들이라면 다른 사람들처럼 자카일 하르탄의 ‘협조하라고 일러두겠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고 우길 수는 없을 터였다.
유더는 불에 탄 벽돌을 해체해 담은 수레를 힘겹게 끌고 인적이 없는 길 근처까지 온 젊은 경비대원을 향해 다가갔다.
낯선 인기척을 느낀 경비대원의 시선이 유더를 향해 움직였다가는 이내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휙 돌아갔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유더는 그를 목표로 정한 뒤였다.
“잠깐 말씀 좀 묻고 싶습니다.”
“지금 바쁜 것 안 보입니까? 저리 가 주세요.”
목소리가 익숙하다 싶더니 어젯밤 그들을 성으로 안내해 주었던 바로 그 경비대원이었다.
“저희는 아무나 찾아가서 물어도 좋다던 자카일 님의 허락을 받고 왔습니다만…….”
“그게 뭐 어쨌단 말입니까?”
벽돌을 나르느라 잔뜩 지친 경비대원이 짜증을 벌컥 냈다.
“저는 그런 말을 들은 적도 없고, 지금 굉장히 바쁘단 말입니다. 저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물으십시오. 그럼 되잖습니까.”
“알겠습니다. 곧 영주님이 되실 분의 명이니 다른 분들은 몰라도 경비대 소속인 분들이라면 이미 알고 계실 줄 알았습니다만, 그러시다면 뭐……. 하르탄 경비대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잘 알겠습니다. 보기 좋군요.”
유더의 말 속에 담긴 뼈를 느낀 듯 젊은 경비대원이 눈을 크게 떴다.
“아. 그리고 별 건 아닙니다만, 혹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지, 지금 절 협박하는 겁니까?”
젊은 경비대원의 눈썹이 씰룩 떨렸다.
“그럴 리가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았을 뿐입니다. 마침 어젯밤의 인연도 있으니 자카일 님에게 당신 이야기를 해 드리면 좋아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
젊은 경비대원의 시선이 등 뒤로 향했다. 멀리서 일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 중 그에게 신경을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수레를 내려놓은 뒤 화가 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젠장. 뭘 물으려고 이러는 거예요?”
물고기가 드디어 낚싯대 끝을 물었다. 유더는 서늘한 미소와 함께 커다란 나무 뒤쪽을 가리켜 보였다. 세 사람 정도는 충분히 몸을 숨길 만한 곳이었다.
“잠깐이면 됩니다. 따라오시죠.”
그들은 나무 뒤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행히 불에 타지 않은 거대한 나무는 수령이 적어도 몇백 년쯤은 되어 보였다.
“데브란을 압니까?”
유더는 그들이 모두 나무 그늘 밑으로 들어서자마자 낮은 목소리로 빠르게 질문을 던졌다. 젊은 경비대원이 역시나 그것부터 물을 줄 알았다는 듯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압니다. 하지만 나도 그날 일어난 일은 잘 몰라요.”
“그건 됐습니다. 데브란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어떤 사람이었냐고요?”
“같은 마을에서 자랐으니 저희보다 그에 대해 잘 아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냥. 뭐, 평범한…… 녀석이었죠.”
경비대원이 불편한 기색으로 시선을 땅 밑으로 향했다.
“나이대가 비슷해 보이는데, 어릴 때는 여기서 함께 놀기도 했겠군요.”
유더는 이곳에 오기 전 들었던 데브란 하르투데의 나이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러자 처음으로 젊은 경비대원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그는 무어라 대답하려는 듯 입을 벌리다가는 결국 다물고 말았다.
“…….”
“데브란의 가족 구성은 어떻게 됩니까.”
유더는 그에게 답을 종용하는 대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아버지와 여동생 하나뿐입니다.”
“좋습니다. 데브란의 집은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실 수 있습니까.”
“그건…….”
젊은 경비대원이 고개를 들었다. 유더는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따라 등을 돌렸다. 몇 개의 그을리고 허름한 집 뒤쪽에 유난히 흔적도 없이 새카맣게 탄 폐허가 하나 있었다. 작은 집이 하나 서 있었을 법한 크기였다.
“저깁니다. 미리 말해두겠는데, 다 타버려서 남은 건 하나도 없어요.”
“…그렇군요.”
가지 말라는 뜻으로 한 말 같았지만, 당연히 그 말에 순순히 따를 생각은 없었다. 유더는 그 폐허가 보이는 위치를 잘 기억해 둔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죽은 데브란 가족들은 당시 저 안에 있었습니까?”
“그렇다고 들었으니 그렇겠죠!”
“그러면 무덤도 따로 만들지 않았겠군요.”
경비대원이 두 번째로 대답 없이 침묵을 지켰다. 그가 초조한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가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기, 언제까지 물을 겁니까? 난 바쁘다고 했잖아요.”
“걱정하지 않아도 이번이 마지막 질문입니다.”
유더는 똑바로 앞을 바라보았다.
“하르탄에서 사형수의 시신은 어떻게 처리하는지 알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