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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76화 (76/805)

76화

원하는 답을 얻은 유더는 배불리 먹은 세 사람을 데리고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손님용 방에 안내 받았다.

“전부 다 타서 그 창고 같은 곳밖에 남지 않았다더니, 완전히 거짓말이었네.”

“그러니까요. 탄내 하나 안 나고 멀쩡한데요!”

가케인과 지미가 분노하는 소리를 흘려들으며 창가로 향한 유더는 제가 서 있는 위치에서 하르탄 영지의 전경이 대부분 보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본래는 운치 있고 평화로운 모습이었을 작은 영지는 햇빛 아래 참혹한 검은 상처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사상자가 거의 없다고 했었던가?’

나한은 분명 그렇게 말했었지만 불탄 흔적으로 가득한 마을을 보고 있으려니 그 정보가 사실인지 갑자기 의심이 갔다.

‘물론 여기서 만난 이들 중 가장 의심스러운 이는 자카일 하르탄이지만.’

유더는 창가에서 등을 돌리고 방금 전 대화했던 자카일 하르탄의 말들을 떠올렸다.

비록 키시아르의 이름을 듣고 어쩔 수 없이 승낙한 것이라고는 해도, 자카일은 크게 망설이지 않고 유더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걱정되는 바가 있었다면 수도에서 온 외지인이 마을을 휘젓고 다니며 정보를 뒤지겠다는 말에 그리 쉽게 대답하지는 않았으리라. 평범한 귀족 청년답게 오만하고 감정을 숨기는 법에 그리 능하지 못해 보였던 자카일의 모습으로 볼 때 더욱 그랬다.

일부러 그의 감정을 뒤흔들어 속내를 쉽게 들여다보고자 일행들에게 품위 없는 식사 모습을 보여달라 부탁하지 않았던가.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그런 모습을 보였다면 추측할 만한 답은 하나뿐이었다. 자카일은 유더와 마병단원들이 무슨 짓을 하든 제가 숨긴 비밀을 찾지 못할 것이라 자신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 법이다. 유더는 지금쯤 수도에 도착했을 전서구를 떠올리며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했다.

* * *

“하하. 부황이 돌아가신 이후 이런 류의 잔소리는 또 처음이군. 내가 어지간히 신뢰가 가지 않은 모양이지.”

“……누구를 말하시는 겁니까?”

“누구겠나?”

키시아르는 느른하고 우아한 미소와 함께 손에 쥔 편지를 살랑 흔들어 보였다. 그의 부관 나단 주커만이 찌푸린 얼굴로 편지지를 향해 눈을 돌렸다.

“내 보좌지.”

키시아르 라 오르는 오늘 오전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그를 기다리던 전서구를 맞이했다.

하르탄에서 날아온 작은 새는 편지를 전달한 뒤 공작이 직접 따라 준 물을 마시는 영광을 누렸다. 현재 책상 위에 둔 작은 조각상 위에 앉아 깃털을 다듬고 있는 전서구는 몹시 안락하고 편안해 보였다.

“그가 무어라 써서 보냈기에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궁금한가?”

직접 보지 그래. 나단 너라면 특별히 보여줄 테니까. 키시아르는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하며 편지를 부관에게 넘겼다. 나단은 작은 종이 안을 가득 메운 갈색 글씨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잉크 색이 특이하군요.”

“잉크가 아니니까.”

“예?”

“잘 봐. 직접 쓴 게 아니고 종이 겉을 살짝 태운 거야. 엄청난 능력 아닌가.”

키시아르가 말한 대로였다. 나단은 손가락으로 문질러도 전혀 번지지 않는 글씨를 보며 주군의 말이 맞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솜씨였다.

“…그자의 발전 속도는 괴물 그 이상이군요.”

나단 주커만은 아주 젊은 나이에 소드마스터라는 경지에 올랐다. 검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자신하는 이들만이 오를 수 있는 지고의 위치였다.

그러나 그런 그도 검 끝으로 손바닥만 한 종이에 깨알 같은 글씨를 정확하게 그어 편지를 쓰는 것은 어려웠다. 강한 힘을 가지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가진 힘을 아주 잘게 나누어 섬세하게 조절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유더 아일은 그런 짓을 태연히 해냈다. 아군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등골이 오싹할 만큼 무서운 제어력이었다.

나단은 경계심도 없는지 그저 웃고만 있는 주군의 시선을 피해 다시 한번 편지지 위로 시선을 내렸다. 작은 글씨라 해도 읽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잠시 후, 빠르게 눈동자를 움직이던 나단이 당혹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하르탄 영주와 후계자가 이미 죽었고, 구해야 할 단원은 마을에 불을 지른 죄로 사형을 앞두고 갇혀 있는 데다 가던 도중 능력자 집단으로 이루어진 산적을 만났다니……. 이건 추가로 사람을 더 보내셔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본인이 필요 없다고 하잖나.”

키시아르의 답은 명쾌했다.

“그런 일들이 있었지만 여전히 3일 내로 금방 해결할 자신이 있으니, 필요 없는 단장은 여기서 붉은 돌 조사나 잊지 말고 잘하고 있으라니 내가 뭘 어쩌겠나.”

“…그렇게까지 무례하게 쓰여져 있지는 않았습니다만.”

편지 쓰기의 기본을 가르치는 서적에나 나올 법한 예의용 문구를 다 빼고 요약하면 후반부는 대충 그런 내용이 쓰여 있기는 했다.

“만약 실종된 단원이 아직 살아 있다 하더라도 사형을 앞둔 죄수를 그들이 무슨 수로 빼내겠습니까? 지금이라도 제가 그곳으로 향하는 쪽이 낫지 않겠습니까.”

“사태가 긴급하다 여겼다면 이런 말을 하진 않았을 거야. 일단 전부 때려 부수고 나서 뒷수습을 부탁했겠지. 아니면 일단 물러나 다른 곳에서 연락을 하거나.”

키시아르는 마치 편지를 써 보낸 이의 마음을 읽은 듯 여유롭게 대답했다.

“하지만 굳이 거기서 만난 산적 대장과 동행을 택한 데다 이름까지 써 보낸 걸 보면 유더 아일이 그자를 심상치 않다 생각하는 건 분명해. 아마 가명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네 생각은 어떻지?”

“가명이라면 저와 출신국이 같을지도 모르겠군요.”

나단의 말 속에는 묘한 확신이 있었다.

“그래. 하필 남국 언어로 ‘복수’라는 뜻을 지닌 이름이라니, 뭔가 의도가 느껴진단 말이지.”

사막을 두고 제국과 떨어져 있는 남국에 대해 제국인들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남국 출신인 나단과 그를 곁에 두고 오랫동안 함께 했던 키시아르는 다른 이들보다 그곳의 언어나 문화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남국은 제국을 비롯한 주변국들과 전혀 다른 체계의 언어와 문화를 지녔다. 때문에 이름을 짓는 양식 또한 상당히 달랐다.

키시아르의 아름다운 얼굴 위로 흥미로워하는 미소가 짧게 떠올랐다가는 사라졌다.

“혹시 모르니 그 산적 집단에 대해 조사해라. 하르탄 영주의 막내아들 자카일 하르탄이 현재 전권을 위임했다니 그자의 신변도 더 알아보고. 그리고…….”

물 흐르듯 추가 업무를 얹어 주던 키시아르의 붉은 눈동자가 처음으로 웃음을 지우고 침착하게 변했다.

“3일이 지나도 추가 연락이 없을 때는, 나단 네가 인장을 들고 예정대로 내려가도록.”

“예.”

“눈앞에 쌓인 쓰레기는 금방 치울 수 있어도 그 밑에 또 어떤 난장판이 벌어져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나단이 고개를 숙이자 키시아르의 표정이 도로 평소와 다름없이 여유롭게 변했다.

“마법사들은 어떤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지는 않았나?”

“아직까지는 없었습니다. 하루 종일 거리를 두고 뭔가 적으며 살피기만 하더군요.”

키시아르는 어제 마법사들이 조사를 빨리 시작할 수 있도록 붉은 돌을 몸소 건물 지하로 옮겨 두었다.

그곳은 뻥 뚫린 거대한 공간이라 붉은 돌의 힘을 피해 거리를 두고 살피기도 편하고,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바로 들여다 놓기도 좋았다. 숙소 건물 지하에도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아는 단원은 없으니 조사를 하기 위한 공간으로 그보다 제격인 곳은 없었다.

나단의 보고를 들은 키시아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댔다.

“좋아. 신중함은 좋은 미덕이지. 단원들은?”

“평소처럼 훈련에 매진 중입니다. 특별히 신경 쓰실 부분은 없습니다.”

“알겠다. 계속 살피도록.”

대화를 끝낸 시키아르가 부드럽게 손을 내밀었다.

“그 보고서는 도로 주고.”

이미 읽자마자 외웠을 텐데, 뭔가 더 살필 점이 있다 여긴 것일까. 키시아르는 가져간 종이를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나단은 주군을 방해하지 않도록 소리 없이 뒤로 물러났다.

무뚝뚝하지만 충실한 부관의 시선이 날개깃을 정리하는 전서구를 넘어 창문 밖 하늘로 향했다.

* * *

“아 글쎄, 나는 잘 모른다니까 그러네.”

“불이 난 게 너무 큰 일이어서,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도 기억이 잘 안 납니다.”

“몰라요. 나는……. 그냥 우리 가족을 지키는 데만도 급급했단 말이요.”

유더는 자카일의 허락을 얻은 뒤 성 밖으로 나와 주변을 탐색했다. 만나는 영주민들은 모두 경계심에 가득 찬 시선으로 슬금슬금 물러나기 바빴다. 간혹 겨우 붙잡고 화재가 났던 날에 대해 물어보면 돌아오는 답은 모두 기억이 안 난다거나, 잘 모른다는 말뿐이었다.

“우리가 마치 역병이라도 되는 것처럼 피해 다니네. 인심이 이리 흉흉해서야.”

가케인이 텅 빈 주변을 돌아보며 자조의 말을 중얼거렸다. 영주민들의 경계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의 잘생긴 얼굴과 친화력 넘치는 말투마저 전혀 통하지 않았다.

보자마자 몬스터라도 본 듯 돌아서서 도망치는 사람들만 줄지어 보다니, 아마도 가케인 볼룬발트의 인생에서 몇 번 겪지 못한 경험이었으리라.

“원래도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겠지?”

유더는 조용히 그들을 따라오는 나한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는 미묘한 미소를 띠고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이 정도까지는 물론 아니었지. 아마 그 도련님이 뭔가 지시를 내린 모양이야.”

“어쩌죠? 이렇게 계속 사람들이 답도 안 해 주고 피해만 다니면…….”

유더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지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오전부터 찬바람을 맞으며 계속해서 돌아다닌 탓인지, 소년의 뺨이 평소보다 좀 더 붉어 보였다.

그것을 본 순간, 유더는 혹시나 싶어 지미의 이마에 손등을 살짝 대 보았다.

“유, 유더 형? 왜 그러세요?”

“열이 조금 있는 것 같은데.”

“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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