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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74화 (74/805)

74화

가케인이 그림자 분신을 불러내어 쌓인 상자 중 그나마 깨끗한 것들을 분리해 바닥에 늘어놓았다. 의자나 침대 대용으로 쓸 수 있도록 놓아준 상자에 모두 걸터앉자 나한이 가케인을 향해 말을 걸었다.

“특이한 능력이군. 그림자라면 벽도 통과할 수 있는 건가?”

“알아서 뭐 하게?”

마냥 성격이 좋기만 한 줄 알았던 가케인이지만 나한을 상대로 경계를 풀지 않는 것을 보면 나름대로 때와 장소를 가려 사교성을 발휘했던 모양이었다.

그 뒤에는 이렇다 할 대화가 오가지 않은 상태로 기다림이 이어졌다. 늦은 시간에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지겨웠는지 지미가 벽에 기대어 졸기 시작했다.

등잔 속에서 흔들대는 촛불이 반 정도 녹았을 때쯤, 창밖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뒷산에 갔다던 마을 사람들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아. 음. 다들 돌아왔나 봐요…? 곧 저희를 불러주겠죠?”

고개를 흔들대며 자던 지미가 귀를 쫑긋거리며 눈을 떴다. 유더는 어린 소년이 졸음과 불안감을 감추고 의연하게 버티는 모습을 보며 동그란 머리를 가볍게 툭 두드려 주었다.

“졸리면 그냥 누워서 자.”

“아, 아니에요. 저 안 졸려요. 안 잤어요!”

유더의 손길에 깜짝 놀란 지미가 희미한 불빛 속에서도 선명히 보일 만큼 새빨개진 얼굴로 변명을 했다. 물론 그 말을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예상보다 더욱 과한 푸대접으로 보아, 죽은 영주의 아들이 그들을 곧바로 불러줄 가능성은 반반이었다. 찔리는 바가 없다면 곧장 불러주겠지만, 아닐 경우는 과연 어떨까.

‘기다리면 알게 되겠지만.’

웅성대던 소리가 성 앞에서 한참을 울리고, 안쪽도 제법 시끄러워졌지만 그들을 부르러 오는 이의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창을 통해 들어온 어둠이 점차 옅어지고 새벽이 다가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마침내 해가 완전히 떴을 때, 유더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다가가 고리를 돌려 보았다.

덜걱. 덜걱덜걱. 몇 번을 돌리고 밀어도 문은 바깥을 향해 열리지 않았다.

“이제 확실해졌군.”

유더의 목소리가 축축한 방 안에 낮게 울렸다.

“저들은 아무래도 우리를 만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정말 어이가 없네.”

가케인이 헛웃음을 흘리며 피로한 기색이 서린 눈가를 쓸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려고?”

말만 한다면 그는 곧바로 그림자 분신을 불러내 문을 부술 것이다. 지미도 허리에 찬 낡은 연습용 철검 하나로 전설 속 소드마스터들처럼 벽을 가를 수 있는 소년이었다.

“말만 해. 부수고 나가는 건 금방이니까.”

하지만 유더는 가케인의 생각과 달리 곧장 문을 부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는, 창가로 다가가 짧게 휘파람을 몇 번 불었다.

특이한 패턴이 느껴지는 휘파람 불기를 세 번 정도 반복했을 때, 멀리서 무언가 날아와 작은 창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유더가 내민 손가락 위에 횃대처럼 앉아 있는 그것은 분명 어제까지 그가 말안장 옆에 매달아 들고 다녔던 전서구였다.

“…전서구?”

“보고서부터 먼저 보내고, 그다음에 움직이자.”

나직한 목소리가 시선을 끌었다. 가케인은 유더가 품속에 숨겨 온 작은 종이를 꺼내는 것을 지켜보았다. 펜이 없는데 어떻게 쓰려고? 하고 물으려던 순간 그가 손가락을 들어 종이에 가져다 대었다.

잠시 후 아주 미세한 불꽃이 흘러나와 글씨 모양대로 가늘게 구불거리며 종이 겉을 살짝 태우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이 무어라 쓰는지 볼 수 없게끔 몸을 돌린 상태였지만 그것이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섬세한 능력 활용이라는 것만은 모두 알 수 있었다.

불꽃 능력을 쓸 수 있는 능력자는 유더 외에도 많지만, 그것을 저런 식으로 활용할 수 있을 만큼 조절에 능한 이는 없다. 산 전체를 덮을 만큼 거대한 불꽃을 불러내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바로 저런 미세한 조절이었다.

가케인은 나한이라고 이름을 밝힌 산적 대장 놈의 시선 속에도 미처 다 숨기지 못한 놀라움이 드러나는 것을 보며 은밀한 우월감을 느꼈다.

능력을 각성한 이후 저 잘난 맛에 살아온 이들이 마병단에 들어온 이후 압도적인 실력을 자랑하는 유더 앞에서 하나같이 얼마나 큰 좌절을 느꼈던가.

마병단을 만들어낸 것은 키시아르 단장일지라도, 그들에게 겸허함을 배우게 하고 노력으로 뭉치게 한 것은 유더 때문이 반 이상이라 보아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저 산적 대장이 얼마나 뛰어난 능력을 지녔든 거기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니 이곳에 온 이후 줄곧 날카로웠던 신경이 안정을 되찾는 것이 느껴졌다.

미리 무어라 쓸지 모두 생각해 두었던 듯 거침없이 편지를 만들어 낸 유더는 이내 종이를 돌돌 말아 전서구의 다리에 붙어 있는 작은 주머니 안에 넣었다. 그가 창가로 다가가 손을 뻗자 전서구는 한 번 낮게 울음소리를 낸 뒤 날개를 활짝 펼치고 밖으로 날아갔다.

“됐어. 이제… 나가자.”

몸을 돌린 유더의 짙은 눈동자가 닫힌 문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나 싸늘해 보는 것만으로도 겨울을 느끼게 하는 시선이었다.

“자, 자카일 님! 자카일 님!”

며칠 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하르탄 영주의 막내아들, 자카일 하르탄은 어젯밤 몹시 늦은 시간까지 장례식을 마무리하느라 몹시 피곤했다.

그러나 아무도 방해하지 말라는 명을 내린 뒤 잠들어 있던 그를 흔들어 깨우는 손길은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거칠기 그지없었다.

“자카일 님! 일어나세요. 자카일 도련님!”

“무슨 일이야?”

“그, 그자들이 왔어요.”

“…….”

떨리는 목소리에 담긴 혐오와 공포의 감정이 심상치 않았다. 자카일은 눈꺼풀을 무겁게 누르던 잠이 순식간에 달아나는 것을 느끼며 겨우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자들이라니?”

“그것이, 어젯밤 수도에서 불청객들이 찾아오는 바람에 집사님께서 창고에 가두어 두었었는데 그놈들이 방금 전 순식간에 문을 부수고 나와서는 도련님을 뵙겠다고 난동을……!”

자카일은 횡설수설하며 말을 잇는 하인의 뺨을 거칠게 때렸다.

“악.”

“어제 분명히 말하지 않았느냐? 나는 이제 도련님이 아니다. 곧 영주가 될 거라고! 호칭을 분명히 해!”

어젯밤 자카일이 해낸 일은 단순히 죽은 혈육들을 장사 지낸 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태어난 이래 지금껏 그를 상속 자격도 없는 껍데기만 귀족이라 모욕하던 이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었고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물론 아직 큰형이 남기는 했지만, 형은 곧 떠날 테니까.’

그의 형이 평민 여자에게 눈이 멀어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멍청한 계획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자카일은 오늘과 같은 승리를 거두지 못했으리라.

시끄럽게 굴던 이들을 모두 치우고 이제야 푹 자볼까 했는데 이전과 같은 호칭으로 그를 깨운 하인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카일이 뺨을 붙잡고 쓰러져 떨고 있는 하인을 내려다보며 그의 처우를 고민하는 동안, 또다시 문이 벌컥 열렸다.

“자카일 님.”

목소리만 들어도 그가 나이 든 집사의 후계자 아들임을 알 수 있었다. 자카일은 지끈대는 머리를 누르며 날카롭게 입을 열었다.

“나가. 난 좀 더 쉴 테니까. 자는 동안 방해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어?”

“그게 아닙니다, 자카일 님. 그것이…….”

“비켜.”

집사의 아들을 제치고 낯선 목소리가 사이에 끼어들었다. 뒤이어 여러 명의 발소리가 절도 있게 그의 방 안으로 파고 들어왔다.

“당신이 자카일 하르탄입니까.”

“…누구냐?”

겁을 먹지 않으려 했으나 자카일은 저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기가 질렸다. 그의 앞에 나타난 이들이 내뿜는 기세가 워낙 차갑고 흉흉했던 탓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앞에 서 있는 검은 머리칼의 사내는 눈빛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했다.

“이 옷을 보셨다면 곧바로 알아보시리라 생각했습니다만, 아쉽군요.”

자카일의 앞에 선 유더는 그가 느끼고 있을 감정을 모두 손쉽게 느낄 수 있었다. 문을 부수고 나와 이곳까지 오는 동안 마주친 모든 하인들이 그와 같은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게 왜 먼저 예의를 지킨 상대에게 이런 식으로 구는 것일까. 이전 생부터 몇 번이나 겪었던 일이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똑같았다.

“저희는 수도에서 펠레타 공작님의 명을 받고 온 마병단원입니다. 돌아가신 영주님 대신 자카일 님을 뵈러 왔습니다만, 뭔가 착오가 있었는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돌린 유더는 그와 눈이 마주친 하인들이 일제히 물러나는 것을 보며 입꼬리를 지그시 올렸다.

“밤새도록 기다렸음에도 아무도 찾아와 주지 않으시더군요. 의자 하나 없는 방에서 더 기다릴 수는 없을 것 같아 실례를 무릅쓰고 저희가 먼저 찾아왔습니다만, 혹 시간이 괜찮으십니까.”

“이…….”

자카일의 사나운 시선이 문밖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하인들을 향해 꽂혔다. 그러나 그는 이내 흥분을 가라앉히고 입술을 깨물며 일어나 섰다. 젊고 야심 만만한 귀족 사내는 이런 상황에서 제일 먼저 챙겨야 하는 것이 체면임을 잊지 않은 상태였다.

“그랬…군. 얼마 전 일어난 큰 화재 사건으로 아버지와 누님이 돌아가시며 모두 혼란이 컸소. 나도 새벽에 돌아오자마자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잠든 참이라… 손님들에게 실례를 했군. 너그럽게 이해해 주길 바라오. 괜찮다면 응접실에서 잠시 기다려 주겠소? 곧 채비하고 나갈 테니.”

자카일은 자다가 일어난 상태라 세수조차 하지 못한 잠옷 차림 그대로였다. 그런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 보이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애써 이를 악물고 수치심을 참아내는 그를 무심히 바라본 검은 머리칼의 사내는 잠시 후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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