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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72화 (72/805)

72화

유더의 시선이 말 옆에 매달린 작은 새장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예상보다 빠르게 키시아르에게 전서구를 보내야 할 것 같았다.

“공작님. 방금 동부에서 전서구가 도착했습니다.”

“하르탄 영주 쪽인가?”

“아닙니다. 그 근처 마을에 있던 저희 쪽 매수자의 보고입니다.”

책상에 앉아 내내 복잡한 법안이 가득 쓰인 종이만 들여다보고 있던 키시아르의 시선이 드디어 그의 부관 나단에게로 향했다.

“보고라.”

“일전에 동부 쪽 관리들 중 장기적으로 그쪽 동태를 살필 만한 매수자들을 여럿 포섭하라 말씀하신 적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중 한 사람입니다. 혹시나 하여 이번 일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지 물었더니 금방 답이 왔습니다.”

휴가를 나갔던 동부 출신 마병단원이 아직껏 돌아오지 않은 일을 키시아르는 사실 그리 가볍게 평가하지 않았다. 공작파가 득세 중인 동부는 키시아르가 각성하여 마병단을 만들고 싶다고 요청한 이래 각성자들을 은근하게 배척해 왔다.

사건 자체는 별 것 아닐 가능성이 높았으나, 혹시 어느 멍청한 귀족이 마병단원을 욕보여 키시아르와 황제까지 욕보이려 했을 수도 있었다.

때문에 그는 하르탄 영주에게 직접 보낸 서신 이외에도 정보를 얻을 만한 길이 있다면 모조리 알아보도록 나단에게 명령해 두었다. 정작 하르탄 영주의 답은 아직이었는데 다른 이의 답이 이리 빨리 오다니, 어쩐지 느낌이 그리 좋지 않았다.

키시아르는 나단이 가져다준 편지의 봉인을 뜯어 빠르게 읽었다. 잠시 후 그의 붉은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불이 났다는군.”

“…하르탄에서 말입니까?”

“그래. 그것도 영주 성이 다 탔다는 소문이 퍼질 만큼. 시기도 하필 데브란 하르투데가 하르탄에 도착해 머물고 있었을 때와 겹치는 것 같은데, 우연일지 모르겠군.”

“하지만 검은 비둘기 관에서 그런 보고를 받았다는 소식은 없었습니다.”

전국에서 매일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 중에서도 재난과 관련된 부분은 가장 먼저 보고해야 할 중요 보고사항이다.

영주의 성이 다 탈 정도의 화재가 일어났다면 당연히 그 즉시 전서구들을 통해 수도 행정관까지 보고가 올라왔어야 한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보고는커녕 근처 마을에 있을 매수자조차도 사상자가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는 것은 무언가 미심쩍었다.

단순히 사건을 수습하는 것이 늦어져 보고가 늦어지고 있다 볼 수도 있겠지만, 키시아르는 데브란 하르투데의 능력이 불을 불러내는 것임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 또 다른 전서구가 왔군요.”

그때, 창가에 서 있던 나단이 또다시 날아든 작은 새를 손으로 받아들었다.

“하르탄에서 왔나?”

“죄송합니다만 이번에도 아닙니다. 동부의 또 다른 매수자가 보낸 편지입니다.”

“그쪽은 또 무어라 하는가?”

키시아르는 이번 편지를 부관에게 읽도록 시켰다. 새의 다리에 매달린 작은 주머니를 풀고 안에 든 편지를 읽은 나단의 표정이 약간 묘해졌다.

“이번 사건과는 관련이 없는 부정기적 보고였군요. 클레이먼 산에 황궁기사단 10인이 훈련을 왔다고 합니다.”

“클레이먼 산이라면 하르탄 근처였던 것 같은데.”

대륙 지도를 모조리 외우고 있는 키시아르의 기억력은 의심할 필요 없이 완벽했다.

“맞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훈련을 간 기사단원 중, 키올레 다 디아카가 있는 모양입니다.”

키시아르의 모양 좋은 입술이 순간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호오. 그 녀석이 거기에? 어쩐지 이번에 내 보좌에게 또 한 방 먹고 나서는 별말이 없기에 철이 조금 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지?”

키올레 다 디아카는 현 디아카 공작이 나이가 40이 훌쩍 넘어서야 본 막내아들로, 너무 귀하게 자란 나머지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안하무인이라 악명이 자자했다. 디아카 공작은 막내아들이 적당히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황궁기사단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는데, 최근 마병단이 생기면서 그 희망은 보기 좋게 깨지고 말았다.

훈련장에서 만난 일개 평민 출신 마병단원 유더 아일에게 난생처음 모욕을 당한 키올레는 분노를 참지 않고 키시아르에게 몇 번이나 연락을 넣었다. 그 건방진 마병단원을 당장 퇴단시키고 디아카 가로 보내라는 협박에 가까운 연락이었다.

키시아르는 당연히도 그것을 모두 무시했다. 얼마 전에야 겨우 잠잠해져 그 사건도 잊은 줄 알았는데, 며칠 전 유더가 또다시 키올레를 만나 그에게 이전보다 더 큰 모욕을 선사했다.

당연히 이번에도 연락이 올 줄 알았는데 오지 않기에 드디어 부끄러움이란 것을 조금 배웠나 했더니, 그저 디아카 공작이 손을 써서 훈련을 보내버린 모양이었다.

“안 봐도 뻔하군. 앞뒤 모르고 난리를 치니 머리를 식히라고 보내 버렸겠지.”

“혹여 그쪽에서 뭔가를 알고 보낸 것은 아니겠지요.”

“뭔가 알고 있었다면 디아카 공작 그 늙은이는 절대 키올레를 그곳으로 보내지 않았을 거다, 나단.”

신중하게 질문한 나단과 달리 키시아르의 답은 신랄하기 그지없었다.

“나이 들어 이빨이 몇 개 빠졌다지만 늙은 사자도 결국 사자는 사자. 제 막내아들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장 냉정하게 잘 파악하고 있는 것도 그자니 말이다.”

“그래도 만약 그곳에서 서로 또 마주친다면… 이번에야말로 괜찮을지 모르겠군요.”

하필 공작가의 손길이 강하게 뻗치는 동부에서 유더와 키올레가 또다시 마주친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다. 이쯤 되면 대단한 악연이었다.

나단이 약간의 걱정을 담아 중얼거리자 키시아르가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내 보좌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다. …그보다는 화재와 관련한 보고가 조금 신경 쓰이는군.”

“그것에 대해서는 더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가능하면 나단 네가 언제든 곧바로 그쪽으로 갈 수 있도록 준비도 해 둬.”

“제가 직접 말입니까.”

뜻밖의 명령에 나단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 가지 않는 쪽이 제일 낫겠지만, 혹시 모르니 만일을 위함이다.”

“알겠습니다.”

충직한 부관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러면 이제… 하루 동안 몸이 달았을 마법사들을 불러 볼까.”

키시아르는 타이스 율만과 그의 제자가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것이 디아카 공작이 흘린 정보에 의한 일임을 파악했다. 공작가와 그리 연이 깊지 않을 진주탑의 마법사들에게 정보만 제공하고 끝냈다는 것은 그들이 붉은 돌의 힘에 아직 그리 큰 관심이 없다는 뜻이었다.

‘다행한 일이지.’

황제의 건강이 날로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은 모든 귀족들이 알고 있었다. 만약 키시아르와 황제가 붉은 돌 안에 든 미지의 힘을 통해 기적을 기대하고 있음을 알았다면 공작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을 없애려 했을 것이었다. 아니면 그 돌의 힘을 알아내자마자 죽음을 각오하고 득달같이 공작들에게 보고할 완벽한 간자를 보내거나.

그런 면에서 이곳에 온 타이스 율만의 아주뼛속 깊은 마법사다운 성격이 키시아르에게는 제법 행운이었다. 타이스는 이러한 연구의 권위자였으며 연구만 할 수 있다면 영원히 밖에는 입을 다물겠다는 서약서에 기꺼이 손가락을 찍을 만큼 집념이 강했다.

아마 디아카 공작은 타이스가 붉은 돌을 조사하게 될 것이라 믿고, 그가 진주탑에 보낼 소식을 슬쩍 전해 들을 생각으로 정보를 흘렸을 것이다. 그러나 타이스가 이리 쉽게 입을 다물겠노라 서약하고 그의 막내아들에게 원한까지 가지게 될 줄은 과연 예상했을까.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될 공작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생각하니 키시아르는 퍽 즐거워졌다.

타이스를 이용해 보자고 권하던 유더 아일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보좌는 욕심 많은 공작들이 원하는 바를 망가뜨리는 데 아주 탁월한 재능이 있는 듯했다. 마음에 드는 능력이었다.

* * *

“저기 보이는 경비대를 통과하면 거기서부터 하르탄이야.”

얼굴에 흉이 있는 사내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경비대원들을 보며 말을 멈추었다. 그의 말대로 돌을 쌓아 만든 벽과 초소 앞을 지키는 이들 뒤로 어렴풋이 마을 정경이 보였다. 유더는 누구보다 빠르게 앞장서서 그곳으로 다가갔다.

“누구십니까?”

“우리는 마병단에서 단장 키시아르 라 오르 펠레타 공작 전하의 명을 받고 온 단원들입니다.”

“마병단?”

순간 경비대원들의 얼굴 위로 짙은 경계가 스치는 것을 유더는 놓치지 않았다.

“…일단 신분을 확인할 만한 증거를 보여주시오.”

“여기 있습니다.”

유더는 키시아르에게 받은 신분 확인증을 꺼내 보여주었다. 신중한 눈빛으로 몇 번이나 그 종이를 읽은 경비대원이 잠시 후 종이를 돌려주며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요. 틀림없는 것 같군요. 총 4사람. 맞습니까?”

그들의 시선이 유더와 등 뒤에 있을 이들을 훑었다. 유더는 경비대원들이 얼굴에 큰 흉이 있는 사내를 보고 분명 놀랄 것이라 여겼으나, 그들의 눈빛은 평이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이 이상하여 뒤를 돌아본 유더는 가케인과 지미 뒤에 서 있는 사내의 얼굴이 어느새 다른 사람처럼 바뀌어 있는 것을 보고 흠칫 놀랐다.

눈에 띄게 큰 흉이 있기는 해도 수려했던 얼굴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아까 산에서 마주쳤다가 도망쳤던 산적들 중 한 명의 평범한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게다가 그가 입은 옷 또한 유더가 입은 것과 다름없는 마병단 제복이었다.

진짜와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그것은 분명 환상을 덧씌워 만든 모습이었다.

‘환상 능력을 이런 식으로 쓰다니.’

유더와 눈이 마주친 사내가 씩 미소를 지었다. 환상을 보여주는 능력 덕분에 얼굴의 흉을 걱정할 일이 조금도 없었다더니, 과연 대단한 실력이었다. 그의 능력을 미리 보고 듣지 않았다면 변신능력자가 아닌가 의심했을 것이다.

“…네. 4사람. 맞습니다.”

“목적은?”

“그것은 영주님을 만나 뵙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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