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71화 (71/805)
  • 71화

    “그래서, 우리에게 하고 싶다는 말은 뭐지?”

    “협조를 제의하고 싶다. 내가 너희들을 안내하고 도움을 줄 테니, 그동안에는 내 형제들을 쫓지 않는 쪽으로.”

    “거절한다.”

    유더의 답은 차갑고 신속했다. 말은 제 부하들을 위해 희생하는 듯하고 있으나, 눈앞의 남자에게서는 숭고한 의지도, 협상을 제시하는 자의 신중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꼭 제의를 받아들여야 할 이유도 없는데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놈의 무엇을 보고 받아들이겠는가.

    그러나 남자는 싸늘한 거절을 듣고도 그저 한쪽 입술 끝만 한 번 위로 끌어당겼다 내렸을 뿐, 조금도 풀죽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가차 없군. 하지만 그건 아직 동부의 귀족들이 얼마나 아집과 오만으로 가득 차 있는지 잘 모르니 할 수 있는 답이야. 이곳의 인간들은 황제의 명을 받고 온 자들이라 해도 전혀 어렵게 느끼지 않을 텐데, 과연 당신들끼리 얼마나 빨리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 내 생각에는 불가능할 것 같은데 말이지.”

    “뭔가를 더 알고 있는 건가?”

    “궁금하다면 내 제안을 받아들여.”

    “…….”

    “당신들에게 해가 될 일은 하나도 없을 거야. 약속하지.”

    불리한 상황에 놓였음에도 저리 배짱을 부리는 것은 분명 뭔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본래 유더의 방식대로라면 늘씬하게 두들겨 패서 무슨 생각인지 실토하게 만들었겠지만, 그것도 통하는 자가 있고 아닌 자가 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유더의 감은 저 남자가 그런 방식이 통하는 자가 아니라 말하고 있는 중이었다.

    ‘만약 여기에 내가 아니라 키시아르가 있었다면…….’

    유더는 문득 이곳에 없는 이를 떠올렸다. 키시아르 라 오르라면 아마 재미있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상대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둔 뒤 무슨 짓을 하는지 지켜보았겠지.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의 방식은 위험하지만 그만큼 장점도 분명했다. 이쪽의 힘이 월등히 강하다는 확신이 있을 때, 그보다 정보를 얻기 더 좋은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이번 임무는 탐색전. 예전부터 내가 가장 취약했던 부분이고.’

    유더는 결정을 내렸다. 눈앞의 남자가 무슨 능력을 지녔든, 자신보다 강할 것 같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라면 한 번 정도는 키시아르 흉내를 내어 남자에게 장단을 맞춰 봐도 괜찮으리라.

    “좋아.”

    “유더?”

    한참의 침묵 뒤 흘러나온 짧은 승낙에 가케인이 깜짝 놀라 유더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당연히 남자의 제안을 거절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유더는 눈짓으로 그를 진정시킨 뒤 말을 이어나갔다.

    “어디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어차피 거절한다 해도 따라올 것 같으니까.”

    “들켰군. 당신 말이 맞아.”

    기이한 흉터를 지닌 남자는 태연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전에 네가 따라오려 하는 진짜 이유와 동부 귀족들이 무엇을 숨기고 있다는 것인지부터 말해.”

    “성질이 급하군.”

    “사전정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널 그대로 붙잡아 경비대에 넘길 생각이니까.”

    “협박을 꽤 많이 해 본 솜씨야. 좋아. 상호 믿음이 중요할 테니까.”

    그렇게 말한 뒤 남자는 가볍게 손을 들어 허공을 휘저었다.

    그러자 갑자기 주변을 감싸고 있던 공기가 훅 달라지며 베일이 걷히는 것처럼 진짜 하늘이 드러났다. 밝게 빛나는 달과 별 아래, 평화로운 산속 풍경이 보이고 방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말 한 마리가 얌전히 나무에 묶인 채 풀을 뜯고 있었다.

    남자는 자연스럽게 그 말의 묶인 고삐 끈을 풀어 위에 올라탔다. 그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며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갑자기 하늘이 드러났어요! 저 말도 그렇고……. 저게 저 사람의 능력인 거예요?”

    “꼬마 형제가 보기보다 똑똑하군.”

    목소리를 죽여 유더에게 속삭인 지미의 질문을 귀도 밝게 알아들은 남자가 나지막이 대꾸했다.

    “그 말대로야. 이게 바로 내 능력이지.”

    “…환상?”

    유더가 조용히 물었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멀쩡한 눈동자 위로 이채를 띠었다.

    “그래. 당신들의 능력처럼 대단하진 않지만 여러모로 쓸모가 있어. 이 능력 덕분에 나는 이런 얼굴임에도 어디서든 자유롭고, 당신들 같은 손님이 와도 금방 알 수 있지.”

    설명은 모호했으나 말하고자 하는 바는 대충 짐작이 갔다. 그의 환상 능력이 단순히 흉한 모습을 숨기는 수준을 넘어 어느 한 영역 전체를 뒤덮고 그곳에 침범한 이들을 파악할 정도로 뛰어나다는 뜻이었다.

    유더는 환상을 보여주는 능력자를 이전 생에 두어 명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능력은 눈앞의 남자처럼 뛰어나지 않았다. 저 정도의 실력을 지닌 자를 이전 생에서는 본 적이 없다니, 산적들과 어울리다 일찍 죽기라도 한 것일까.

    “언제든 도망칠 수 있다 생각해 그리 당당했던 거군. 무슨 능력인지 알아도 쉽게 눈치채기 힘들 테니까……. 까다롭네.”

    가케인도 남자의 말 속에 숨겨진 의도를 파악한 듯 찌푸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자, 더 자세한 건 가면서 이야기하지. 마을까지 그리 멀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시라도 빨리 가는 것이 좋을 테니.”

    사내의 제안에 유더는 조용히 말에 올랐다. 가케인과 지미도 다시 말에 탔다. 그들은 여유롭게 앞서 나가는 사내의 뒤를 따르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내 형제들 중, 본래 마을에 방문해 동향을 살피고 식료품을 사오는 일을 담당했던 이가 있었지. 그런데 얼마 전, 그 형제는 평소처럼 마을로 향했지만 다시 돌아오지 않았어. 다른 형제들은 그가 식료품을 살 돈을 들고 도망쳤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흉터를 지닌 사내의 목소리는 어둠 속에서 귀를 스치는 바람과 말발굽이 땅을 박차며 내는 소음 사이에서도 기이하게도 선명하게 잘 들렸다.

    “그 형제는 분명 붙잡힌 거야. 하지만 그가 어디에 갇혀 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여태 구할 수 없었어. 당신들이 찾는 그자가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그게 그것과 무슨 상관이에요?”

    지미가 용감하게 표정을 잔뜩 찡그리고는 질문을 했다.

    “그날 일어난 불로 인해 늙은 영주와 작위를 미리 물려받기 위해 방문했던 장녀 부부가 사망했어. 그리 큰일이 일어났는데도 남은 두 아들은 이 일을 아직 수도에 보고하지 않았다더군. 마을 사람 모두 당신들이 찾는 그자가 곧 사형될 것이라 떠들고 있지만 정작 그가 어디에 갇혀 있는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어. 그의 가족들도 그날 이후 모두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그것을 입에 담는 자는 없더란 말이지. 뭔가 이상하지 않나?”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들을 어딘가에 가두었고, 사건을 조용히 묻으려 한다는 뜻인가?”

    유더가 짤막하게 질문하자 사내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곳 동부에서는 황제보다 디아카 공작가를 왕처럼 모신다고들 하지.”

    다소 뜬금없이 느껴지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최근 황제가 동생을 시켜 마병단을 만들었다는 소문이 퍼진 이후부터 동부에서 각성자를 상대로 한 박해가 더욱 극심해졌다는 사실을 아나? 눈에 띄는 능력을 지닌 평민 출신 각성자들이 갑작스레 누명을 쓰고 이유 없이 옥에 갇히는 일이 늘었다는 것도?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몰라.”

    “제가 시험을 보러 가기 전까지 근처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말은 들은 적 없어요! 물론 수도와 달리 이곳에선 각성자들이 무섭다고 피하는 사람들이 많긴 했지만…….”

    “지미.”

    유더는 짧게 지미의 이름을 불러 입을 다물도록 했다. 하지만 사내는 이미 지미를 향해 시선을 돌린 뒤였다.

    “이곳 출신이라고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지. 특히 너처럼 어린 소년이라면 접하는 정보에 한계가 있으니 더더욱. 하지만 네 부모님도 그랬을까?”

    사내의 말에 지미의 표정이 순간 일변했다.

    “무슨 뜻이에요?”

    “보통은 아무리 대단한 힘을 가졌더라도 어린 자식을 홀로 그리 먼 곳까지 보내려 하지는 않아. 하지만 이곳에 있는 것이 수도로 가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고 생각했다면 어떨까.”

    낮은 목소리가 모두의 머릿속에 강한 파문을 던졌다.

    “마병단 시험을 보려 결심한 건 꼬마 형제의 결정이었나? 아니면 부모의 권유로 시작된 일인가? 시험에 합격하지 못할 경우에는 어떻게 하라고 말했지? 곧바로 돌아오라고 말했나? 나라면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 두었으니 그곳에 한동안 머물고 있으라고 말했을 텐데.”

    “…….”

    유더는 지미의 벌린 입과 떨리는 눈빛 속에서 경악을 읽었다. 사내의 추측이 정답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뜻이었다.

    “내 말은 거짓이 아니야. 내가 이곳에 온 뒤 몇 달간, 동부는 점점 더 우리와 같은 이들이 살기 힘든 곳으로 변했어. 내 형제들 중 많은 이들이 그렇게 도망쳐 이곳까지 왔지.”

    유더는 사내가 언급했던 ‘황제보다 디아카 공작가의 영향이 더욱 강한 동부’라는 말에 대해 생각했다.

    오르 제국 황가와 4대 공작가의 세력이 반목과 화합을 반복한 역사는 몹시 오래되었다. 황권이 강할 때는 공작가의 세력이 약해졌고, 반대로 황권이 약해질 때에는 공작가의 세력이 강해지고는 했다.

    이전 생에서 유더가 모셨던 황제는 디아카 공작가의 피를 이은 양자 출신이었기에 공작가들과 그리 반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황제는 어떠한가?

    키시아르가 만든 마병단의 힘이 황제에게 득이 된다고 판단했다면 4대 공작가는 그것을 가로막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마병단의 일원인 데브란이 이곳에서 갑작스레 붙잡힌 것도 어쩌면 그것과 관련된 일인 것일까? 데브란을 만나봐야 확실해지겠지만 가능성은 충분해 보였다.

    ‘이전 생에서는 이 시기에 전체휴가가 없었고, 데브란이 사라지지도 않았으니 동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없었겠지.’

    “나는 당신들이 찾는 자가 내 형제와 같은 곳에 잡혀 있거나, 적어도 단서가 될 만한 무언가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유더와 마병단원들을 따라온 것이라 말하며 사내는 모든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유더는 그가 거짓을 말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여겼으나, 경계심을 늦추지는 않았다.

    같은 힘을 가졌다면 모두가 형제라 말하면서도 그 속에 감춰지지 않는 냉정하고 서늘하기 그지없는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과 함께 가는 이유가 정말로 그저 동료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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