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70화 (70/805)

70화

“횡포?”

“뭐, 흔한 얘기 아니겠어? 너무 흔해서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만큼.”

남자가 그렇게 말하는 동안 산적들이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더가 굳이 그들을 제지하지 않자 산적들은 곧 꽁지가 빠지게 뛰어 남자의 등 뒤에 숨었다.

“대장.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어?”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기사들이 오질 않나, 불이 나질 않나, 거기다 이젠 이런 놈들까지 오다니……. 정말 마가 끼었나.”

기사와 불. 유더는 그들의 작은 속삭임 속에서 신경 쓰이는 단어를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지? 기사와 불이라니.”

“당신들. 수도에서 이곳으로 온 거지? 누군가를 찾으러.”

산적 대장은 대답 대신 반문을 했다. 유더는 그의 멀쩡한 오른쪽 눈동자 속에 어른대는 묘한 기운을 보며 잠시 대답을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말하는 것을 보니 뭔가 아는 모양이지?”

“안다고 해야 하나. 당신들이 입은 그 옷과 같은 옷을 입은 자가 며칠 전 이 근처 마을에 왔었던 건 알고 있어.”

“데브란이군.”

가케인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린 그자의 이름까진 몰라. 다만 3일 전, 그쪽 마을에서 갑자기 불이 났다. 반나절을 타오르다 겨우 꺼졌을 땐 영주의 성을 포함해 마을 반이 사라졌다더군.”

“불?”

유더는 데브란의 능력이 불이었다던 말을 떠올렸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 불길함을 뒷받침하듯 산적 대장의 얼굴에 기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자는 현장에서 범인으로 잡혀 감옥에 갇혔다. 나는 불의 원인과 주변 동태를 살피기 위해 잠시 그쪽에 다녀왔고, 그때 그자와 관련한 이야기를 들었어. 곧 사형 집행이 있을 것이라고 다들 떠들어 대더군.”

“설마 정말 데브란 형이……? 어떻게 하죠?”

지미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유더에게 물었다. 단순히 탐색 임무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 순식간에 심상치 않은 엄청난 사건으로 확대되었으니 놀랄 만도 했다.

유더는 당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가케인과 지미 대신 마음을 더욱 서늘하게 가라앉혔다. 정황상 저 산적 대장이 이야기한 방화사건의 범인이 데브란일 확률은 몹시 높아 보였다. 하지만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법이었다.

게다가 기묘하게 순순하고 친절한 저 산적 대장의 태도도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신 일당들이 떠들어 댄 기사 이야기는 그러면 뭐지?”

“아. 그건 정말로 별 것 아냐. 어제 번쩍번쩍한 갑옷을 걸친 기사 나으리들이 이 길을 지나갔거든. 통행료를 징수하려던 내 형제들은 그리 귀하신 분들은 처음 보는 바람에 아주 깜짝 놀랐지. 하지만 알아보니 화재 사건 때문에 온 게 아니라, 기사단 내 자체 훈련 때문에 온 것뿐이라고 하더군. 그들은 이곳을 지나 화재가 난 마을 옆의 산으로 갔어.”

산적 대장이 어깨를 가볍게 올렸다 내리며 대답해 주었다.

명망 있는 기사단들에는 으레 인적이 드문 시골에 찾아가 훈련을 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런 이들 중 일부가 이곳에 온 모양이었다.

“자. 이제 내가 아는 건 다 말해 주었어. 더 물어볼 것이 있나?”

대장 사내의 부드러운 시선이 유더의 얼굴로 향했다. 유더는 그의 눈빛이 기묘하다 생각했지만 정확히 어느 부분이 그러한지 아직 집어내지 못해 약간 답답했다.

“너와 네 부하들, 여기서 언제까지 어중간한 산적질이나 하며 살 셈이지?”

“어중간한 산적질이라. 그렇게 보이나?”

과장된 말투로 대꾸한 사내가 낮게 웃음을 흘렸다.

“그렇지 않아도 돈이 꽤 모였으니 슬슬 이곳을 뜨려 생각하던 중이었어. 제국 내에서는 범죄 기록이 남아 더 이상 살 수 없고, 남은 길은 그것뿐이니까.”

“굉장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처럼 말하는데.”

“실제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맞으니까.”

대장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보는 이의 간담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일그러진 채 움직이지 않는 왼쪽 얼굴과 냉혹하면서도 수려한 오른쪽 얼굴이 어울리지 않는 조화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의 형제들 중 그 누구도 자신이 고향을 떠나야 할 만큼의 중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자는 없어. 길 가던 이의 주머니를 조금 턴 것이 죽을 정도의 죄라고 생각하나?”

“무슨 헛소리냐.”

가케인이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대장의 오른쪽 눈동자가 가케인에게로 향했다. 역시나 부드럽기 그지없는 시선이었다.

“내 형제들은 모두 능력을 각성했다는 이유만으로 배척받고 누명을 쓴 채 쫓겨난 이들이야. 비록 살던 곳을 떠나 이런 꼴이 되기는 했지만, 우리는 우리만의 규칙과 양심이 있어. 우릴 쫓아낸 자들과는 다르지.”

대장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그러나 동시에 기이한 힘을 품고 있었다. 유더는 대체 그의 능력이 무엇일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물어봐도 대답해 주지 않겠지.’

“너도 그런 식으로 쫓겨난 자인가?”

“나? 하하. 그렇다면 그렇고, 아니라면 아닐 수 있지.”

“너희가 이곳을 뜨도록 우리가 보고만 있을 것 같아?”

가케인이 끼어들자 대장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그 외에 뭘 할 수 있단 말이지?”

대장이 그렇게 반문할 줄은 몰랐는지, 가케인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뭐?”

“나는 필요한 정보를 모두 주었어. 당신들이 찾고 있는 이는 지금 당장 찾으러 가지 않는다면 곧 사형당하게 될 거야. 그런데 고작 우리 같은 좀도둑들이나 잡아들일 여유가 있다고? 하하.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란 것이 있지, 형제여. 당신들이 우릴 먼저 잡으려 한다면 우린 가진 힘을 모두 써서 반항할 거야.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해.”

“내가 왜 네놈의 형제냐.”

“같은 힘을 가졌다면 우린 모두 형제요, 자매가 아니겠어.”

말이 통하지 않으니 미친놈임에 틀림없다. 유더는 자신을 돌아보는 가케인의 눈빛에서 그러한 마음을 읽었다.

‘…확실히 영악하군. 그 짧은 사이에 이쪽이 무엇을 위해 온 것인지 파악하고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게다가 대장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이 유더의 경계심을 더욱 자극했다.

유더는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짧게 숨을 내쉬었다. 이곳에서 모든 힘을 한번에 사용한다면 눈앞에 있는 이들 정도는 잡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산적들의 본거지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이상 그것으로 끝이 아닐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말 그대로, 그들은 아직까지 좀도둑이었으므로.

‘그것도 우리에게 적의를 보이지 않는.’

“화가 났나? 아니면 놀란 건가? 드디어 그 얼음 같던 표정에 변화가 생겨 기쁘군.”

유더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한 것을 본 대장이 웃으며 질문했다.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야.”

“생각?”

“이 일을 해결하고 다시 돌아와 너희들을 전부 잡아들이려면 대충 며칠 정도 소요될지.”

“…….”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품은 의미는 잘 갈린 칼날만큼 서늘했다. 대장의 뒤에 숨어 눈치를 보던 산적들이 유더와 눈이 마주친 순간 힉 하는 소리를 내며 뒷걸음질을 쳤다. 유더의 말이 결코 농담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었다.

“……하하. 이것 참. 우리가 오늘 대단한 형제를 보게 되는군.”

“너 같은 형제 둔 적 없어.”

그래, 그거야 유더! 잘한다! 가케인이 속 시원한 표정으로 몰래 주먹을 불끈 쥐고 응원했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우리는 결코 죄 없는 이들을 해치지 않아. 내 형제들은 내 부탁으로 같은 힘을 지닌 형제들에게 손대지 않지. 우리는 2년 전부터 모든 것을 잃어왔고, 남은 것은 그저 도망쳐 살아남는 것뿐인 패배자들이야. 그런데도 우릴 잡아들이겠다고?”

부드러운 독사 같은 혓바닥이 밑바닥에 잠든 죄책감을 자극했다. 지미가 그에 자극당했는지 울 것처럼 찡그리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의 말이 사실이라고 그 누가 보증한단 말인가? 교묘한 말 속에 어떤 진실과 거짓을 숨겼는지 알 수 없는 한 그의 말을 모두 믿을 수는 없었다.

고작 감정을 자극하는 저런 말에 휘둘리기에 유더 아일은 너무 많은 구정물을 구르며 살아왔다.

유더는 지미의 앞을 가리듯 서서 시야를 차단하며 입을 열었다.

“말장난이나 할 시간에 나라면 조금이라도 더 도망치겠어. 너야말로 우선순위를 착각하지 마라. 아무래도 지금 당장 내 우선순위가 바뀔 것 같으니까.”

사나운 어투에 대장이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그는 잠시 후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대, 대장. 어서 가자.”

“왜 자꾸 건드리고 그래. 보통 인간이 아닌데.”

“너희 먼저 가.”

붙잡는 산적들에게 대장이 조용히 명령했다. 웃음을 그친 뒤 흘러나온 목소리는 다정하면서도 스산했다.

“응?”

“나는 이 사람들에게 더 할 말이 생긴 것 같거든.”

“무, 무슨 소리야. 대장 없이 우리가 어딜 가. 어떻게…….”

“나는 뒤늦게라도 합류할 수 있어. 돌아가서 에르시와 먼저 떠나도록 해. 곧 찾아갈 테니까.”

“대장……!”

산적들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으나,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뜻을 짐작할 수 없음에도 군말 없이 따르는 것을 보면 그는 제 패거리들에게서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는 듯했다.

“기다릴 테니까 어서 와야 해 대장!”

마지막까지 애절하게 외치며 사라진 산적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인 대장이 몸을 돌려 유더를 바라보았다. 홀로 남았음에도 그의 시선은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내 형제들을 붙잡지 않아 줘서 고마워.”

“머리를 두고 꼬리를 먼저 잡을 필요는 없으니까.”

유더의 대답을 들은 그가 한쪽 입술만 끌어올려 웃었다. 텅 빈 왼쪽 동공이 어둠 속에서 뜻을 알 수 없이 반들거렸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고 싶다는 말은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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