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알릭의 눈에 비친 마병단 숙소 건물은 오기 전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황궁기사단 부지 안에 있다기에 당연히 낡은 건물을 하나 대충 고쳐 쓰는 줄 알았는데 설마 토대부터 새로 다진 곳이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튼튼하게 새로 지은 건물 내부를 장식한 값비싼 자재들은 이곳을 만든 이가 품었을 기대와 포부가 얼마나 대단했을지를 짐작하게 했다.
‘황궁에서 일하던 이들은 펠레타 공작이 각성한 김에 그저 심심풀이로 마병단을 만들어 본 것뿐이라 떠들었었는데……. 이런 게 어떻게 심심풀이로 만든 곳이겠어. 아무도 이곳에 와보지 않았으니 그렇게 태평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거지!’
이곳에 유더 아일처럼 뛰어난 실력을 지닌 이가 몇 명만 더 있어도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위험천만한 무력집단이 될 것이다. 황권을 노릴 수 없는 공작이 황제의 묵인 아래 이렇게 야심 가득한 세력을 만들어 하려는 일은 대체 무엇일까.
오르 제국은 오랫동안 변화가 없기로 유명한 나라였다. 누구도 그들이 이룩한 질서를 깨트릴 수 없었다. 밖에서든, 안에서든 말이다.
그러나 알릭은 스승과 자신이 어쩌면 그 제국이 드디어 격변의 순간을 맞이하려는 위험한 때에 발을 들여놓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 * *
7일의 휴가 기간이 끝나기까지 하루가 남았다.
오늘만은 가케인과 칸나에게도 쉬라고 말했기에 실질적인 진짜 휴일이라 할 수 있었다. 유더는 속속 돌아오고 있는 단원들을 피해 아침 일찍 조용히 황궁기사단 부지 바깥으로 향했다.
제복을 벗고 평범한 옷을 걸친 채 거리를 걸어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옛 기억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오래된 거리를 구불구불 돌아가는 동안 수많은 이들이 유더를 스쳐 지나갔다.
본래 7벽 안쪽 구역에는 평민들이 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은 이들이 몰래 비집고 들어와 자리를 잡았고, 지금은 아예 그것이 당연한 풍경처럼 변화해 버렸다.
자로 잰 듯 균형을 맞춰 건설된 건물들이 대부분인 다른 구역과는 달리, 7벽 쪽이 큰길에서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가도 금세 미로처럼 변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유더는 그 어지러운 길을 능숙하게 파고들어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주변 풍경은 점점 더 더럽고 어두워졌다. 다닥다닥 붙은 건물 그림자 사이로 코가 썩을 듯한 악취가 풍기기 시작했다.
골목 사이사이 거미처럼 긴 다리를 뻗은 어둠 속에 혹시나 어리숙하게 길을 잃은 이방인의 주머니를 털 수 있을까 기대하는 눈동자들이 몰래 번들거리며 뒤를 쫓았다. 물론 그들은 얼마 되지 않아 새로운 방문자가 이 빈민굴에 몹시 익숙해 보인다는 것을 깨닫고 눈치 빠르게 포기했다.
유더가 멈춘 곳은 오래된 골목 구석에 있는 아주 작은 약 가게 앞이었다. 사실 처음 방문한 사람이 그곳의 정체를 깨닫기란 몹시 어려웠다. 가게 자체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운 데다 간판은 너무 낡아 글씨를 읽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지경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더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 이미 알고 있었기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그대로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꺼져. 오늘은 장사 안 해.”
지옥의 비명처럼 끔찍한 소리를 내며 열린 문 안에서 누군가 거기에 지지 않을 만큼 거친 어조로 소리쳤다.
유더는 벽과 천장이 보이지 않을 만큼 잡동사니가 가득 쌓여 있는 내부에는 전혀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의 눈길이 향한 곳은 카운터 위에 방만하게 올라와 있는 두 개의 발 쪽이었다.
“뭐 해, 귀가 먹었어? 장사 안 한다니까! 나가!”
“약을 사러 온 게 아니라서.”
“…….”
방만하게 흔들리던 두 개의 발이 그 순간 멈추었다. 잠시 후 누군가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카운터 너머로 얼굴을 내밀었다. 이런 어지럽고 더러운 공간 속에 몸을 눕히고 있던 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시선을 끄는 외모의 남자였다.
“뭐야? 너는.”
유더는 그의 부스스한 잿빛 머리칼과 잔뜩 찡그린 미간을 보며 과거를 떠올렸다. 이전 생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모습에 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이야기를 좀 듣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
“……너 나 알아? 누군데 다짜고짜 와서 반말에 명령질이야?”
“루마의 7벽을 지키는 가디언, 이논.”
유더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들은 남자의 표정은 반대로 크게 변화했다.
“…방금, 뭐라고?”
“루마의 7벽을 지키는…….”
“잠깐. 잠깐, 잠깐.”
재빠르게 카운터 밖으로 몸을 날린 남자가 유더의 입을 막았다. 그의 눈 속에는 의문과 놀라움, 그리고 경계심이 가득 차 있었다.
“누구야, 너. 어떻게 알았어. 누가 알려준 거야? 이상하다……. 분명 모르는 얼굴인데?”
바로 이전 생의 당신 스스로가.
유더는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을 조금 아쉽게 여기며 입을 막은 손 쪽을 가리켜 보였다. 그렇게 계속 막고 있으면 대답을 하려 해도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남자, 이논의 표정은 여전히 의구심에 가득 찬 상태였으나 결국 손을 떼어주었다.
유더는 그의 의문에 답하는 대신 조용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누가 가르쳐주었는지는 지금 답할 수 없어. 하지만 맹세코 억지로 취득한 정보는 아니야. 내가 알기로 당신은 이 이름을 말한 자에게 반드시 협조해야 해. 그렇지?”
이논의 눈빛이 순간 완전히 경악스레 변했다.
“대체… 그것까지 안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 같은 녀석 모르겠는데 진짜 어떻게 된 거지? 내가 혹시 머리에 문제가 생긴 건가?”
그는 유더를 모르겠지만, 유더는 그를 알았다. 그는 이전 생에서 황제의 비밀 임무를 수행하다 크게 상처를 입고 빈민굴 주변에 잠시 몸을 숨기고 있던 유더를 도와준 이였다.
말투는 험해도 보기보다 오지랖도 무척 넓고 정이 많았다. 아는 것도 불가사의할 만큼 많아서 가끔은 어지간한 정보 길드보다도 더 깊은 정보를 아무렇지 않게 알려주고는 했다. 그때의 그는 그것이 빈민굴에서 오래 살다 보니 주워들은 것이 많았기 때문이라 주장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 세상에 재앙이 창궐하고 유더가 이상한 징조의 뒤를 쫓기 시작했을 때, 이논은 갑자기 실종되었다.
사라지기 전 그는 아무래도 자신도 수도에서 나가 무언가를 알아보아야 할 것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무언가를 예감했던 것처럼 그가 약 가게에 남기고 간 마지막 편지를 유더는 몇 달이 지나서야 발견했다.
편지에는 그가 사실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수도의 7벽을 지키기 위해 오래 전 대마법사 루마와 계약한 가디언이라는 존재라는 사실과 그 외 자신과 관련된 정보가 몇 가지 더 적혀 있었다.
‘이 형님의 말을 믿든 말든 그건 네 자유야. 하지만 혹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내가 너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루마의 가디언 이논이라는 이름을 말해 줘. 그러면 나는 반드시 다시 널 돕게 될 테니까. 너의 앞길에 행운을 빈다, 유드레인.’
이논은 간혹 멋대로 자신을 형이라 칭하며 유더에게 오지랖을 부릴 때가 있었다. 단 한 번도 형이라 불러준 적은 없었지만, 유더가 죽기 직전 스쳐 지나간 아쉬움 속에는 그의 실종사건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신 머리는 멀쩡해. 그리고 내 이름은 유더 아일. 앞으로 자주 보게 될 테니 외워 둬.”
유더는 이전 생의 짧은 인연 속 기억을 담아 새로운 자기소개를 했다.
“이름을 들어도 역시 모르겠는데……? 그리고 내가 왜 너와 자주 봐야 한단 거냐?”
이논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현재 날 도와줄 사람은 당신밖에 없으니까.”
유더는 대충 주변에 방치되어 있던 의자 하나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 자연스러운 태도를 보며 뭐 이런 놈이 다 있느냐는 듯 입을 떡 벌린 이논의 시선은 무시했다.
이논은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지, 아닌지를 귀신같이 잘 파악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니 지금부터 할 말은 최대한 솔직한 마음으로 해야 했다.
“현재 나는 역대 공작 중 라 오르의 성을 지닌 채 공작이 되었던 이들의 정보가 필요해. 아는 게 있다면 작은 것이라도 좋으니 말해줘. 특히 현재 같은 조건으로 공작이 된 키시아르 라 오르에 대한 것이라면 더욱.”
“…도와주겠다고 한 적도 없는데 벌써 말하는 건 뭐야? 너 혹시 역모를 계획하고 있기라도 한 거냐? 그런 거라면 나는 절대 안 도와줘.”
“아니야. 알려준 정보는 나만 알고 있을 거고, 어디에도 쓰지 않을 거야.”
이전 생에는 이논이 말하는 정보들이 결국 뒷골목에서 흘러나온 정보라 생각하여 크게 신뢰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유더는 과거의 자신이 이용하다 여러 번 뒤통수를 맞았던 정보 길드들보다 이논을 믿기로 했다.
“내겐 아주 중요한 일이야. 다른 곳에 의뢰할 수는 없어. 부탁할게.”
유더의 말에 이논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그는 깊이 숨을 내쉬고는 몸을 웅크렸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좁은 가게 안을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거참. 미치겠네.”
“…….”
“황실의 역사와 관련된 정보라. 그게 얼마나 까다로운 건지나 알아?”
“알아. 그러니까 당신에게 부탁하는 거야.”
“어쩐지 오늘 아침부터 일진이 별로 좋지 않더라니, 이런 미친놈을 만나려고 그랬나.”
그는 그렇게 말한 뒤 한참 동안 더 안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는 결국 쌓아 놓은 잡동사니 탑 하나를 넘어뜨리고 벌컥 화를 낸 뒤에야 겨우 제자리에 멈춰 섰다.
“……본래대로라면 그냥 내쫓았을 거야. 하지만 일단 한 번은 도와줄게. 내 이름을 걸고 찾아왔으니까.”
유더는 곧바로 고맙다고 인사하려 했다. 그러나 이논이 말허리를 자르는 것이 더 빨랐다.
“그런데 네가 요청한 정보는 너무 위험하고 범위도 꽤 넓어. 황족들과 관련된 정보는 내게 우선도가 떨어져 확인해 볼 시간이 좀 필요해.”
“얼마나?”
“적어도 3일.”
“알겠어.”
유더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이논의 표정이 또다시 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