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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65화 (65/805)

65화

알릭이 내심 구시렁대는 동안 키시아르는 노마법사와 그의 제자를 자리에 앉도록 권했다. 키시아르의 뒤에는 유더가 부관처럼 서 있었다. 얼굴이 아까보다 깨끗해지기는 했어도 차림은 여전히 너저분한데, 키시아르는 부하의 차림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그것은 공작의 대범함을 뜻하는가, 아니면 타이스와 알릭에게는 일말의 예의조차 갖출 필요가 없다는 무언의 경고인가. 알릭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먼저 입을 연 쪽은 타이스 쪽이었다.

“전갈도 없이 찾아온 무례한 늙은이를 단장께서 이리 몸소 맞아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는 진주탑의 마법사, 타이스 율만입니다. 이쪽은 저의 불민한 제자 알릭 펠긴이지요.”

“진주탑의 마법사 알릭 펠긴입니다.”

두 마법사의 인사를 받아 준 키시아르가 유더 쪽을 향해 우아하게 손을 올렸다.

“이쪽은 마병단 단장 보좌, 유더 아일 경이오. 내 보좌가 저번에 황궁에서 두 분과 마주쳤었다 들었는데 오늘 이렇듯 다시 만나게 된 것을 보면 아마 깊은 인연이 있는 것 같군.”

사실은 들은 것이 아니라 키시아르가 변장한 채 몰래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지만 두 마법사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말씀대로입니다. 아일 경이 아니었다면 저는 오늘 여기까지 올 수 없었겠지요. 아까는 미처 경황이 없어 감사 인사를 하지 못했다네. 고맙네, 아일 경.”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나이도 젊디젊은 이가 경험이 많은 이들이 주로 맡을 보좌 자리에 앉은 데다 벌써 경의 칭호를 받다니. 알릭은 겉만 보고는 짐작할 수 없었던 유더의 정체에 상당히 놀랐다. 어쩐지 귀족 앞에서도 제 힘을 믿는다 큰소리를 치더니 근거가 있는 당당함이었다.

‘하긴. 아까 그 키올레라는 기사를 단숨에 기절시켜 버린 걸 보면 보통 실력자가 아니야. 진주탑에서도 속성마법을 그 정도로 빠르고 간단하게 쓰는 이를 본 적이 드물어. 여기엔 저 정도 실력자들이 많은 건가? 아니면 유더 아일이 대단한 건가?’

알릭은 유더의 흰 얼굴을 요모조모 살폈다. 뜻을 알 수 없는 냉정한 표정과 그림자가 드리운 눈은 약간 겁이 났지만, 그래도 저와 스승을 구해 준 이라 생각하니 호감이 갔다.

“타이스 율만. 당신의 이름은 익히 들었소. 진주탑 내에서 명망 있는 원로로서 지금은 연구에 힘쓴다고 들었는데, 이름과 신분을 감추고 여기까지 온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도 되겠소?”

“저를 아신다면 이미 목적도 짐작하시지 않으셨겠습니까?”

타이스는 태연하게 웃으며 긴 수염을 쓰다듬었다.

“2년간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던 것을 단장님께서 가지고 오시는 데 성공했다 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마력을 연구하는 자로서 어찌 달려오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저는 그것을 보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런 소문이 퍼졌나. 참으로 과장된 말들이라 생각지 않소? 도대체 누가 그런 말을 진주탑까지 전해 날랐는지 궁금하군.”

“그것이 무어 중요하겠습니까? 단장님과 마병단의 명성이 이미 전 대륙에 퍼지고 있으니 자연히 모두가 알게 되는 것을요. 입이란 세상에서 가장 막기 힘든 무기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타이스 율만의 말솜씨는 몹시 교묘했다. 붉은 돌을 조사하고 싶어 몸이 달은 것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제가 정보를 얻은 루트 따위는 중요치 않은 일처럼 얼버무려 넘겼다.

키시아르도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웃는 얼굴 위로 서늘함이 더해졌다.

“황제 폐하께서는 큰일을 하실 때 무엇보다도 신의를 중요시하신다오. 그분의 눈을 피해 이곳으로 온 것이 그리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지는 않소.”

“단장님. 모든 것이 과장되었다 하더라도 결국 붉은 돌이 본디 있던 곳에서 사라진 것만은 사실이 아닙니까? 저도 처음에는 황제 폐하를 뵈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외국 사신들의 알현조차 보지 않으신 지 오래되었음을 알고 나니 무작정 기다리는 것보다는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누구든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키시아르가 그 말에 침묵을 지키자 타이스는 힘을 얻은 듯 솔직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자랑은 아닙니다만, 나름대로 한길에만 매진하여 원로의 칭호를 얻은 바 있습니다. 대륙의 그 누구도 저만큼 붉은 돌에 대해 잘 조사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이 늙은이가 바라는 것은 그저 그것을 한 번만이라도 직접 보고 안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연구할 기회를 얻는 것뿐이니 부디 의심치 마십시오. 누가 저를 이곳으로 보냈든, 제게는 중요치 않습니다. 필요하다면 서약서도 쓰지요.”

“…….”

“단장님께서도 그 돌을 잘 조사할 이가 필요하다 여기기에 저희의 얼굴을 이렇듯 마주하신 것이 아닙니까.”

‘처음부터 자신감을 갖고 있었군.’

유더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추측했다.

‘타이스 율만은 황제와 키시아르가 궁중마법사들을 완전히 믿지 못할 것임을 알고 달려온 거야. 언젠가 누군가는 조사해야 할 일이고, 자신의 실력이 제일 나으니 결국 맡길 것이라 생각해 배짱을 부리러 온 거군.’

황제와 키시아르가 돌을 꼭 소유하고 싶어한다면 타이스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이다. 늙은 마법사는 연구만 맡겨 준다면 다른 것은 전부 함구하겠다는 제법 먹음직한 제안을 던졌다. 그렇다면 이제 키시아르가 내놓을 수를 지켜볼 때였다.

“글쎄, 사실 황제 폐하께서는 그 돌 때문에 대륙 전체의 평화가 흔들리는 것보다는 당장 파괴하는 쪽이 낫다 이르신 적이 있소. 그리고 우리 모두 알겠지만 파괴하는 데에는 굳이 조사가 필요하지 않지.”

“…파괴를 위해 회수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순간 타이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하하. 회수가 되었는지 아닌지는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하지 않았소. 하지만 필요하다면, 그렇게 되겠지.”

늙은 마법사의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스치는 것이 보였다.

저리 확신하는 것은 오르 제국 황제 측이 이미 돌의 조사를 어느 정도 끝냈다는 뜻일까? 그 돌에 든 힘은 사실 별것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린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타이스 율만을 흔들기 위함인가.

타이스 율만은 키시아르의 얼굴을 면밀히 살폈다. 나른한 미소 속에서 본심을 읽을 수는 없었다. 다만 필요하다면 파괴할 것이라 말하던 순간만큼은 의심의 여지 없이 진심이 느껴졌었다.

‘제국은 변화를 바라지 않을 테니…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가져야 할 힘이라 생각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파괴가 낫다 여기겠지. 가능성 있는 이야기야.’

하지만 그 돌에 별다른 힘이 없다 하여도 타이스 율만은 그것을 꼭 보고 싶었다. 진주탑에서는 반드시 그 돌을 탑으로 가져올 것을 명했으나 타이스는 그 좋은 연구 기회를 가능하면 홀로 독점하기를 원했다.

상대가 더 아쉬울 것이라 생각하여 배짱을 한 번 부렸는데, 이리되면 제 쪽이 아쉬워졌다.

타이스 율만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4공작가는… 파괴보다 더 나은 방안이 있다 여길 것 같습니다만.”

그것은 돌려 말한 신호였다. 진주탑과 타이스 율만에게 붉은 돌과 관련된 정보를 흘린 이가 4개의 공작가 중에 있다는 뜻이었다.

‘혹은 전부 다거나.’

유더가 드디어 가진 패를 더 내놓은 타이스 율만을 보고 있는 동안 키시아르는 꼬아 올린 무릎 위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더 나은 방안이라. 당신도 그리 생각하는가?”

황제냐, 4공작가냐의 기로에서 선택을 바라는 듯한 짧은 물음이었다. 그러나 율만은 거기 내포된 또 다른 뜻을 알아차렸다.

잠시 후 그의 얼굴 위로 미소가 떠올랐다.

“어이구. 이 늙은이는 그저 나이든 일개 마법사일 뿐입니다. 그런 큰일에는 관심이 없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무릎을 두드리던 키시아르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그랬지. 아쉽군. 현명한 원로의 의견을 얻고 싶었는데 말이오.”

그렇게 말한 뒤 그는 유더를 돌아보며 방금까지 짓고 있던 것과 약간 다른 미소를 지었다.

“유더. 이 두 분께 손님용 숙소를 내어드리게.”

“알겠습니다. 서약서는 나단 경께 요청하면 되겠습니까?”

역시 눈치가 빨라 좋아. 키시아르가 유더의 장갑 낀 손등을 가볍게 두드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스승님께서 공작과 나눈 대화가 마법 개론서보다 더 이해하기 어렵다면 믿어지시겠습니까? 아직도 소름이 돋습니다.”

알릭은 유더가 안내해 준 손님용 방에 들어온 뒤 몸을 떨며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방금 오간 대화 속에서 대체 어떤 칼날들이 오간 것인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펠레타 공작의 무시무시한 미소 아래 손을 떨며 서약서에 사인하고 유더가 친절히 그들의 짐을 황궁에서 옮겨다 주겠다는 말을 해 준 것만이 그의 기억에 남은 전부였다.

“뭐, 목적지는 맞게 찾아온 모양이니 아무래도 좋지 않으냐.”

“뭐가 좋단 말씀이십니까. 대체 펠레타 공작에 대한 소문은 왜 여태 그 모양이었던 겁니까?”

알릭은 키시아르를 떠올리며 진저리쳤다. 마지막에 타이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질문하던 그의 미소가 스승의 화난 얼굴보다도 순간 두렵게 느껴졌었다.

“덜 자란 젊은 맹수가 발톱을 숨기는 건 역사에서 그리 희귀한 일은 아니지.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우리를 내버려 둘 것이다. 우린 붉은 돌 조사만 끝내면 그만이니 그때까지는 입을 조심하도록 해라, 알릭.”

“그렇게 하셔서라도 연구를 하셔야겠습니까…….”

“싫으면 탑으로 돌아가.”

“어휴…….”

알릭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숙소 밖 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정말 여기에 붉은 돌이 있단 거지. 믿어지지 않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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