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64화 (64/805)
  • 64화

    “…….”

    끔찍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얼어붙어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여태 침묵을 지켰던 타이스 율만이 처음으로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으하하하핫! 맙소사. 살다 살다 이리 우스운 건 8년 전 몬스터를 강제로 춤추다 지쳐 죽게 만드는 마법을 만들겠다고 설친 놈 이후 처음이구나!”

    그러자 잠시 후 그 웃음에 전염된 것처럼 유더의 동료들도 하나둘 웃어대기 시작했다.

    “하하핫… 하하하하!”

    그 웃음바다 속에서 키올레의 동료 기사들이 허둥지둥 그를 부축해 올렸다. 키올레는 기절하여 고개를 푹 숙인 상태였다.

    그들은 인사도 없이 그대로 줄행랑치듯 사라졌다. 전 대륙에서 가장 아름답고 명예로운 기사단이라는 오르 제국 황궁기사단의 위명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우스운 모습이었다.

    “유더,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불과 물만 쓸 수 있는 줄 알았는데!”

    “너희가 발전한 만큼 나도 발전했다 생각해.”

    “아니, 사용할 수 있는 속성이 하나 더 늘어난 게 그렇게 쉽게 말할 일이야?”

    사그라지지 않는 웃음소리 속에서 붉은 머리칼의 남자와 침착하게 대화를 나눈 유더가 알릭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알릭은 제 생각을 꿰뚫는 것만 같은 눈을 보며 순간 긴장해 횡설수설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그, 저희를 기억하십니까? 정확히는 저희 스승님만 뵈었었지만…….”

    “네. 기억합니다.”

    다행히 유더는 선선히 대답해 주었다.

    “마병단을 찾아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초대받고 온 손님은 아니신 듯한데 무슨 용무이신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아, 그것이…….”

    알릭은 아직도 크게 웃어대고 있는 스승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이쯤에서 이제 그가 나서줘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스승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스승님께서 펠레타 공작 전하를 뵙고 꼭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고 하셔서 갑작스레 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길이… 음. 생각보다 어렵더군요. 하하…….”

    “네. 어렵죠.”

    유더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잠시 어렸다가는 사라졌다. 알릭이 그들의 도움 요청을 무시한 기사들을 돌려 욕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따라오십시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알릭은 그가 그리 순순히 안내를 도와주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몹시 놀랐다. 하지만 유더는 이미 몸을 돌려 성큼성큼 먼저 앞서나가는 중이었다.

    “스승님. 저분이 길을 안내해 주신다고 합니다. 가시죠.”

    알릭은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찔끔대는 스승의 팔을 잡고 그의 뒤를 따랐다.

    “알릭. 저 녀석,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타이스가 점차 가까워지는 마병단 숙소 건물을 보며 제자에게만 들리도록 낮게 중얼거렸다.

    “돌만 보러 온 것인데, 연구하고 싶은 놈이 하나 더 생긴 것 같아.”

    “그래서, 지금 그들이 밑에 있다는 건가?”

    “네.”

    유더는 진주탑의 마법사들을 마병단 숙소 1층에 있는 손님용 휴게실에 안내한 뒤 곧장 홀로 키시아르를 만나러 올라갔다. 가케인은 키시아르가 화낼지도 모르니 자신이 꼭 동행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키시아르는 유더가 저지르고 돌아온 일을 몹시 흥미로워했을 뿐, 분노의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좋아. 자네가 생각 없이 그런 행동을 하진 않았겠지. 키올레 다 디아카를 또 만난 건 악연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지만… 아무튼 상황 설명은 되었으니 이제 그다음으로 넘어가 보게.”

    유더는 느른한 미소와 함께 의자에 편안히 기대앉은 키시아르를 보며 입 안에서 말을 골랐다.

    “확실히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 제가 보기에 그분들은 마법사입니다. 아마 진주탑 소속이겠지요. 그런 분들이 굳이 이 시기에, 초대받지도 않은 이곳에 와서 목적을 확실히 언급하지 않고 단장님을 뵈어야겠다고만 말했습니다. 붉은 돌 때문에 왔다는 뜻밖에 더 되겠습니까.”

    마법 이야기를 무심코 꺼낸 긴 수염의 노인. 그런 노인을 스승이라 부르며 모시는 제자, 어디를 보나 1대1 사제지간의 전통을 지키는 마법사들다운 모습이었다. 궁중마법사라면 굳이 정체를 숨길 필요가 없으니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물론 유더는 이전 생의 기억 때문에 그들이 누구인지 곧바로 알아본 것이지만 키시아르에게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자네가 그리 파악했다면 그렇겠지. 그래서?”

    팔걸이에 올린 손에 턱을 괸 키시아르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붉은 돌을 목적으로 온 마법사들을 내가 어찌 대해야 하나?”

    “그분들이 어떻게 돌이 이곳에 있음을 알았는지, 그것으로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아보실 필요가 있다 생각합니다. 일단 상대의 뜻을 알아야 이용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용이라.”

    “탑의 뜻으로 이곳에 오셨다 해도, 결국 그분들은 마법사입니다. ‘오늘 쓴 마법의 결과로 내일 탑이 무너져도’…….”

    “‘쓰고 싶다면 쓰고 죽겠다.’…. 진주탑 꼭대기에 새겨진 격언이군.”

    그 말은 몇백 년 전 물체를 움직이는 마법에만 평생을 전념한 끝에 결국 달을 땅으로 끌어내리려 한 어느 마법사가 남긴 말이라 알려졌다. 그의 마법은 실패하였으나 그 말만은 길이 남아 진주탑 전체의 정신을 상징하는 격언으로 새겨졌다.

    “마법사들의 욕심에 걸고 한번 회유해 보자는 뜻인가.”

    직접적으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키시아르는 곧바로 유더의 뜻을 알아들었다.

    진주탑 소속 마법사들은 자신이 수련하는 마법에 광적으로 집착하기로 유명했다. 마법의 완성을 위해서는 온갖 비인륜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만약 타이스 율만이 붉은 돌에 별 관심이 없음에도 탑의 뜻으로 억지로 온 것이라면 그는 황궁을 떠나 마병단까지 찾아오는 수고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허름한 차림으로 이곳에 와 기사들에게 모욕을 받으면서도 제 정체를 끝내 밝히지 않았다. 그의 전공이 그런 것들을 연구하는 것임을 생각해 보면 괜찮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다.

    “나쁜 분들은 아니신 것 같았습니다. 칸나 이외에도 몇몇 단원들의 힘을 더 빌려 붉은 돌을 조사할 계획입니다만, 받을 수 있는 도움은 더 많은 쪽이 좋지 않겠습니까.”

    “본래는 궁중마법사들이 먼저 돌을 조사할 계획이었지. 그들을 두고 내가 굳이 진주탑 소속 마법사를 회유해야 할 이유가 있겠나.”

    “단장님께서 그분들을 믿으셨다면 제가 무어라 말했어도 이미 궁중마법사 탑에 돌을 먼저 맡기시지 않았겠습니까.”

    유더는 침착하게 가장 무난한 답을 이야기했다. 키시아르의 얼굴에 만족감이 서렸다.

    “역시 내 보좌는 똑똑하군. 모든 이들이 자네만큼 눈치가 빠르지 않아 다행이야.”

    유더는 이전 생에서 궁중마법사들이 얼마나 권력에 민감한 이들인지 보았다. 마법 실력의 증진보다 권력 얻기를 원하는 이들이 주로 궁중마법사가 되고는 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황제만을 따르나, 뒤로는 여러 귀족들과 따로 결탁하여 더러운 일들을 했다.

    현 황제는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키시아르라면 그들을 완전히 믿지 못했을 것이다. 정보가 밖으로 흘러나가는 것을 감안하고 궁중마법사들에게 맡기느니, 마법에 미친 대마법사 한 명을 회유하는 쪽이 보안 면에서는 훨씬 나았다. 유더의 말을 생각보다 손쉽게 들어준 것 또한 그 일환이었을 터였다.

    “좋아. 그러면 내려가지. 어디, 진주탑에서 얼마나 대단한 인재를 보냈는지 볼까.”

    키시아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더는 그가 곧장 숙소 밖으로 나갈 줄 알았으나, 뜻밖에도 그는 유더의 바로 앞으로 다가와 가만히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단장님?”

    유더는 본능적으로 경계하며 조심스레 반문했다.

    “훈련이 끝나고 얼굴을 닦을 틈도 없었던 모양이군. 엉망이 되었어.”

    그가 손수건을 꺼내 유더의 뺨과 이마 부근을 닦아냈다. 얼굴을 스친 손수건 안에서 나는 향기 때문에 순간 등이 뻣뻣해졌다.

    유더는 키시아르 특유의 그 약간 알싸한 체향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머릿속에 낡고 바랜 기억으로만 남아 있었던 것이었다. 갑자기 현실이 되어 다가온 향기에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이제 다 되었네.”

    얼굴을 돌려 피했지만 소용없었다. 끝까지 따라와 코끝까지 닦아낸 키시아르가 손수건을 도로 품 안에 넣었다. 태연하기 그지없는 행동에 기가 막혔다.

    “그냥 씻고 오라고 말씀하시면 될 것을 왜 이러십니까?”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나.”

    “손수건은 왜 도로 넣으십니까. 더러워졌으니 두고 가십시오.”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말게. 나는 괜찮으니까.”

    키시아르가 즐겁게 웃으며 유더의 어깨를 두드렸다. 예민하게 굴어야 할 것은 평민인 유더가 아니라 누가 보아도 저 귀하신 분 쪽이 아닌가. 유더는 진작 세수를 하고 오지 않은 것을 깊이 후회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다 들었소.”

    유더와 함께 마법사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간 키시아르가 흔쾌히 먼저 인사를 건넸다.

    “펠레타 공작 전하이십니까?”

    “그렇소. 다만 이곳에서는 마병단 단장의 직위가 우선하니 그렇게 불러 주었으면 좋겠군.”

    드디어 펠레타 공작을 본 알릭은 마치 태양신의 현신 같은 아름다움에 한 번 놀라고, 뱀이 백 마리쯤은 엉켜있는 듯한 미소에 두 번 놀랐다.

    ‘성불구자에 지능이 낮고 뒷일을 생각지 않는 경솔한 자라 들었는데, 대체 소문이 어떻게 된 거람?’

    흘긋 옆을 보니 타이스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스승님도 참. 소문이 잘못된 것을 이미 알고 계셨다면 먼저 알려주시면 어디가 덧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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