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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63화 (63/805)

63화

“저, 방문객이 말씀 좀 묻겠습니다.”

“뭐지?”

알릭이 말을 걸자 기사들은 일제히 걸음을 멈추었다. 알릭은 선두의 기사가 걸친 푸른 제복에 황금 독수리 문양과 3개의 백합꽃이 새겨진 것을 빠르게 살폈다.

“이곳 어딘가에 마ㅂ… 아니, 펠레타 공작께서 머무시는 곳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찾다가 길을 잃었는데 혹 친절을 베풀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알릭은 마병단의 첫 글자가 나오자마자 단숨에 일그러지는 기사의 표정을 보고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여태 만난 모든 황궁 기사들이 마병단이란 말을 들으면 들은 척 만 척하며 사라졌지만 이렇게 대놓고 분노하는 자는 또 처음이었다.

“…펠레타 공작이라? 무슨 연유로 거기까지 가려는 거지?”

“그것은 죄송하지만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붉은 돌이 거기 있다는 정보를 듣고 연구 좀 하게 해 달라 찾아온 진주탑의 마법사들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초대받은 손님도 아니었다.

알릭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젓자 기사는 생각에 잠긴 표정이 되어 그와 등 뒤의 타이스를 훑어보았다. 오만하게 빛나는 암적색 눈동자가 잠시 후 사납게 표변했다.

“이자들을 끌어내 옥에 가두어라.”

“예?”

알릭은 제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기사의 명령은 계속해서 거침없이 이어졌다.

“방문 목적을 숨기는 것을 보면 수상한 자들임에 틀림없어. 그 벌레만도 못한 놈들을 찾아온 모양이니 분명 연결 관계가 있을 터. 내 그놈들이 또 무슨 짓을 꾸미는지 알아내야겠다. 당장 붙잡아!”

그의 등 뒤에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고는 달려와 알릭과 타이스를 포박했다. 알릭은 여태 연구에 미친 스승을 모시며 많은 일을 겪었으나, 기사들에게 붙잡혀 옥에 갇힐 위기에 놓인 것은 또 처음이었다.

“이, 이보시오. 기사님! 저흰 수상한 자들이 아닙니다! 제대로 된 통행증도 발급받아 들어왔단 말입니다! 확인해 보시면 알 수 있으실 겁니다!”

“그따위 것쯤은 얼마든지 위조 가능하다.”

“그러면 하다못해 화, 황궁에라도……! 거기에 신분을 확인해 드릴 것들이 다 있습니다!”

“황궁? 그 말을 지금 믿으라고 하는 것인가?”

기사가 코웃음을 치며 그들의 허름한 차림새를 훑었다.

오늘 알릭과 타이스는 정체를 숨기고 빠져나오느라 최대한 평민과 비슷한 차림을 했다. 때문에 진주탑 소속 마법사임을 한눈에 보여줄 진주 뱃지도 황궁에 있는 궁중마법사 탑에 두고 온 상태였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더라면 뱃지를 반드시 소지했을 텐데! 알릭은 깊이 탄식했으나 이미 뒤늦은 상태였다.

‘스승님. 이게 다 스승님 때문이니 무어라 말 좀 해 보십시오!’

알릭이 속으로 분통을 터트리며 스승을 바라보자, 침착하게 양팔을 붙잡은 기사들을 바라보던 타이스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이보게, 젊은 기사. 이름이 어찌 되는가?”

“수상한 자들에게 알려줄 이름은 없다.”

“우리는 그저 길을 찾지 못해 도움을 요청했을 뿐이라네. 아무런 증거도, 정황도, 심지어 우리의 이름조차 확인하지 않고 감정과 억측에 휘둘려 무작정 잡아들이는 것이 옳다 여기는가? 오르 제국이 자랑하는 황궁기사단은 그런 곳인가?”

과연 이유 없이 20년 넘게 진주탑 원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타이스의 목소리에는 함부로 대할 수 없을 위엄과 무게감이 넘쳤다.

그가 심상치 않은 사람이라 여긴 듯 기사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으나, 백합을 3개 달고 선두에 선 기사만은 그 말에 코웃음만 쳤다.

“감히 사특한 혓바닥으로 황궁기사단을 욕보이려 하는군. 나는 그따위 수작에 넘어가지 않는다!”

“저, 키올레 님. 그래도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신분 확인을 한 번 먼저 해 보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펠레타 공작님 쪽에 연락해 보는 것도…….”

옆에 있던 기사가 찜찜한 얼굴로 중얼거렸으나 키올레라 불린 기사는 그 말에 불같이 화를 냈다.

“옐신! 너도 한편이냐?”

“아, 아닙니다.”

“그러면 입 다물고 내 명령에나 따라!”

오만한 귀족들이라면 수도 없이 보아왔으나, 키올레의 성질은 남달랐다. 알릭은 저 괘씸한 이의 이름을 절대 잊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리 스승 아래서 하인처럼 구르며 지내고 있다지만 그래도 알릭은 성이 있는 가문 출신의 재능 있는 마법사였다.

원로의 직계 제자 자리는 이유 없이 얻은 것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동료들에게 스승을 뒤이을 탑의 미래라 기대받던 입장에서 이리 멸시받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우리 스승님이 속성마법으로 원로가 된 분이셨다면 여기서 그냥 마법 한 방 터트려 혼쭐을 내고 끝이었을 텐데.’

하지만 타이스는 마법 연구의 대가였지, 공격 마법의 대가가 아니었다. 알릭은 일단 옥에 들어간 뒤 그들의 신분을 보증해 줄 사람을 불러야겠다고 생각하며 더 이상의 대치를 포기했다.

그때였다.

“저기 잡혀 있는 분들이 확실한 것 같네.”

“그렇다니까.”

멀리서 시끌시끌한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네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분명 저분들이야. 아까 마병단이 어디냐고 묻다가 무시당하는 걸 봤어. 확실해.”

그들은 모두 같은 모양의 검은 제복을 입고 있었다. 다만 4명 중 3명은 흙과 먼지로 엉망이라, 깨끗한 차림을 한 1명이 없었다면 그것이 같은 제복인 줄도 몰랐을 것이다.

알릭은 그들의 얼굴을 멍하니 보다 문득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을 하나 발견했다. 검은 머리칼을 가진 창백한 인상의 남자. 어디서 보았던가 머리를 쥐어짜다 보니 불현듯 기억이 났다.

‘맞아. 황궁에서 귀족과 싸우던 사람! 분명 마병단 사람이라고 했었지!’

알릭은 당시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유더의 뒤에 있던 칸나는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유더는 아주 잠시 보았음에도 그의 기억 속에 인상적으로 남아 있었다.

“실례합니다, 기사님들.”

마병단원들이 나타나자마자 황궁기사단 기사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들은 위협적으로 손을 검집에 얹어 언제든 뽑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그중에서도 키올레의 얼굴은 분노로 붉게 달아올라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했다.

“더러운 놈들. 감히 여기까지 나타나다니 간도 크구나.”

“마병단원들은 황궁기사단 부지 내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권한이 있는데 무슨 소리이신지 모르겠군요.”

검은 머리칼의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사실을 말하는 얼굴에는 아무 의도도 없어 보였지만 키올레를 더욱 화나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움직임이었다.

“같이 계신 두 분이 저희 마병단을 찾아왔다는 말을 들어서 찾아왔습니다만, 왜 붙잡고 계신 것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알릭은 드디어 그를 구원할 사람이 왔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하지만 키올레는 그 반대였다.

“헛소리 집어치워! 네놈,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온 것이지! 좋다. 네놈이 쫓겨나지 않았다는 것을 드디어 내 눈으로 확인했으니 이제 끝장을 내자!”

키올레가 버럭 소리쳤으나 남자는 화내지 않았다. 그는 그저 낯선 이를 보듯 눈을 천천히 깜박였을 뿐이었다.

“음… 죄송합니다만, 저희가 언제 뵌 적이 있었습니까? 누구신지 기억이 안 나는군요.”

“……뭐?”

아니, 세상에 이리 창피하고 모욕적인 상황이 또 있을까.

알릭은 순간 키올레의 얼굴이 터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기사들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는지 일제히 숨을 삼키며 키올레를 향해 시선을 흘긋거렸다.

그러나 검은 머리칼의 남자 주변에 서 있던 동료들도 일제히 그를 묘한 표정으로 보는 것을 봐서는 키올레와 그는 정말 구면이었던 모양이었다.

“나…를, 지금,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냐?”

키올레가 말을 더듬었다. 그는 제가 더듬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기억해야 할 만한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없었던 것 같은데……. 가케인. 너는 기억해?”

가케인이라 불린 붉은 머리칼의 사내는 키올레와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다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어… 유더. 정말 기억 안 나? 그… 이전에 네가 저분의 검을 좀… 그렇게 했었잖아. 그래서 저분이 넘어지셨었는데……. 단장님도 오셔서 한마디 하셨었고…….”

“……아. 그때군. 기억났어.”

단장이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 그저 퀭하게 보였던 남자의 눈동자에 겨우 빛이 조금 되살아났다. 그와는 반대로 키올레의 표정은 극도의 분노로 도리어 창백해져만 갔다.

“감히 내게 이따위 모욕적인 짓을 저지르고도 살기를 바라나? 좋다. 검을 뽑아! 결투를 신청하겠다!”

“저는 기사가 아니라 결투를 반드시 받아들일 의무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검은… 그저 철로 만든 몽둥이나 다름없는 연습용 검입니다만.”

유더라는 남자가 침착하게 허리춤에 찬 검을 살짝 뽑아 보여주었다. 그의 말대로 그것은 날이 하나도 없는 낡고 오래된 연습용 검이었다.

덕분에 키올레는 연습용 검을 찬 상대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다짜고짜 결투를 신청한 바보가 되어 버렸다. 이제 그의 뒤에 선 기사들은 차마 키올레를 바라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유더의 뒤에 서 있던 이들은 웃음을 참을 필요가 없었기에 솔직하게 어깨를 떨며 웃어댔다. 알릭은 그들과 함께 웃지 못하는 것이 그저 안타까웠다.

‘대단한 자군. 저런 침착한 태도로 상대를 단숨에 멍청이로 만들다니.’

“그래. 한낱 벌레 따위를 징벌하는데 검은 사치지!”

결국 키올레가 이성을 잃었다. 그는 검 대신 손을 날려 유더의 뺨을 치려 했다.

“유더!”

유더의 동료들이 서둘러 그를 막아서려 했다. 그러나 알릭은 그 순간 유더의 주변에서 갑자기 기이한 바람이 훅 부는 것을 느꼈다.

“어… 엇……!”

키올레의 몸이 바람에 휘감겨 비틀거렸다. 그는 목표물을 놓치고 허공에 팔을 휘두른 뒤 그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머리부터 바닥에 쿵 엎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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