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다만, 붉은 돌이 공작가들과 황태자의 손에만은 들어가서는 안 된다…….’
‘…….’
“전하. 차가 식었습니다. 버리고 새로이 따라 드리겠습니다.”
황제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던 키시아르가 눈을 깜박이며 자세를 바로 했다. 나단의 말대로 그의 앞에 놓인 차는 어느새 모두 식어있었다.
눈앞에서 진행 중이었던 훈련도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했는지 유더와 가케인, 칸나가 모두 바닥에 앉아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니. 괜찮다. 이제 들어갈 테니.”
키시아르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훈련을 방해하지 않도록 일부러 기척을 내지 않았기에 세 사람의 시선을 끌지는 않았다.
“나단. 내가 없을 때도 저 훈련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 수 있도록 눈 몇 개를 항시 주변에 두어라.”
“알겠습니다.”
나단이 찻잔을 정리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키시아르는 그대로 숙소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다,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오른 듯 고개를 돌렸다.
“…아. 그리고 내 보좌가 혹 조금이라도 이상 상태를 보인다면, 판단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니 곧바로 보고하도록.”
그의 시선이 유더 아일의 검은 장갑을 낀 손 쪽에 머무르다가는 사라졌다.
* * *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부터는 지금보다 한 시간 먼저 나와서 기초체력 훈련 코스를 한 번 돌고 준비하고 있어.”
“…….”
“대답.”
“응…….”
“알겠어….”
유더의 단호한 목소리를 들은 가케인과 칸나가 간신히 숨을 헐떡이며 대답했다. 그들은 훈련장 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운 채 일어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유더가 고개를 저으며 돌아선 순간, 멀리서 줄곧 지켜보고 있던 나단이 기다렸다는 듯 눈짓을 했다.
“공작님께서 훈련이 끝나면 숙소로 올라오라 말씀하셨습니다.”
“…알겠습니다.”
유더는 나단이 함께 갈 줄 알았지만, 그는 따로 할 일이 있다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때문에 유더는 홀로 계단을 올라야 했다.
가케인과 칸나는 고된 훈련을 내내 돕고 나서도 멀쩡하게 서 있는 유더를 괴물 보듯 했으나 사실 그도 그리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해가 질 때까지 내내 혹사한 몸이 걸을 때마다 욱신거렸고, 마나홀이 있을 배 아래쪽과 머리도 제법 쑤셨다. 힘을 한계까지 사용하며 쥐어짰기 때문이었다.
‘예전이었다면 이 정도로 힘들다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과거로 돌아오니 확실히 단련상태가 다르긴 하군.’
“단장님, 들어가겠습니다.”
유더는 도착한 꼭대기 층 문을 두드린 뒤 곧장 안으로 들어섰다.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던 키시아르가 유더의 전신을 훑으며 미소를 지었다.
“꽤 힘들어 보이는군.”
“힘들지 않으면 훈련이 아니니까요.”
“옳은 말이야.”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난 키시아르는 느긋하게 마석을 태우며 따뜻한 온기를 뿌리는 난로 주변을 한 바퀴 돌아 손님용 의자에 앉았다.
“이쪽으로 오게.”
유더는 천천히 그의 맞은편 의자로 향하며 무심코 난로 쪽을 흘긋 보았다.
오늘도 신검은 아름다운 자태로 난로 위에 잘 놓여 있었다.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이전과 똑같았지만, 유더는 문득 그 검이 예전과 무언가 다르다 생각했다.
‘기운이… 이전과 뭔가 달라졌는데.’
오늘은 그를 경계하듯 노골적으로 뻗어오던 기이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기분 탓인지, 아니면 일시적인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키시아르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 말도 없었다.
유더는 자리에 앉아 키시아르가 그에게 할 말을 잠자코 기다리기로 했다.
‘아마 오늘 훈련에 대해 이야기하겠지.’
“장갑을 벗어보겠나?”
그러나 키시아르는 언제나 유더의 예상을 빗나갔다. 유더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움찔 표정을 굳혔다.
“예?”
“장갑 말이네. 내가 준 그것.”
유더가 제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생각했는지 키시아르가 친절히 반복하여 알려주었다.
“갑자기 장갑은 왜……. 꼭 벗어야 합니까?”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아니면 혹시 벗을 수 없는 이유라도 생겼나?”
장갑을 준 이가 그리 말하는데 무슨 소리를 더 할 수 있겠는가. 유더는 잠시 망설였으나 결국 느릿하게 왼손 장갑을 먼저 벗고, 오른손 장갑 끝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손등이 반쯤 드러났을 때 그 움직임은 마치 시간이 멎은 듯 그대로 멈추었다.
“혹시나 했는데, 예상대로군.”
키시아르의 시선이 유더의 손등을 훑었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유더는 제 손등 전체를 거의 뒤덮은 자줏빛 반점을 내려다보았다. 숨기고 있던 것을 들킨 아이 같은 낯선 기분이 느껴졌다. 실제로 상황이 그리 다르지도 않았다.
유더는 움찔했던 것을 재빨리 숨기고 최대한 담담하게 말을 건넸다.
“투시 능력은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만.”
“물론 없어. 하지만 지금이 제일 확인해 보기 적당한 때라고는 생각했다네.”
그렇게 말한 뒤 키시아르는 유더의 손가락 끝에 걸린 장갑 한쪽을 가볍게 잡아당겨 벗겨 버렸다.
“이전에 그 부상을 입었을 때의 정황을 설명하면서 처음에는 아주 작았었던 것이 흉수들을 처치한 뒤 어느새 그만큼 커져 있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가장 높은 확률로 능력을 쓸 때 그 반점도 함께 커지는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그 이후로는 능력을 쓸 일이 없지 않았나.”
키시아르의 말대로 붉은 돌 회수를 끝내고 나서 황궁을 다녀올 때까지는 능력을 쓸 일이 없었다.
그러나 갈론 백작을 때려잡아 내쫓았던 날, 유더는 밤에 장갑을 벗고 나서 손등의 반점이 아주 약간 커진 것을 발견했다.
혹시 저절로 다시 회복될지도 모른다 생각하여 일단 내버려 두었지만 오늘 내내 훈련을 하고 나서 이렇게 변한 것을 보니 원인과 결과가 오해의 여지 없이 확실해졌다. 키시아르의 추측대로였다.
“왜 갈론 백작 건 이후에 바로 와서 보고하지 않았지?”
“그때는 능력을 오래 사용하지 않아서인지 이렇게 변화가 확실하지 않았습니다. 고통도 없으니 혹시나 싶은 생각에……. 죄송합니다.”
이유야 어쨌든 사과는 해야 했다. 유더가 곧바로 고개를 숙이자 키시아르가 머리 위에서 가볍게 혀를 찼다. 개인적인 일로 일일이 보고하러 가는 것에 익숙지 못해 그랬다는 것을 다 안다는 듯한 태도였다.
“고통은 아직도 없나? 이렇게 누르면?”
유더가 미처 대비하기도 전에 손을 잡아챈 키시아르가 반점 위를 엄지로 꾹 눌렀다.
“…평소와 같습니다.”
“능력을 쓸 때 평소와 다른 느낌은?”
“없었습니다.”
순순히 대답했지만 키시아르는 믿지 않는 듯 몇 번이나 손등 이곳저곳을 마음대로 눌러댔다. 유더의 표정에 변화가 전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어느 정도 믿는 눈치였다.
“좋아. 그러면 이제 치유해 보지.”
“괜찮으신 겁니까? 없는 것처럼 여겨야 하는 힘이라고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유더가 조심스레 묻자 키시아르가 피식 웃었다.
“그랬지. 하지만 이 부상을 대체 어느 신전에 가서 치료받을 셈인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상처는 저주의 가장 큰 징표라 여겨지곤 하지. 설령 사제가 자네를 저주받은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더라도, 이상히 여겨 상부에 보고할 수도 있어.”
“…….”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 것 같나?”
궁금하지 않느냐는 듯 질문한 키시아르가 유더의 손등 위로 흰빛을 천천히 뿌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태양신 신전의 본산 깊숙한 곳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전 인류를 위한 고귀한 희생이라는 명목으로 실험대에 오르게 돼.”
“…거짓말 아닙니까? 그런 일이 있었다면 어째서 소문이 나지 않았겠습니까.”
유더는 이전 생부터의 경험을 합쳐 신전 내부 사정이나 사제들에 대해 보통 사람보다는 잘 아는 편이었다. 하지만 키시아르가 말하는 것과 같은 그런 일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가 의심스럽게 반문하자 키시아르가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하지 않은가? 죽은 이는 말이 없으니 소문도 낼 수 없지.”
고귀한 태양신 신전 본산이 말 한마디에 살인을 서슴지 않는 공포스러운 집단으로 뒤바뀌었다. 그 말을 한 사람이 태양신의 힘을 이었다는 황족의 일원임을 생각해 보면 불경도 그런 불경함이 또 없었다.
“신을 욕되게 한 사제는 신력이 사라진다고 들었는데, 아닌가 보군요.”
“나는 사제가 아니니까.”
“…….”
뭔가 이상하기는 한데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었다. 그런 식으로 유더를 어이없게 만드는 바보 같은 대화를 몇 번 더 나누고 나서, 키시아르가 흰빛을 거두고 천천히 손을 떼었다.
“역시 나았군.”
그러나 전부 나은 것은 아니었다. 유더의 손등을 뒤덮었던 반점은 이전처럼 처음 부상을 입었던 때 정도로 줄어든 상태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함을 안다면 다음에는 변화가 생겼을 때 바로 오게.”
그 말은 즉 능력을 쓸 때마다 키시아르에게 이런 식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뜻이 아닌가.
통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좀 커질 뿐인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이제는 언제 그 반점에 변화가 생기는지 원인도 확실해졌고 치료받으면 낫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는데 말이다.
유더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꼭… 그래야 합니까. 통증도 없는데, 그냥 한동안 내버려 두었다가 무슨 변화가 생기는지 알아보는 편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무모해. 그랬는데 만약 그 반점이 번져 심장이나 급소에 닿는 순간 죽게 되는 저주의 일종이었다면 어쩔 셈이지? 목숨은 하나고, 내 보좌도 하나이니 모처럼 해 줄 때 치료받게.”
“하지만 매번 이래서는…….”
신력은 사용자의 생기를 대가로 발휘하는 힘이었다. 다행히 아직 키시아르의 안색은 멀쩡했지만 유더는 그에게 자꾸 빚을 지게 될 것 같아 몹시 부담스러웠다.
매번 그와 손을 잡고 치료받아야 할 것을 생각하며 살다가는 위급한 순간에도 능력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유더가 그런 뜻을 삼키며 말끝을 흐리자 키시아르가 부드럽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