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유더는 그것을 어제 고향으로 돌아가는 마병단원 중 한 사람에게 빌렸다.
그가 태양신을 열심히 믿는 집안 출신으로 늘 경전을 여러 개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더가 자신처럼 독실한 신자라 여긴 그는 흔쾌히 경전 한 권을 빌려주었다.
신을 독실하게 믿지는 않아도, 대륙에 사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어린 시절부터 태양신 신전을 밀접하게 보고 접하며 자랐다.
때문에 글을 잘 모르는 평민들이라 해도 경전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대략적인 정보는 상식으로 알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유더가 경전을 첫 훈련 도구로 택한 이유였다.
“자. 이제 뭔가 알겠어?”
“응?”
“칸나. 너는 원한다면 읽어내는 정보의 범위를 마음대로 좁힐 수 있어.”
유더의 말에 그제야 무언가 깨달은 듯 칸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그렇네. 그렇구나. 몰랐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야 그랬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저 뭐든 읽히기만 하면 된다고만 여겼을 테고, 그것으로 충분했으니.
하지만 그녀와 같은 능력을 발전시키려면 단순히 뭐든 잘 읽기만 하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되었다.
무조건 많은 정보를 읽어 들이려고만 하면 금방 한계가 찾아온다. 그녀가 두서없이 몇 개의 단어를 읽다 멈추게 되는 것도 목표 없이 능력을 사용하기 때문일 터였다.
‘그러니 처음에는 목표를 설정해 좁은 범위부터 시작해야 해. 작은 것부터 세세하게 읽는 연습을 하고, 그다음에는 더 자세하고 더 넓게. 최종적으로는 그중에서 보다 중요한 정보들을 골라내서 읽을 줄 알게 되어야겠지.’
말하자면 책을 빨리 읽는 연습과 같았다. 처음에는 한 줄 한 줄 자세히 읽게 하다가 나중에는 속독을 하면서도 책의 핵심이 되는 문장을 파악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연습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기에 앞으로 매일같이 해야 했다. 오랜 시간을 들여야 비로소 점점 더 빛을 볼 수 있을 부분이었다.
“책으로 연습하는 게 제일 좋을 거야. 처음에는 책에 손만 대서 내용과 관련된 정보만 읽고, 그게 얼마나 맞는지 확인해. 거기 익숙해지면 다음에는 저자. 책이 만들어진 시기. 그리고 역대 주인들로 넘어가. 가장 최근 사람부터 거꾸로 넘어가면 조금 더 읽기 쉽겠지.”
“아…….”
칸나가 허둥지둥 고개를 끄덕이며 유더의 말을 기억하려 애썼다.
“그걸 매일매일 하면 되는 거야?”
“그래. 그리고 그것 말고도 해야 할 것이 또 있어.”
유더는 품에서 얇은 천을 꺼내 경전의 겉을 반만 감싼 뒤 그것을 땅에 놓았다.
“이 상태에서 방금 전 읽은 책의 정보를 다시 읽으려 해 봐.”
“…천의 정보만 읽힐 텐데?”
“손의 반은 책 위에, 반은 천 위에 둬. 그러면 어느 쪽이 읽힐 것 같아?”
“그건…….”
칸나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나도 잘 모르겠어.”
“해 봐. 물건 두 개의 정보가 한꺼번에 읽히려 한다면 책의 정보만 읽도록 노력해. 정보를 선택하는 연습을 하는 거야. 한 번 읽어낸 책의 정보니까 좀 더 쉽게 읽을 수 있겠지.”
“해… 해 볼게.”
칸나는 유더가 말한 대로 손의 반을 천 위에, 반을 책 위에 닿도록 한 뒤 다시 눈을 감았다. 그녀의 손에서 터져 나온 무형의 기운은 두 번째 시도 때보다 더욱 크고 선명했으며 강렬하게 일렁댔다.
꽤 힘든지 그 기운이 몇 번이나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칸나의 이마에도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으…….”
“계속 집중해. 계속. 포기하지 마.”
“머, 머리가 아파…. 읽는 걸 선택하는 게 이렇게 힘든 줄 몰랐어…….”
당연한 일이다. 성장이란 본디 그렇게 한계까지 몰아가야만 비로소 겨우 한 발짝을 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능력을 한계까지 사용하는 순간이란 것이 대부분 목숨이 위험한 때였기에, 많은 각성자들은 죽음의 위기 속에서 겨우겨우 성장을 이루고는 했다.
그것이 잘못된 성장 방법이란 것을 유더도 아주 늦게야 알아차렸다.
‘제대로 된 방향을 잡고 목숨이 위험하지 않을 선에서 한계를 계속 자극한다면 그런 위기를 겪지 않아도 충분히 성장할 수 있어.’
중요한 것은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계속 부딪쳐보는 것이지, 진짜로 위험해지라는 것이 아니었다.
유더는 칸나가 열심히 애쓰는 모습을 지켜본 뒤 고개를 돌렸다. 입을 딱 벌리고 두 사람을 지켜보던 가케인이 흠칫 놀라 자세를 바로 했다.
“가케인. 다음은 너야. 각오는 되었겠지.”
“물론이야! 뭐든 시켜만 줘!”
배우려는 자가 의욕이 넘치니 기특했다. 이전 생의 기억을 떠올려 봐도 저만큼 열정적으로 배움을 청한 후배는 없었다. 유더는 전직 마병단장의 마음으로 가케인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그림자를 꺼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케인의 그림자가 불쑥 일어나 섰다. 검은 실루엣은 정확히 주인과 똑같은 키에 똑같은 몸집을 지니고 있었다.
“너는 네 그림자의 한계를 어디까지 시험해 봤어?”
“한계라…. 잘 모르겠어. 그냥 내가 생각한 대로 움직이는 녀석이니까…….”
가케인이 그림자 분신을 낯설게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본체인 자신의 능력을 키워야만 그림자를 더욱 잘 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평소 능력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체력 훈련과 검술 훈련 등에 충실했다.
그것도 물론 괜찮은 수련이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맨몸으로 부딪치기를 반복하며 결국 끝장을 본 그 분야의 선구자인 유더가 생각하기에 그런 방법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했다.
‘그림자 분신이 어디까지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모르고서 무작정 본체만 단련하는 건, 눈을 가린 채 내달리는 말과 같지. 달릴 수는 있지만 목적지에 도달하기는 힘들어. 무모한 방법이야.’
유더가 여태 살핀 바에 의하면 그의 분신은 장정 여럿을 한 번에 번쩍번쩍 들고 다닐 수 있었다.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그 힘이 인간보다 월등히 세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붉은 돌을 만졌을 때 터져나간 팔도 가케인이 도로 그림자로 되돌렸다가 재소환하자 원래대로 원상 복구되었다.
그림자 분신이 입은 손상을 그런 식으로 복구할 수 있다면 그 한계가 과연 어디까지인지 당연히 알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림자 분신을 다루면서 여태 힘들었던 적이 있었어?”
“음… 아니. 아마 없었…던 것 같아.”
가케인이 기억을 되살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러면 오늘 어디까지 해야 힘들어지는지 시험해 보자고.”
유더는 허리에 차고 온 연습용 철검을 가볍게 뽑았다. 연습용이라 날카로운 부분은 전혀 없이 뭉툭했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가볍게 힘을 끌어모으자 붉은 불꽃이 검신을 타고 순식간에 훅 뿜어져 나왔다. 엄청난 열기와 기세에 질린 가케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부터 나는 이걸로 네 그림자 분신을 공격하겠어. 너는 본체인 몸을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선 채로 분신만 이용해서 그 공격을 피하고 막아내.”
“뭐?”
“시작한다.”
유더는 가케인이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그림자 분신에게 몸을 날렸다. 불꽃이 날리는 검을 휘두르자 분신이 비틀거리며 뒤로 피했다. 그러나 때는 늦어 이미 팔 한쪽이 잘려나간 뒤였다.
“…….”
인간과 달리 그림자는 비명을 지르지도, 고통스러워하지도 않았다. 잘린 팔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제대로 방어해. 움직일 수 없게 되면 그림자로 되돌렸다가 다시 소환해. 처음부터 계속하는 거야.”
“아, 알겠어. 하지만 그림자인데 어떻게 검을 막아야 할지…….”
“그림자인데 사람을 여럿 들고 다니는 건 어떻게 가능한데? 너는 이미 무의식중에 전부 할 수 있지만 깨닫지 못했을 뿐이야. 집중해.”
“…으……!”
“분신을 움직일 때는 오로지 의지만으로 해. 입을 열어 명령하지도, 네 몸을 움직이지도 마.”
몇 가지 지시를 하는 도중에도 유더는 쉬지 않고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인간보다 훨씬 둔한 그림자 분신은 대충 휘두르는 검도 제대로 피하지 못했다.
그렇게 상처를 입고 흩어져 가던 가케인의 그림자 분신이 드디어 마지막으로 머리에 검을 맞기 직전, 가케인이 눈을 질끈 감으며 숨을 삼켰다.
그 순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림자 분신이 남은 한 팔을 번쩍 들어 머리를 감싸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마치 바람으로 만들어진 투명한 벽에 검을 박은 듯한 이상한 감각이 유더의 손을 타고 흐르더니, 잠시 후 검날이 퉁 튕겨져 나왔다.
“어……?”
유더는 제가 해 놓고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가케인의 놀란 표정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계속 간다.”
“잠깐! 방금 그걸 어떻게 한 건지 좀 더 생각할 수 있게 해 줘… 잠깐만!”
잠깐 따위는 없었다. 유더는 소음 때문에 집중력이 흩어져 더욱 끙끙대는 칸나의 옆에서 인정사정없이 가케인의 그림자를 두들겨 팼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차를 마시는 키시아르의 표정에 즐거움이 가득했다.
“보아라, 나단. 대단하지 않은가? 마치 소드마스터가 갓 검을 쥔 아이들을 다루는 듯하군. 자신 있게 훈련 권한을 달라기에 얼마나 잘할지 궁금했는데, 휴가가 끝나고 돌아올 단원들의 꿈자리가 뒤숭숭하겠어. 하하하.”
“…그래 보이는군요.”
소드마스터의 눈으로 보자면 유더는 사실 그리 대단한 검 솜씨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들고 있는 무기에서 쉴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불과 물, 그리고 남다른 전투 감각과 판단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마법사도 아니고 검사도 아닌 저 이상한 전투 방식을 저리도 능숙하게 다루려면 대체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단 것일까?
아무리 빨리 각성했어도 고작 2년 전일 텐데, 그 안에 저만한 실력을 쌓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를 처음 본 이후부터 나단 주커만은 계속해서 유더 아일의 뒷조사를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 장담했던 주군의 말대로 그의 배경은 깨끗하기 그지없었다.
확실한 것은 오로지 그가 각성자로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천재라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