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붉은 돌에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펠레타 공작이 분명 폐하의 그릇에 도움이 될 방법을 찾아내실 것입니다.”
“…….”
“궁중마법사들도, 태양신의 사제들도 모두 폐하를 위해 밤낮으로 노력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도…….”
황후는 말끝을 흐리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제가 드리는 약초를 잘 드시고, 기운을 보해 버티다 보면 반드시 방법이 보일 것입니다. 다 잘 될 거예요.”
글쎄. 황제는 차마 그의 황후에게는 직접적으로 말하지 못할 중얼거림을 입 안으로 삼켰다.
이미 깨져버린 것을 도로 붙일 수 있다 한들, 과연 그것이 얼마나 갈는지.
* * *
모처럼 날이 좋은 오후, 마병단 숙소 뒤에 마련된 인적 없는 체력훈련용 공터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유더와 칸나, 그리고 가케인이었다.
“시작하기 전에 먼저, 상태는 어때.”
유더가 칸나와 가케인을 향해 묻자 두 사람이 제 몸 상태를 점검하려는 듯 비장하게 눈을 감았다.
“나는… 괜찮아.”
“나도.”
“단장님. 좀 더 물러나 계시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아, 나도 물론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고 진행하게.”
세 사람에게서 약간 떨어진 곳에 의자와 테이블을 두고 우아하게 앉아 있던 키시아르가 나른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숙소 건물 안쪽에서 나타난 나단이 한 손에 든 쟁반에서 찻잔을 꺼내 키시아르의 앞에 놓았다.
그가 제 손에 비하면 너무나 조그만 고급 찻주전자를 조심스럽게 기울여 차를 따르자 흙먼지 가득한 훈련장에 걸맞지 않은 알싸하고 향긋한 냄새가 솔솔 풍겼다.
“향이 좋군.”
“황후 마마께서 새로 키우셨다는 약초 잎으로 만든 차입니다. 얼마 전 임무를 위해 떠나 계신 동안 보내주셨습니다.”
“그분께서? 매번 신세를 지는군. 감사의 뜻으로 편지라도 써야겠어.”
키시아르 쪽은 평화롭기 그지없었으나 그와 정반대로 유더의 주변은 긴장감이 가득했다.
오늘부터 칸나와 가케인은 유더에게 능력 발전을 위한 훈련을 받기로 했다. 단장 보좌라고는 해도 결국 같은 단원인 유더에게 훈련을 받는 것이 이상하다 여길 수도 있겠지만 그의 실력을 이미 두 눈으로 확인한 두 사람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원래 이곳에는 지금쯤 한창 훈련해야 할 많은 단원들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 외에 아무도 없었다. 어제부터 키시아르가 준 마병단 전체 휴가가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갈론 백작을 두들겨 내쫓은 일로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마병단에 향하자 키시아르는 기다렸다는 듯 1주간의 휴가 명령을 발표했다.
대외적 명분은 마병단이 첫 임무를 성공적으로 끝낸 것을 축하하기 위한 휴가였다. 그러나 실은 쓸데없는 이목이 마병단 내부로 집중되어 붉은 돌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도록 수를 쓴 것임을 소수의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단원들은 동료들이 성공하고 돌아와 큰 상을 받았다는 비밀 임무가 붉은 돌 회수 임무인 줄은 몰랐지만, 그 덕에 휴가를 받게 되어 몹시 기뻐했다.
마병단 내에는 유더처럼 합격 여부를 확신하지 못하고 고향에 해결해야 할 일들을 남겨두고 온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거기에 가족들을 만나 합격한 뒤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던 이들까지 포함해 대부분의 단원들이 곧바로 숙소를 떠났다.
그 휴가 계획은 본래 붉은 돌 회수 임무 도중 유더와의 대화 때문에 시작된 것이었으나 정작 유더는 휴가를 포기했다. 한 달밖에 안 되는 붉은 돌 탐색 시간을 휴가 따위로 1주일이나 소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유더 이외에도 휴가를 가지 않은 단원들도 몇몇 있었다. 대부분은 돌아갈 곳이 없거나, 1주일 사이에 다녀오기에는 집이 너무 먼 곳에 있는 이들이었다. 그중에는 물론 칸나도 있었다.
처음에 유더는 그녀만 데리고 먼저 능력 개발을 위한 개인 훈련을 할 계획이었다. 휴가가 끝나고 나면 모든 단원들의 실력을 더욱 강화시킬 생각으로 키시아르에게 훈련과 관련한 권한을 달라는 요청도 해 둔 상태였다.
그러나 유더가 칸나를 찾아가 휴가 동안 훈련을 함께 해 보자고 제안했을 때 가케인도 있던 것이 문제였다.
‘칸나가 너와 같이 훈련을? 그것도 1주일이나? 나도 같이 할래. 하게 해 줘.’
처음에 유더는 거절했다. 서로 능력이 다른 두 사람을 훈련 시키려면 그만큼 집중력이 떨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가케인은 몹시 끈질겼다. 그는 곧바로 고향에서 휴가를 보내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유더에게 매달렸다.
훈련 계획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키시아르에게 받았으니 어차피 1주일 후면 다른 단원들에게도 칸나처럼 강화 훈련을 시킬 것이다. 그러니 굳이 먼저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해도 가케인은 강경했다. 그의 강함에 대한 집착은 유더의 생각 그 이상이었다.
‘붉은 돌을 조사하려고 단장님이 시켜서 칸나와 훈련하려는 거잖아. 그렇지? 지금 지닌 능력으로 부족할 거라 여겨서 칸나에게 뭔가 더 가르쳐 주려는 것 아냐? 그렇다면 내 그림자도 분명 도움이 될 거야!’
황제에게 바치고 돌아올 줄 알았던 붉은 돌을 키시아르가 도로 가져온 것을 곁에서 보았으니 이유를 그리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다만 시킨 쪽은 키시아르가 아니라 유더 본인이었으나 그는 당연히 거기까지 짐작하지는 못했다.
사실 그때까지 유더는 가케인이 그저 성격 좋고 성실한 녀석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거절해도 화장실 가는 길까지 따라붙기를 서슴지 않는 그의 집념을 본 뒤 생각이 바뀌었다.
가케인 볼룬발트는 사람 좋은 척하는 찰거머리였다.
‘유더, 제발. 네가 얼마나 엄청난 실력을 가졌는지 이미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이런 기회를 포기할 수 있겠어? 나도 너처럼 강해지고 싶어. 너와 훈련을 할 수 있다면 하라는 건 뭐든지 다 할게. 정말이야.’
‘…….’
하루 종일 시달린 뒤, 유더는 결국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1주일이야. 그 안에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고생만 할 수도 있어. 그런데도 내가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고?’
‘당연하지!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그건 내 탓이야. 절대로 널 원망하지 않아.’
이전 생의 유더라면 그래도 거절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유더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고난의 길을 먼저 걷고 싶다고 나선 쪽이 후회를 하면 했지, 그가 손해를 볼 일은 없었다.
‘알겠어.’
‘고마워, 유더!’
가케인이 감격한 얼굴로 유더를 꽉 끌어안았다.
칸나는 가케인이 함께 훈련을 하게 되었다고 말하자 혼자가 아니라 다행이라며 크게 안심했다.
그녀에게 있어 유더는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고마운 동료였지만 가끔은 키시아르보다도 더 생각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와 1대1로 1주일이나 훈련한다 생각하니 내심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두 명의 단원이 유더의 첫 능력 강화 훈련대상이 되었다. 키시아르는 이 훈련 계획에 큰 흥미를 보이며 반드시 참관하겠노라 밝혔다.
그리하여 오늘의 이러한 상황이 완성된 것이었다.
그들이 이용할 훈련용 공터는 밖에서 결코 들여다볼 수 없는 위치에 만들어진 곳이었다. 숙소 바로 뒤에 있으나 그 안에서도 볼 수 없는 곳이니 오늘 같은 훈련을 하기에 몹시 적절했다.
“유더. 그런데 정말 내가… 할 수 있을까? 아무리 훈련을 한다 해도 한 달 안에 직접 손에 닿지 않고도 물건의 정보를 읽을 만큼 능력을 발전시키는 게 가능할지…….”
칸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유더의 능력이야 당연히 대단함을 알고 있지만 훈련을 받는 쪽은 그녀였다. 단장인 키시아르까지 지켜보고 있는데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던 붉은 돌 회수 임무 때처럼 기대를 저버리게 될까 또다시 겁이 났다.
“할 수 있어.”
유더는 짧지만 확신 있게 대답한 뒤 미리 가져온 물건을 하나 꺼냈다. 칸나와 가케인의 시선이 그곳에 쏠렸다.
“책……?”
“그걸로 뭘 하려고?”
“칸나. 우선 능력을 써서 이 책의 정보를 읽어 봐.”
유더는 칸나가 책의 제목을 볼 수 없도록 일부러 뒷면을 앞으로 했다. 칸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다가와 책 위에 손을 얹었다. 곧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투명한 기운이 살짝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으음…….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친 책이네. 대부분 어려운 책이라고 생각한 것 같아. 만들어진 지 20년 정도 된 것 같은데… 따뜻한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칸나의 말이 뒤로 갈수록 두서없이 흘러나오다가는 흐릿해지며 끊겼다. 유더는 잠자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이상은 읽기 힘들어. 여기까지가 한계야.”
“칸나. 평소에 능력을 쓸 때,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용하지?”
유더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칸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그냥… 아무 생각도 안 해. 어서 읽어야겠다는 생각밖엔……?”
“그래. 그러면 이번에는 이 책의 제목이나 내용과 관련된 정보를 반드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집중한 채로 다시 능력을 사용해 봐. 할 수 있겠어?”
“한 번도 시도해 본 적은 없지만… 해 볼게.”
칸나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눈을 감았다. 다시 한번 책 위에 올린 그녀의 손 아래에서 잠시 후 방금보다 더 큰 일렁임이 일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 일렁임을 바로 옆에 있던 가케인도 보았는지 숨을 멈추고 놀란 표정이 되었다.
“……태초에 빛이 없는 대지가 있었다. 어느 날 신께서 어둠을 헤매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사 빛을 내리셨다. 최초의 빛은 하나의 작은 조약돌처럼 작고 단단하게 뭉쳐 있었다……. 가장 중요한 첫 문장이니 잘 기억해야 한다. 최초의 14장, 전체는 99장……? 이건…….”
느릿하게 중얼거리다 눈을 뜬 칸나가 아연한 얼굴로 책을 내려다보았다.
“태양신 경전이잖아?”
“그래. 맞아.”
유더는 책 표지를 뒤집었다. 그것은 만들어진 지 꽤 오래된 태양신 경전이었다. 오랫동안 사람 손을 탔는지 꽤 낡았음에도 조심스럽게 보관한 태가 나 겉은 여전히 깨끗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