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유더는 씁쓸해 보이는 칸나의 표정을 보며 그녀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
마병단 시험 접수를 위해 갔던 푸른얼룩 관 앞에서 처음 만났던 때에, 유더는 그녀를 몹시 딱딱하고 화난 사람처럼 보인다고 생각했었다. 단순히 지나치게 긴장하면 그런 표정이 나오는 사람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지금의 사연을 듣고 나니 왜 그토록 비장한 표정이었는지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칸나에게 그 순간은 일생일대의 선택과 도전을 앞둔 때였던 것이다.
모든 이야기를 마친 칸나의 눈빛은 비밀을 털어놓은 자다운 시원함보다는 불안함과 슬픔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처분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묵묵히 키시아르 앞에 고개를 숙였다.
“퇴단을 한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 셈이었나?”
키시아르의 첫 질문은 아주 간결했다. 예상했던 반응과 달랐는지 칸나가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원래 계획했던 대로… 외국에 갈 생각입니다.”
“자네가 지닌 능력으로는 용병이 되기도 쉽지 않을 텐데?”
“유랑극단에 들어갈 생각이었어요. 점술가 노릇이라면 그럭저럭 잘할 수 있는 능력이니까요.”
“과연. 그거라면 괜찮았겠어. 열심히 고민했군.”
“……예?”
칸나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반문하자 키시아르가 갑자기 목소리를 서늘하게 내리깔고 질문을 했다.
“그런데 칸나 완드. 자네가 이리 갑자기 퇴단한다면 알고 지내던 단원들이 많이 아쉬워할 것이라 생각지는 않나?”
‘키시아르 라 오르. 왜 자꾸 이상한 말을 하는 거지.’
붉은 돌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칸나의 능력이 필요하다. 그녀의 능력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전도유망했다.
유랑극단 따위가 어찌 감히 안전하고 영광된 마병단과 비교될 수 있겠는가. 그녀가 진짜 죄를 지어 끌려갈 상황이라 해도 반드시 막아야 할 판에, 키시아르가 하는 말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더의 눈이 몰래 번득이는 동안 칸나는 모든 것을 각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쉬워해 준다면 정말 고맙고 슬프겠지요. 마병단에 있는 동안 정말 행복했고, 좋은 동료들을 만나 즐거웠습니다. 저를 받아주신 단장님과 여러모로 도와준 유더에게는 도저히 갚지 못할 만큼 큰 은혜를 입었어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단장님과 유더, 제 동료들을 위해서라도 제가 퇴단하는 쪽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들어올 때 가족이 없는 고아라 배경을 속인 죄에 대해 벌을 받아야 한다면 당연히 무슨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슬픔이 깃든 눈이었으나 퇴단하는 쪽이 맞다고 말할 때의 표정만은 더없이 의연하고 당당했다.
“무슨 벌이든 달게 받겠다?”
“네.”
“받겠다는데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겠지.”
“단장님.”
유더가 미간을 찌푸리며 키시아르를 불렀다. 그러나 그의 부름에 고개를 돌린 키시아르와 눈이 마주친 순간, 유더는 제가 무언가 잘못 생각했음을 직감으로 깨달았다.
목소리를 한껏 진지하게 깔고 있는 상태라 몰랐는데, 마주한 붉은 눈동자 속에는 엄격함이 아닌 장난기가 흘러넘치는 중이었다.
“내 단원들이지만 참 이상해. 2년간 마병단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정작 수많은 경쟁자를 뚫고 합격한 실력자들은 하나같이 단에 미련이 없어 보이니 원.”
“…….”
“내 눈이 이상한 것인지, 단원들이 이상한 것인지 모르겠군.”
고개를 떨구고 있던 칸나가 이상한 말에 의아했는지 천천히 눈동자를 굴려 위를 보았다. 키시아르는 느른한 미소를 띤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 칸나 완드. 자네의 벌은 정과의 부단장이 되는 것이다.”
“…예?”
“솔직히 말해 성을 받지 못한 자식은 가족이라 할 수 없으니 자네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다. 갈론 백작이 무어라 말하든 자네는 이미 마병단 소속에서 벗어날 수 없어. 그런데도 본인이 먼저 벌을 청하였으니 어쩌겠나. 그리 행복하다는 마병단을 두고 쉽게도 떠나려 했으니 그 죄를 앞으로 열심히 일하며 갚는 수밖에.”
“다, 단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칸나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반문하려 하자 키시아르가 손을 저으며 단호하게 말허리를 잘랐다.
“이 건은 이것으로 끝.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네. 돌아가지.”
유더는 드디어 한시름을 놓았다. 그가 망설임 없이 돌아서는 키시아르의 뒤를 따라 걷자 칸나가 등 뒤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소리를 쳤다.
“단장님. 방금 제 말씀을 어떻게 들으신 거예요. 제가 부단장이라니, 절대로 안 돼요. 유더! 너도 한 마디 해 줘!”
“보좌보단 나아.”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칸나가 외쳤지만 유더는 답해 주지 않았다.
그가 칸나처럼 퇴단하겠다는 말을 해대고 키시아르의 제안을 거절하다가 결국 단장 보좌가 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제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전 생에는 없었던 정과 부단장을 지정할 줄이야.’
키시아르가 단장이었던 시절, 그는 인원수가 극도로 적은 정과에는 부단장을 따로 두지 않았다. 나중에 유더가 단장 자리를 물려받고 정과 인원도 많아지면서 부단장 자리를 추가하기는 했지만, 다시 돌아온 현재 일어날 일은 아니리라 여겼다.
키시아르가 칸나를 굳이 10명뿐인 정과의 부단장으로 삼은 이유는 그 역할이 정말로 필요해서는 아닐 것이다.
그만큼 그녀의 부담을 덜고 마병단에서 더욱 편히 머물 수 있게 만들려는 배려였겠지만 그 결과 또다시 유더가 알던 미래가 달라졌다. 긍정적인 결과였다.
“유더 아일.”
“네.”
“갈론 백작이 마병단에 오면 자네의 그 힘으로 뭘 할 셈이었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키시아르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유더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흘깃 눈을 돌려 칸나가 어디 있는지 확인했다. 그녀는 꽤 떨어진 거리에서 천천히 뒤따라오고 있었다. 이 정도 거리라면 대답해도 문제없을 듯했다.
“살짝… 손을 좀 봐주려 했습니다.”
“자네의 살짝은 어느 정도인데?”
“누구든 마병단원을 건드리면 곱게 돌아갈 수 없다는 소문이 적당히 퍼질 정도의 살짝입니다.”
유더의 답을 들은 키시아르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 뒷감당은 누가 한다고 생각하나?”
“단장님께서 보좌에게 잘 해주시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니면 설마 그 정도도 감당할 수 없느냐는 적반하장의 뜻을 담아 대담하게 반문했다. 키시아르의 붉은 눈동자 위로 배부른 짐승 같은 나른함이 어른거렸다.
“그렇지. 그리 말했었지.”
마병단은 현재 그 어느 때보다도 이름값과 존재감이 필요한 시기였다. 황제에게 온갖 치하를 받아도 결국은 아는 사람만 아는 일일 뿐이다.
마병단의 존재를 전 대륙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적절히 시끄러운 일화 몇 개쯤은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전 생에서는 그 일화의 첫발을 키시아르가 성검의 주인임을 알린 사건이 담당했었지만, 이번에는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악독한 귀족이 동료를 지키려는 마병단원들에게 가차 없이 두들겨 맞아 쫓겨나는 사건이 생긴다면 어떨까?
성검 사건만은 못하더라도 평민 출신들이 감히 귀족에게 그런 짓을 하고도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세상은 어마어마한 충격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마병단이라는 이름을 절대로 잊지 못하게 되겠지.’
키시아르 또한 그 정도 계산은 이미 끝냈기에 웃었을 터였다.
역사에 오명으로 길이 남을 치욕을 느끼고 나면 그 고상한 척하는 얼굴이 과연 어떻게 바뀔까. 유더는 간만에 시원함을 느끼며 소리 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면 승인해 주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혼자만 재미를 보지 말고 이 구경꾼도 불러주게.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이 남의 싸움 구경 아니겠나?”
싸움 구경이라. 그 말을 듣자 유더의 머릿속에 아까 만난 노인과 젊은이가 떠올랐다. 싸움 구경을 좋아한다던 그 노인이 누구인지 유더는 사실 처음 보자마자 알아차린 상태였다.
‘진주탑 원로 중 하나인 대마법사 타이스 율만. 설마 이 시기에 황궁에 방문해 있었을 줄이야.’
그는 대마법사라는 칭호를 받은 다른 마법사들처럼 속성마법에 능하지 않았다. 그가 유명해진 이유는 오로지 마법으로 세상의 본질을 꿰뚫고자 하는 다양한 연구결과 때문이었다.
그는 공기와 마력이 다르다는 것을 증명해 냈고, 마법으로 만들어진 물질과 실제 자연 사이의 차이를 연구했다.
공격 마법은 못 써도 마법을 파훼하는 것이라면 그보다 능한 이가 없다는 평이 자자했다.
그런 타이스 율만이 왜 황궁에 왔을까. 그것도 진주탑 소속 마법사 전용 로브 대신 평범한 귀족 노인 같은 차림새를 하고서 말이다.
‘뭐, 하필 이때 온 것과 그의 특기를 생각해 보면 결론은 뻔하겠지.’
단순히 생각해 보면 굳이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방문해 오르 제국 궁중 마법사들과 만나고 싶었을 뿐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붉은 돌을 회수하자마자 황궁에 나타난 마법 연구 전문 대마법사라니, 누가 봐도 목적이 확실하지 않은가?
타이스 율만은 아마 붉은 돌을 회수하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진주탑에서 이곳까지 달려왔을 것이다. 그 돌을 당장이라도 가져가 연구하고 싶어 견딜 수 없었으리라. 그의 의지는 곧 진주탑 전체의 의지라 보아도 무방했다.
‘키시아르는 비밀리에 오직 황제에게만 회수 소식을 보고했을 텐데, 아무리 봐도 소식이 벌써 전 대륙에 퍼진 것 같은 기분이군.’
이전 생에서 붉은 돌에 대해 조사했을 때는 누가 진주탑에서 돌의 정제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만큼 진주탑 내부의 정보는 극비 중의 극비였다.
그런데 심지어 유더가 조사를 시작한 때에는 이미 탑이 무너져 와해된 지 몇 년이 흐른 상태이기도 했다. 타이스 율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그때는 이미 알 수 없게 된 뒤였다.
‘타이스 율만……. 기억해 둬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