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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54화 (54/805)

54화

사내가 투명한 마석을 박은 지팡이를 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지팡이 끝이 도보에 닿아 작게 부딪치는 소리가 날 때마다 칸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져갔다.

거기까지 확인한 뒤 유더는 칸나의 제복에 매달린 후드 끝을 잡아당겨 머리 위로 푹 덧씌웠다. 칸나가 헉하고 숨을 삼키는 것과 동시에 커다란 모자가 얼굴 전체를 가렸다.

“아무 말도 하지 마.”

유더는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살짝 중얼거린 뒤 다가오는 사내를 향해 한 발짝 나아갔다. 자연스럽게 칸나를 등 뒤에 가릴 수 있는 위치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자네는 누구지?”

유더의 소속이나 신분을 모를 텐데도 남자는 자연스럽게 하대를 했다. 그만큼 우습게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마병단 소속 유더 아일입니다. 당신께서는?”

“마병단?”

처음 듣는 이름이라는 듯 고개를 기울인 사내가 잠시 후 아 하는 소리를 흘렸다.

“아아, 그래. 펠레타 공작 전하께서 모으셨다던…….”

뒷말은 생략했으나 그리 좋지 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은 충분히 느껴졌다. 유더는 그의 얼굴을 싸늘하게 바라보며 검은 장갑을 낀 제 손 쪽을 살짝 내려다보았다.

‘내 질문을 두 번이나 무시하다니 간이 크군. 이전 같았으면 곧바로 땅을 꺼지게 만들어 강제로 무릎을 꿇렸을 텐데…….’

지금이라고 못할 것은 없다. 손이 근질거렸으나 등 뒤에서 후드를 뒤집어쓴 채 떨고 있는 이의 숨소리가 걸렸다.

“두말할 것 없네. 등 뒤의 그 여자는 내 집안사람이야. 얼마 전 죄를 짓고 도망쳐 행방을 찾을 수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찾게 되었군. 데려가야 하니 거기서 비키게.”

칸나의 떨리던 호흡이 순간 멈추었다. 유더는 등 뒤를 살짝 보았다가는 도로 사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의 더없이 태연한 모습을 보자 사내가 냉혹한 태도로 다시 한번 명령했다.

“내 말이 들리지 않나? 거기서 비키라고 말했는데.”

“어허. 백작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느냐! 거기서 비키래도!”

사내의 옆에 서 있던 하인도 덩달아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도 유더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귀가 먹은 게냐.”

“천한 것들을 직접 상대하실 필요 없습니다, 주인님. 제가 갈 테니…….”

“증명하실 수 있습니까?”

그때, 드디어 유더가 입을 열었다.

“뭐?”

“제 등 뒤에 있는 이가 여러분이 찾던 사람이라고 어찌 장담하십니까?”

유더의 낮고 음울한 목소리가 공기를 타고 울려 퍼진 순간, 구경을 위해 기웃대던 사람들 모두가 저절로 몸이 부르르 떨릴 만큼 강렬한 서늘함을 느꼈다.

유더 아일이라 제 이름을 밝힌 그 남자는 완벽한 퍼즐 속에 단 하나 잘못 맞물린 조각처럼 이질적이었다.

새카만 머리칼 아래 자리한 무저갱 같은 두 눈. 그 아래 드리운 짙은 그림자는 그저 시선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영혼을 빼앗길 것처럼 사람을 두렵게 했다.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 또한 공포심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나 그 불길하고도 강렬한 감정이 반대로 아무도 유더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방금까지는 아무도 그를 눈여겨보지 않았었는데, 한 번 인식하고 나니 모든 것이 다르게 보였다.

눈앞에 있어도 존재감 없는 그림자처럼 덧없이 보이면서도 달리 보면 무언가 무서운 것을 삼키고 있는 어둠 같은 그 모습. 누군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저자는 대체 누구인가? 유더의 자기소개를 듣지 못한 많은 이들이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다…당신이 모자를 씌워 감춰 놓고, 이제 와서 딴소리를 하려는 거요?”

방금까지 씩씩대며 유더의 뒤에 감춰진 칸나를 끌어내려던 하인이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으며 겨우 대꾸를 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존대를 쓰고 말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였다.

“갑자기 다짜고짜 다가와 찾는 사람이 맞는지 아닌지조차 확인하지 않고 끌고 가려 한 것은 그쪽입니다. 궁내부 소속 백작님께서는 이름도 밝히지 않고 황궁 내에서 아무나 끌고 가셔도 되는 것입니까. 미처 몰랐습니다.”

유더는 조금도 겁을 먹거나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싸늘한 말을 들은 주변에서 웅성거림이 퍼졌다.

“궁내부 소속?”

“귀족이 사람을 끌고 가려 했다고? 누구지?”

제 주인에게 뭇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것을 깨달은 하인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주, 주인님.”

칸나와 얼굴이 닮은 백작의 눈빛 속에 경멸과 분노가 깃들었다. 보는 눈이 없다면 그냥 무시하고 원하는 대로 했을 터인데, 공교롭게도 이곳은 2구역 안에서도 가장 많은 이들이 오가는 검은 비둘기 관 앞이었다.

이미 시선이 쏠린 이상 지위와 체면을 생각하여 움직여야만 했다.

“뭔가 오해를 하는 모양이군. 내 하인이 말실수를 한 듯하나 본의가 아니었을 테니 이해하시길 바라오. 나는 궁내부 2급관, 핸크 갈론이라 하오.”

여전히 하대하고 있었으나 그래도 보는 눈을 신경 쓰는 듯 다소 정중한 말투로 변했다. 유더는 머릿속에서 갈론이라는 성을 열심히 뒤져보았다.

‘갈론… 갈론이라. 그래. 백작가였던 것은 맞는 것 같은데.’

황제의 가장 가까이에서 온갖 밀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제국 내외의 정세를 잘 알고 있어야 했다.

제국에 존재하는 모든 유력가문의 정보를 간단하게나마 모두 외워둔 것도 그것을 위해 필요했던 일 중 하나였다. 유더는 기억을 더듬으며 입을 열었다.

“갈론 백작님이시군요.”

“이리 갑자기 말을 걸게 되어 미안하지만, 방금 전 본 그 여자는 정말로 내가 잃어버린 집안사람이 틀림없소. 얼굴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준다면 내 말이 옳은지 아닌지 금방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이오.”

유더의 기억에 남아 있는 갈론 백작가의 정보는 수도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조용한 가문이란 것뿐이었다. 정계 중심에 선 적은 없어도 딱히 모나게 나서서 돌을 맞지도 않았으니 영리하게 잘 처신해 온 것이리라.

게다가 궁내부는 황실 일을 직접적으로 처리하기 때문에 위로 5대 이상의 신분이 확실히 보증되는 귀족 출신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잡을 수 있는 권력은 적어도 명예를 드높이기에는 좋았다.

‘혈연관계 호칭이 아니라 굳이 집안사람이라 부른다는 건 대놓고 말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는 뜻.’

칸나의 반응을 보아도 여기에 오면 저자와 마주칠까 싶어 내내 이상 반응을 보였던 것이 분명하다. 유더는 판단을 끝내고 뻔뻔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어렵겠습니다.”

“뭐라?”

“제 동료는 평민 출신으로 이번에 폐하께 성과 칭호를 하사받은 자인데, 어째서 백작님의 집안사람이라 그리 확실히 장담하십니까? 저희 마병단은 모든 단원들의 신원을 분명히 확인하여 받아들였으니 죄지은 자가 있다는 말도 믿기 어렵습니다. 애초에 그 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건 알 필요 없네.”

“그러면 저도 당연히 동료를 내어드릴 수 없습니다. 제 동료를 의심하시는 것은 곧 단장이신 펠레타 공작님을 의심하시는 것. …백작님께서는 혹 다른 의도를 가지고 저희에게 오신 것입니까?”

망설임 없이 줄줄 흐르는 말에 주변을 둘러싼 이들이 웅성거렸다. 유더의 말은 논리정연했으며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 것처럼 들렸다.

백작이 다른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냐니, 집안 문제라는 건 핑계이고 사실은 펠레타 공작을 향한 어떤 의도가 숨어있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지나가다 눈에 띈 여자를 향한 호색한의 수작? 호기심 어린 시선 속에서 지팡이를 쥔 백작의 손에 뻣뻣하게 힘이 들어갔다.

“이 건방진 자가! 감히 주인님의 뜻을 의심해!”

“너는 물러나 있어라.”

갈론 백작이 손을 저어 하인을 뒤로 물렸다. 그러나 그의 온화한 가면을 쓴 얼굴도 분노로 굳어진 지 오래였다.

“예의를 지키려 했으나 말하는 모양새가 천박하기 짝이 없군. 그 건방짐은 귀하신 분의 위세를 업고 있다는 멍청함에서 비롯된 것인가?”

“그러면 제 의문에 대한 답을 말씀해 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째서 제 뒤의 동료가 백작님이 놓친 죄인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모자를 벗겨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고 하지 않는가.”

“대답부터 해 주십시오. 보고 나서 말씀하신다면 정말인지 아닌지 어찌 알겠습니까?”

그러니 나는 당신을 믿을 수 없다는 뜻을 내포한 유더의 단호한 대답에 갈론 백작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황궁을 지키는 기사들을 불러 원하는 바를 이루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러나 그는 주변의 눈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을 보며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라고? 궁내부 소속 백작이 여자를 노려? 여기서 일하는 사람을 노린 것인가? 태양궁이 새파랗게 지켜보고 있는데 대담한 행동이군.”

“아니야. 마병단이라는군. 그, 몇 달 전에 떠들썩하지 않았나. 펠레타 공작 전하가 만드신 곳.”

“그런데 그곳 소속의 사람과 백작이 왜 대치하는 건가?”

“무슨 집안 문제라고 했던 것 같은데, 자세히는 모르겠군.”

귀족이라면 누구나 제 체면과 안위를 가장 우선시했다. 아무리 황제의 건강이 좋지 않다고는 하나,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의 귀에 들어가게 되어있다. 황제보다 더 경계해야 할 4대 공작가 또한 그러했다.

갈론 백작가는 여태 그 누구의 손도 잡지 않고 영리하게 잘 처신해왔다. 여기서 쓸데없이 추문을 일으켜 약점을 잡히는 것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고작 도망친 어린 여자아이 하나를 쫓자고 집안의 비밀스런 일을 모든 이들에게 보일 수는 없었다.

결국 갈론 백작은 한 발 물러서기로 했다.

“마병단 소속이라 했던가. 오늘만 날은 아니니 내가 조만간 그곳에 방문할 것이다. 공작 전하를 뵙고 이야기하면 진실이 똑똑히 밝혀지겠지.”

협박을 은은히 담아 내뱉은 말에도 유더의 표정은 침착하기만 했다. 그런 말 따위는 그에게 아무런 걱정거리도 되지 못한다는 듯 태연하고 오만한 모습에 백작이 결국 이를 갈았다.

“네놈의 이름, 기억해 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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