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과가 이렇게 간단하다면 누구나 1벽에 그냥 침입할 수 있겠어요. 폐하께서 너무 위험에 노출된 채 지내고 계신 건 아닌가요?”53화
“폐하께서 너무 위험에 노출된 채 지내고 계신 건 아닌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1벽은 그 어느 벽보다도 확실하게 외부의 침입을 차단하니까요.”
“어떻게요?”
“그건…….”
무어라 대답을 하려던 나단이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거대한 정문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검은 비둘기 관에 도착했군요. 벽들에 대해서는 앞으로 경험이 쌓이시면 점차 더 자세히 알게 되실 것입니다.”
검은 비둘기 관은 2구역 내에 있는 기관들 중에서도 특히 넓은 곳이었다. 여러 채로 나뉜 건물들 사이로 수많은 관리와 관을 방문한 손님들이 바삐 오갔고, 열린 창문과 지붕 사이로 다리에 조그만 지통을 매단 전서구들이 끊임없이 날아다녔다.
이름대로 검은 비둘기들은 아니었지만 한시도 쉴 틈 없이 오가는 전서구들은 그 이름의 유래를 곧바로 짐작케 했다.
나단은 출입문을 지키는 병사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뒤 돌아왔다.
“저희가 가야 할 곳은 황궁 내부 일들을 담당하는 궁내부입니다. 가시죠.”
유더의 생각대로 나단은 궁내부에 들러 황제의 지시를 전달하고 받아야 할 것을 받을 요량으로 온 것이 맞아 보였다. 궁내부는 가장 가까운 건물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으니 조금만 더 걸으면 도착할 터였다.
“저, 잠깐만요. 나단 경!”
그들이 막 나단을 따라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갑자기 칸나가 뒤쪽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한 발짝도 움직이기 싫다는 듯 버티고 선 그녀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그…, 몸 상태가 갑자기 나빠진 것 같은데, 괜찮으시다면 이곳에서 잠시 쉬고 있어도 될까요? 꼭 저희 모두가 그곳까지 따라가야 하는 것은 아니지요?”
새하얗게 질린 낯빛이 정말로 아픈 사람처럼 보였지만 유더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황궁에 오기 전부터 내내 심상치 않아 보였던 모습을 볼 때 저 말은 거짓이 확실했다. 나단 또한 그리 생각한 듯 전혀 놀라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이곳에 혼자 남아 계시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만.”
“아니에요. 위험하지 않아요. 이곳은 2구역 안인데 누가 절 해치겠어요. 그냥 아주 잠시만 저쪽 벤치에 앉아 쉬면 괜찮아질 것 같아요. 그래도… 안 되나요?”
고개를 젓는 칸나의 얼굴 위로 식은땀이 비쳤다. 나단은 대답 대신 침묵을 지켰다. 여기서 곧바로 칸나에게 이상행동의 원인을 물어야 할지, 말지를 고민하는 듯 보였다.
‘소속도 다르고 신입에 초면이니 어떻게 다뤄야 할지 상당히 고민되겠지.’
나단은 펠레타 공작의 부관일 뿐, 엄밀히 말하면 마병단 소속이 아니었다. 제 소속이 아닌 이들을 대하는 건 언제나 어려운 일인데, 칸나는 심지어 신입이었다. 황궁 내 규범들조차 아직 모를 이를 상대로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지 고민될 만도 했다.
‘거기다 당장 방문해야 할 곳도 있으니 시간을 길게 끌 수 없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테고.’
거기까지 생각한 뒤 유더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내가 남아야겠군.’
유더가 기억하는 나단은 그리 말재주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는 유더도 마찬가지였으나 그래도 나단보다는 칸나와 친분이 있으니 그녀를 자극할 가능성이 더 낮았다.
이유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칸나가 굳이 궁내부에 가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을 보면 거기에 문제의 원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제가 남아 대화를 나누며 이상행동의 원인을 푸는 쪽이 훨씬 나을 듯했다.
“제가 칸나와 함께 여기 있겠습니다. 그러면 되지 않겠습니까?”
“…….”
“괘, 괜찮아 유더! 굳이 그럴 필요는…….”
“칸나. 몸이 좋지 않은 동료를 혼자 남기고 가는 건 그곳이 어디든 위험해. 하지만 둘이라면 나단 경도 걱정을 덜 수 있겠지.”
유더의 의미심장한 눈빛을 마주한 칸나가 입을 다물었다.
눈치가 빠르니 계속 고집을 부리는 것보다는 유더의 말을 들어 적당히 타협하는 쪽이 나을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자 이번에는 다른 단원들도 손을 들고 나섰다.
“뭐야. 꼭 가지 않아도 되는 거라면 저도 여기서 칸나를 지킬게요.”
“저도요. 다 같이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면 되는 거잖아요?”
“저도 돕고 싶습니다. 다른 곳으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여기 있겠습니다.”
순식간에 시끄러워진 단원들을 보며 나단이 미간을 찌푸렸다.
“여러분의 동료애는 인상적입니다만… 모두를 여기 남겨둘 수는 없습니다. 정 상태가 좋지 않아 쉬고 싶으시다면 단장 보좌께 부탁드리는 편이 제일 나을 것 같군요.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단은 멍청한 자가 아니었다. 유더의 말 속에 숨겨진 뜻을 대충 알아차리고 칸나와 그를 남기는 쪽이 낫겠다고 판단한 듯했다.
마병단 모두를 남기고 간다면 긴장한 칸나가 입을 열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한 명이라면 경계심이 한결 풀리게 된다. 그것도 익숙한 동료라면 더욱 그러했다.
게다가 유더 혼자 이곳에 남길 이유로 단장 보좌라는 직책을 꺼내 반박의 여지를 차단했으니 아마 더 이상 말이 나올 여지는 없을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유더의 생각대로 남은 세 사람은 섭섭해 하긴 했어도 곧 납득했다. 그들은 칸나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긴 뒤 나단을 따라 안으로 사라졌다.
“곧 돌아올 테니 저쪽에서 얌전히 기다려야 해!”
유더는 그들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칸나의 얼굴은 여전히 불안으로 가득했다.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피는 눈동자에서 극심한 공포도 얼핏 느껴졌다.
“자. 이제 둘만 남았으니 대체 무슨 일인지 솔직하게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
“어? 무, 무슨 소리야. 아무것도 아냐. 나는 그냥 몸이 안 좋아서…….”
유더의 말에 놀란 칸나가 고개를 저었으나 누구도 믿지 않을 소리였다. 유더는 겁에 질려 있는 그녀를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이라면 신경 쓰지 않았겠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가 칸나를 마병단으로 이끌었다. 그러니 이 이상상황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했다.
“혹시 마병단을 배신했어?”
가만히 바라보다 말고 갑작스레 내뱉은 유더의 질문에 칸나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입을 벌렸다.
“뭐?”
“아니면 죄 없는 사람을 죽였거나.”
“아니야!”
“그러면 네겐 아무 문제도 없어 칸나. 내가 여기 남은 이유는 널 돕기 위해서야. 설마 아무도 네 이상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고 여긴 건 아니겠지? 빨리 알려줄수록 대책을 강구할 시간도 늘어나.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 어서 말해 주었으면 하는데.”
칸나는 말을 잇지 못한 채 유더의 침착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유더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곁에 남겠다고 할 때부터 무어라 말할 것이라 예상하긴 했지만 설마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유더의 목소리는 늘 침착하고 서늘했지만 기이한 마법이 깃든 듯 묘한 힘이 있었다. 황궁에 간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히던 생각들마저 순간적으로 날아갈 뻔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정말로 아무 문제도 없었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넋을 잃었던 칸나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순간적으로 흔들려 입을 열 뻔했으나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제 불안함이 들킨 것은 부끄러웠지만, 이것은 남에게 말해서 나아질 종류의 일이 아니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야……. 도움을 받을 만한 일도 아니고.”
‘도움을 받을 만한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걸 보니 역시 신상과 관련된 부분이겠군.’
칸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유더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예전 같았으면 아래 녀석들을 시켜 문제가 있는 녀석의 뒷조사를 한 뒤 해결해 버렸을 텐데, 지금은 혼자라 그럴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혼자라 해서 못 할 일도 없는 법이었다.
“누구야?”
“응?”
“궁내부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것을 보니 원인은 아마 거기 있겠지. 누구야. 가족? 친척? 친구?”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유더.”
“가장 확률이 높은 건 가족인데.”
칸나의 얼굴에 떠올랐던 어설픈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새하얗게 질린 두 손을 꽉 맞잡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보니 정곡이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어. 이상한 말은 이제 그만 해. 우리 나단 경에게 벤치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잖아. 난, 나는, 앉아 있을게.”
“칸나. 마병단원의 문제는 곧 마병단 전체의 문제야. 나단 경도 이상을 눈치챘으니 단장님이 알게 되어 물어보는 건 시간문제지. 그러길 원해?”
“…….”
칸나의 발이 멈칫 멈추었다.
“지금이라면 단장님에게 알려지기 전에 빠르게 끝낼 수 있어. 말만 해. 이곳의 누구 때문에 그러는 건지.”
눈에 띄는 검은 제복을 입은 채로 서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두 남녀는 많은 이들이 오가는 검은 비둘기 관 입구에서 상당히 시선을 끌었다. 물론 유더가 그렇게 되도록 의도한 것이었으나 반응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찾아왔다.
“그러니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칸나?”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듣자마자 칸나가 얼어붙은 듯 입을 다물고 딱딱하게 굳었다.
유더는 그녀의 뒤쪽에 미심쩍은 표정으로 서 있는 한 중년 사내와 그의 하인을 보았다. 그들은 막 이곳에 도착한 듯 등 뒤에 마차를 두고 있었다.
‘저놈이군.’
유더는 한눈에 그 사내가 칸나와 혈연관계임을 직감했다. 멋지게 정돈하여 넘긴 귀밑머리가 희끗했으나 전체적으로는 칸나와 똑같은 금갈색 머리칼이었고 이목구비가 상당히 닮았다.
결정적으로 사내는 궁내부 소속 관리들이 입는 제복 차림이었다. 겉으로 보면 온화하고 우아한 귀족 신사처럼 보였으나 눈빛은 겨울바람처럼 차고 거만해 느낌이 그리 좋지 않았다.
“칸나. 설마 했는데 정말로 너로구나. 믿을 수가 없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