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펠레타 공작. 농담이 아니니 짐의 말에 대답하라.”
“좋습니다. 마병단과 제가 이것을 조사하는 도중 불미스런 일이 일어날 시 저는 책임을 지고 단장 자리에서 물러나겠습니다. 그러면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까?”
시원한 대답이었으나 황제의 메마른 표정은 더욱 삭막해졌다. 그는 한참 동안 키시아르의 얼굴을 바라보다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이 무거운 짐처럼 마병단원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10일을 주마.”
“너무 짧습니다. 기왕 주시는 상이라면 조금만 더 주십시오.”
황제의 눈썹이 말을 듣지 않는 어린아이를 보듯 꿈틀거렸다. 유더는 드디어 키시아르의 뻔뻔함이 황제의 한계를 건드린 줄 알았으나 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 달. 그 이상은 안 된다.”
그제야 키시아르가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단원들의 반응을 한 번 보려고 하는 듯 가벼운 몸짓이었으나 유더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그의 눈빛이 살그머니 변했다.
이 정도면 되겠나? 그렇게 말하고 싶어 하는 듯한 눈이었다. 유더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키시아르가 곧바로 몸을 바로 하고 고개를 숙였다.
“성은에 감읍합니다.”
부드럽게 인사를 끝낸 뒤 키시아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병단원들도 그를 따라 재빨리 굽혔던 허리와 다리를 폈다.
“자네들은 이제 나가도록 하게. 나는 잠시 폐하와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키시아르의 말은 이곳에 오기 전 이미 들었던 내용이었기에 단원들은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공손히 황제 앞에 절한 뒤 물러났다.
“이쪽으로 따라오십시오.”
황제가 머무는 곳에서 나오자마자 무뚝뚝한 표정의 나단이 손을 들어 그들을 불렀다. 유더는 단원들과 함께 조용히 나단의 뒤를 따랐다.
“이제 마차로 돌아가 단장님을 기다리면 되는 건가요?”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져 7궁에서 빠져나올 때쯤 힌이 드디어 궁금함을 참지 않아도 되겠다고 판단했는지 나단에게 질문을 던졌다.
“마차로 돌아가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단장님을 그곳에서 기다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요?”
“저희는 2벽에 있는 검은 비둘기 관으로 갑니다.”
나단의 대답은 간결하고 침착했다.
“검은 비둘기 관?”
“그게 뭐예요?”
“너희들, 마병단 시험을 접수할 때 푸른얼룩 관에 갔었던 건 기억하지? 그곳과 비슷하지만 더 높은 곳이야. 나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처리하는 곳.”
궁금해하는 엘더 남매에게 가케인이 친절히 대답을 해주었다. 그의 말대로 검은 비둘기 관은 오르 제국을 지탱하는 핵심기관 중 하나였다. 행정과 외교를 담당하며 궁내에서 처리해야 할 모든 사소한 일도 그곳에서 처리했다.
유더는 나단이 그곳으로 향하는 이유가 황궁 살림을 담당하는 궁내부에 가는 것이리라 짐작했다.
‘황제가 내린 상과 관련해 업무 처리를 해야 할 테니 빠를수록 좋지.’
“그렇구나. 이름은 왜 그 모양이래?”
“음.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가케인이 머리를 긁적이며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답을 알고 있을 나단이 무심한 얼굴로 막 입을 열려 했을 때, 뜻밖에도 다른 이가 그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쉴 새 없이 전서구를 날려 보내고 받기를 반복하며 일하는 곳이기 때문이야. 비둘기들이 너무 많은 일을 하느라 씻을 틈도 없으니 검게 때가 탔을 것이라는 오래된 농담이 만든 이름.”
“칸나?”
가케인과 엘더 남매가 깜짝 놀라 옆을 보았다. 여태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따라오고만 있던 칸나가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었다.
“그건 어떻게 알았어?”
“옛날에, 어딘가에서 들었어.”
칸나의 대답은 작고 모호했다. 가케인과 엘더 남매는 그 대답을 믿은 모양이지만 나단은 묘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유더 또한 눈을 가늘게 떴다.
‘어딘가에서 들었다…라.’
그가 대답해 주었더라도 아마 저 답과 그리 다르지 않게 둘러댔으리라.
하지만 유더가 답을 알고 있는 이유는 그가 이전 생에 황궁에서 오래도록 일하고 머물며 온갖 정보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보통 평범하게 자라난 성씨 없는 평민이라면 우연으로라도 그것을 알 수가 없었다.
푸른얼룩 관의 이름과 관련된 소문 정도는 주변에 사는 평민들도 많으니 어디선가 주워들을 수 있다. 그러나 검은 비둘기 관은 달랐다.
지금은 유명무실하다지만 뼈대 있는 가문에서 자란 가케인조차 모르는 아주 사소하고 의미 없는 그런 정보를 칸나가 알고 있다니. 대체 무어라 생각해야 할까?
유더는 제가 칸나의 가족 사정이나 개인정보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그때야 알아차렸다. 다른 마병단원들의 정보라면 이전 생에 알았던 기억 덕에 대부분은 간략하게라도 알고 있었지만 칸나는 이번 생에 처음 본 사람이었다. 그녀는 가케인과 다르게 스스로의 정보를 경계심 없이 입에 담지 않았다.
그동안 어떤 동료와도 편히 지내는 사교성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한편으로는 그런 비밀스러운 모습을 지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유더조차 그랬으니 다른 이들은 어떠했을까.
‘역시 가장 큰 가능성은… 황궁 내에서 일하는 자와 연관이 있었거나, 혹은 신분을 숨겼거나 둘 중 하나겠지.’
후자는 가능성이 낮았다. 성씨를 하사하기 전, 하사받을 마병단원들 개개인의 신분을 키시아르가 다시 한 번 철저히 조사했을 테니까.
키시아르 라 오르는 겉으로는 그저 웃을 줄만 아는 한량 같지만 실은 누구보다 꼼꼼하고 치밀한 일처리를 하는 사람이다.
마병단에 합격시킬 때 이미 조사한 사항이라도 하사식 전에 다시 한번 조사하는 것이 그의 성격이었다. 그러니 그가 칸나를 조사하여 평민이라 결론을 내렸다면 거기에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때문에 유더는 전자의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생각해 보기로 했다.
‘황궁 내에서 일하거나, 혹은 자세한 내부 사정을 알 만큼 드나들 수 있는 자는 모두 귀족이지. 하지만 검은 비둘기 관에 한해서라면 유능함 하나로 발탁된 중위층 관리나 부관들도 있어.’
몇 년 뒤에는 각성자들이 요직에 진출하고 작위를 받으며 상황이 바뀌겠지만 일단 지금까지 이어져 온 구도는 그랬다.
그러니 칸나가 그중 누군가와 관련이 있다면 적어도 추측한 신분을 지닌 이들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았다.
‘어쩌면 전혀 다른 제3의 가능성일지도 모르지만… 무슨 사정이든 부디 큰 문제는 아니었으면 좋겠군.’
유더의 시선이 어두운 표정을 지은 칸나에게로 향했다. 묵묵히 그들을 이끌고 능숙하게 궁과 궁 사이의 길을 건너던 나단이 그 순간 걸음을 멈추고 한 손을 들었다.
“곧 벽의 경계입니다. 검문은 제가 대표로 받을 테니 조용히 뒤에 있기만 하시면 됩니다.”
지금까지는 황실 마차를 타고 오느라 직접 검문을 받을 일이 없었기에 단원들의 표정에 미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나단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곧 검문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족들이 머무는 황궁만 존재하는 1벽 내에는 출입을 원하는 자들이 거의 없어 몹시 한가했다. 검문소를 지키던 기사들의 표정도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2벽 쪽으로 나가고 싶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펠레타 공작 전하의 부관, 나단 주커만.”
기사들의 시선이 공작가 문양이 새겨진 경갑옷을 걸친 나단을 넘어 똑같은 검은 제복을 입은 마병단원들 쪽으로 향했다. 그들은 한 번 흘긋 보기만 했을 뿐 단원들의 이름까지 묻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넘어가십시오.”
단원들은 너무나 쉬운 통과 선언에 놀랐다. 유더는 기사들의 시선에서 그들이 마병단원들을 나단이 데리고 온 신입 부하들 쯤으로 짐작했음을 깨달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나단도 그럴 것이라 예상하고 제가 먼저 나서서 검문을 받겠다고 말했을 터였다. 오해를 받는 쪽이 오히려 검문이 빨리 끝나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나쁜 일이 아니었다.
나단은 익숙한 듯 고개를 숙여 가볍게 인사를 건넨 뒤 곧바로 성큼성큼 검문소를 지나 걷기 시작했다.
검문소를 통과하자마자 갑자기 길이 넓어지며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곳곳에 다양한 양식으로 지어진 거대한 건물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건국하자마자 지어진, 깔끔하지만 웅장한 단층의 제국 법정과 10층이 넘는 어지러운 높이를 자랑하는 궁정마법사단의 신 청사가 나란히 있음에도 어색하지 않게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과연 2벽 안 구역다웠다.
‘제국을 대표하는 모든 기관이 모인 구역…….’
유더는 2벽 내 구역이 지닌 별칭을 중얼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랜만이군. 시간이 지나면 저 사이에 마병단 본청도 생기겠지.’
기억 속 마병단 본청이 있던 자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별궁 하나만 있을 곳. 이전 생에서는 그 궁을 증축하고 층수를 올려 마병단 본청으로 만들었다.
본청은 전 제국에 흩어진 마병단 지부 업무를 총괄하고 다른 기관들과 연계가 필요한 임무를 맡았다. 유더의 공식 집무실도 그 안에 있었다.
“우리가 벌써 벽을 지난 거야?”
“아무것도 안 보였는데 어떻게 된 거지?”
주변 풍경을 보느라 정신이 팔린 엘더 남매는 뒤늦게 그들이 완전히 2구역에 들어선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묵묵히 걷기만 하던 나단이 그 질문에는 답을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걸음 속도를 조금 늦추고 입을 열었다.
“벽은 이미 지났습니다.”
“언제요?”
“검문소를 지난 직후입니다. 1벽은 특수한 마석을 깐 길의 형태로 원을 그리며 구역 전체를 감싸고 있다고 합니다. 그 위에 정원을 만들어 일부러 가렸으니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제야 태양궁 주변에 유난히 정원이 길게 계속 이어져 있던 것을 상기한 듯 엘더 남매의 표정이 변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가케인 또한 처음 안 사실에 흥분했는지 볼이 조금 붉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