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조용한 궁 안쪽에 자리 잡은 문 바깥에 키시아르와 마병단원들을 세워둔 시종장은 공손히 문을 두드린 뒤 먼저 안에 들어갔다. 이곳에는 보통 있어야 할 경비 기사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아 더욱 적막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곳이 정말 한 제국의 황제가 머무는 곳이란 말인가? 모두의 시선 속에 은밀한 의문이 싹텄다.
‘키시아르도 하인을 따로 데리고 다니지 않고 나단 주커만 한 명만 거의 곁에 둔 것을 보면 형제끼리 뭔가 비슷하게 통하는 것이 있는지도 모르겠군.’
유더 또한 그 적막함 속에서 나름대로 그럴싸한 추측을 했다.
“폐하께서 알현을 허락하셨습니다. 들어오십시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시종장이 도로 모습을 드러냈다. 키시아르는 시종장이 열어 준 문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단원들은 모두 그의 뒤를 따랐고, 일행의 맨 뒤에서 여태 조용히 걸어오던 나단 주커만만이 자연스레 문밖에 남았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바로 뒤에서 걸으며 주변 풍경을 빠르게 살폈다. 그곳은 한 공간 안에서 최대한 모든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장소 같았다.
밝은 빛이 쏟아지는 유리창 아래 깃펜이 종류별로 나란히 정리된 집무용 책상이 있었고, 그 옆에는 자유롭게 꽂히고 쌓인 장서와 서류가 뒤섞여 마른 종이 냄새를 짙게 풍겼다.
공간을 나누기 위해 설치한 듯한 아치형 가리개 뒤로는 커튼을 친 침대가, 또 그 옆에는 독특한 향을 뿌리는 검은 차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으니 먹는 것과 자는 것, 일하는 것이 모두 한꺼번에 가능할 듯했다.
그리고 이 궁의 주인인 황제는 그 어느 곳도 아닌 벽 아래 놓인, 등이 긴 의자에 앉아 그들을 맞이했다.
“왔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니 그 이상 다가오지 않는 편이 좋겠군.”
황제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키시아르가 걸음을 멈추었고 그에 따라 모든 단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메마른 기침을 몇 번 한 뒤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본래대로라면 7궁에서 그대들을 맞이해 가장 영광스러운 방식으로 치하하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어쩔 수 없이 이곳에서 보게 되는 것을 이해해 주길 바라네.”
“맡겨 주신 임무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으니 그것으로 족합니다.”
키시아르가 우아하게 대답하며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예상치 못한 풍경을 마주하여 한껏 놀란 상태였던 마병단원들도 재빨리 그를 따라 무릎을 꿇었다.
“좋다. 고개를 들라.”
잠시 후 황제가 조용히 고개를 들 것을 명했다.
유더는 드디어 황제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지배자라기보다는 오래도록 연구만 해 온 학자 같은 느낌의 사내였다. 이목구비는 키시아르와 놀랍도록 닮았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키시아르가 장신에 어울리는 단단한 체격을 지녔으며 그의 느른한 미소에서 여유로움이 느껴진다면, 황제는 예민해 보이는 마른 체격에 웃음이라곤 모를 듯 피로한 눈빛을 안경으로 가렸다.
분명 윤기가 흐르는 키시아르의 외모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국정도 돌보지 못할 만큼 병환이 깊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를 살피던 유더는 그 피로해 보이는 모습에서 어떤 기시감을 느꼈다.
‘어디선가 비슷한 모습을 본 것 같은데…….’
아.
그때 황제가 고개를 살짝 돌려 유더의 얼굴을 짧게 살폈다. 그 순간 유더는 그가 느낀 기시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어젯밤 꿈속에서 본 키시아르에게서 받았던 바로 그 느낌이 황제에게도 있었다.
윤기를 잃은 머리칼과 눈동자. 모든 빛이 쇠하고 재만 남겨지기 직전의 난롯불처럼 새하얀 얼굴.
본디 가지고 있던 모든 찬란함이 깨지고 죽음을 앞두고 있던 꿈속의 키시아르와 지금의 황제가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무어라 설명할 수 없이 닮아 보였다. 어째서일까.
유더가 그 기이한 감각에 입을 벌린 순간 황제가 느릿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기운만 보아도 친애하는 펠레타 공작이 맡은 바 임무를 완벽히 수행하였음을 믿을 수 있겠군. 짐이 오랫동안 찾아온 것을 드디어 손에 쥐게 되었으니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
기쁘다고 말하면서도 황제의 눈에는 웃음기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미소는 전부 형제인 키시아르가 빼앗아간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말을 마친 뒤 잠시 길게 숨을 내쉰 황제는 다섯 명의 마병단원들의 면면을 자세히 살폈다.
“짐은 일찍이 2년 전 그것이 떨어진 직후부터 손에 넣기를 원하였으나,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궁중 마법사도, 황궁기사단의 용맹한 기사들도, 비밀리에 고용한 용병들도 모두 실패하였다. 그러나 단 한 사람, 펠레타 공작만은 성공할 수 있다고 자신하였지. 단, 붉은 돌의 힘을 각성한 이들을 모아 마병단이라는 것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는 조건을 걸고서 말이다.”
“그런 옛날이야기는 무엇 하러 말씀하십니까.”
키시아르가 짐짓 황제를 말리는 척 낮게 웃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짐은 처음에 믿지 않았다. 그러나 2년이 지나고 바로 오늘, 공작은 정말로 내 앞에 그것을 가져왔구나. 거기에 분명 너희들도 힘을 보탰을 터.”
“황송합니다.”
모두를 대신하여 가케인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진심으로 이 상황에 감격하고 있었다.
“짐은 짐을 위하여 애쓴 자들을 잊지 않는다. 너희 다섯 명에게 각각 ‘경’의 칭호와 북부산 최고급 마석 10나르를 하사하고 마병단을 위한 훈련소를 한 채 내리도록 하겠다.”
기사가 아니라도 ‘경’의 칭호는 받을 수 있었다. 가장 젊은 궁중 마법사들이 대개 그 칭호에서 시작하여 점차 높은 작위를 받아나가고는 했다.
그런데 마병단원 모두에게 성을 하사한 것으로도 모자라 붉은 돌을 가져온 이들에게 따로 칭호까지 내리다니, 실로 파격적인 대우였다.
황궁에 온 이후 잔뜩 긴장하여 내내 고개를 들지 못하던 칸나조차 그 순간 깜짝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황송합니다!”
“폐하, 제 부하들에게 내려 주신 상은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을 잊으셨군요.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을 책임진 제게도 따로 상을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키시아르가 하사가 끝나자마자 재주 좋게 끼어들었다. 아무리 동복형제 사이라고는 하나 감히 황제에게 그리 가벼운 말투를 쓰다니.
마병단원들은 황제가 화를 내지 않을까 걱정하였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은과 청금석을 이어 만든 줄을 단 안경을 콧날 위로 밀어 올린 황제는 웃고 있는 공작을 바라보며 미간만 한번 살짝 찌푸렸을 뿐이었다.
“펠레타 공작. 그대는 지난 2년간 이미 짐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혹 제 숙소에 정체 모를 각성자 흉수가 열 명도 넘게 쳐들어왔다는 보고를 듣지 못하셨습니까? 붉은 돌이 폭발했었다는 보고는요?”
“…….”
“저는 이것을 가져오기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러니 더 주십시오.”
대담한 말투에 가케인이 숨을 삼켰다. 엘더 남매는 은밀히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칸나는 긴장하여 고개를 숙였고, 유더는 키시아르의 홀릴 듯한 미소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키시아르를 노려보던 황제가 한숨을 내쉬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의 얼굴에 피곤함이 더욱 쌓였다.
“그래. 무엇을 원하기에 이리 품위 없이 구는지 말해보아라.”
“시간을 원합니다.”
“시간?”
황제가 의아하게 반문했다.
“네. 이것을 좀 더 살피고 싶습니다.”
유더의 심장이 순간 크게 뛰었다. 키시아르는 누구보다 태연한 표정을 지은 채 오직 앞만 보고 있었다. 황제가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회수를 위해 가 있는 동안 이미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보지 않았나? 공작의 임무는 그것을 가져오는 것이지, 조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의 적격자는 마법사들이야. 한 번도 그런 일을 해 보지 않은 이에게 맡기기에는 너무 위험해.”
“이런, 폐하. 제가 어젯밤 보낸 보고서를 전부 읽으신 줄 알았는데 미처 다 보지 못하신 모양입니다. 이 상자 주변에 제대로 다가가지도 못할 이들이 정말로 이것을 잘 조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진짜로?”
키시아르가 낮게 웃으며 도발적인 대꾸를 했다.
“회수 임무를 맡겨 주셨던 때와 똑같습니다. 결국 이것이 지닌 힘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이는 이것의 힘으로 각성한 이들뿐입니다. 마병단에는 특이한 능력을 지닌 이들이 많으니 분명 욕심 많은 마법사들보다 훨씬 의미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으실 겁니다. 장담하지요.”
“…….”
거침없이 이어지는 유려한 주장이 듣는 이들의 혼을 쏙 빼놓았다. 그 확신 가득한 주장을 듣고도 그의 말을 믿지 않는 쪽이 오히려 바보가 될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혹시라도 조사 도중 위험한 일이 일어난다면 어쩔 셈인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마땅히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단장 자리를 내놓으라 해도 말이냐?”
황제의 느릿한 물음에 마병단원들의 숨이 헉하고 멈추었다. 커다란 창을 통해 아낌없이 쏟아지던 햇볕조차 그 순간만큼은 얼어붙은 듯했다.
유더 또한 황제가 그렇게까지 말할 줄은 예상치 못했기에 미간을 찌푸렸다. 유일한 동복형제라 어느 정도 편의를 보아줄 것이라 여겼으나 아니었다. 황제는 생각보다 훨씬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그러나 키시아르만은 황제가 마치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말했다는 양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나 제가 걱정되십니까? 이 나이에 이리 염려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걱정이라니? 누가 들어도 협박이다. 모두의 머릿속에 순간 같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