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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50화 (50/805)

50화

푸른색 띠는 황제를 바로 곁에서 모시는 이를 뜻하고, 다섯 개의 매듭은 궁에 들어온 지 50년이 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황금색 술은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을 상징하니, 그에 해당하는 자는 황제의 시종장뿐이었다.

유더는 이전 생에서 그를 본 기억이 없었다. 아마도 현 황제가 죽음과 동시에 사라진 인물인 듯했다.

“폐하께서는 2궁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십시오.”

“오늘은 펠레타 공작이 아니라 마병단장으로서 방문한 것인데, 호칭을 바로 해 주었으면 좋겠군.”

“아, 그렇군요. 늙은이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시종장은 키시아르와 제법 친밀해 보였다. 유더는 그의 시선이 마병단원들을 짧지만 주의 깊게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

마병단원들은 긴 회랑과 정원을 지나는 동안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긴장한 정도가 심한 사람은 역시 칸나였다.

유더는 그녀가 지나치게 고개를 푹 숙이고 걷고 있는 모습이 이곳에 오기 전 보였던 기이한 모습의 연장선이리라 여겼다.

그녀는 제 모습을 다른 이들의 시선 속에서 숨기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유가 궁금했지만 이렇게 조용한 상황에서는 따로 말을 걸 수 없으니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시종장이 세 번째 회랑을 지나 정원 사이로 난 길을 거침없이 걸어갔다. 2궁이라고 했으니 앞으로도 몇 개를 더 건너야 할 터였다. 그러나 그렇게 오랫동안 궁 내를 걷고 있음에도 태양궁에는 사람의 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이전 생의 기억 속에서 태양궁은 수많은 시종과 시녀, 알현을 위해 방문한 귀족들, 외국 사절들로 언제나 북적이는 곳이었다. 유더에게는 이 고요함이 특이하게 느껴졌으나 시종장과 키시아르는 익숙한 듯 보였다.

‘태양궁에 이리 사람이 없는 것은 현 황제의 뜻인가?’

그리 생각한 순간, 시종장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누군가 오고 계시는군요.”

잠시 후 그의 말대로 정원 오른편 연못 너머에서 여러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들은 시종장과 그 뒤의 키시아르, 그리고 마병단원들을 발견하고는 일제히 걸음을 멈추었다.

허리에 띠를 두른 것을 보니 시종 무리였다. 다만 그들이 맨 띠는 황혼처럼 진한 붉은색이었다. 유더는 그 붉은색이 누구를 모시는 이들의 색인지 알고 있었다.

적색은 제국의 미래를 책임질 황태자의 색.

그리고 현 황태자는 미래에 유더가 죽을 때까지 모셨던 바로 그 황제, 카치안 라 오르였다.

“산책을 하던 중 익숙한 모습이 보인다 했더니, 펠레타 공작께서 방문하셨군요.”

키가 큰 시종 무리가 양쪽으로 갈라지며 그 안에서 한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외모는 키시아르 라 오르와 같은 황실의 피를 이은 자임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닮아 있었다.

태양신의 축복이 서린 아름다운 금빛 머리칼과 붉은 눈동자, 아직 어리지만 한눈에 띄는 뛰어난 외모는 분명 황족의 특징 그대로였다.

비록 이전 생에서 처음 봤을 때보다 더욱 작고 어린 모습이라고는 하나, 저 얼굴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유더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통증이 과거와 현실을 구분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눈앞의 소년은 아직 황태자였다. 카치안 라 오르는 유더 아일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지금 이 순간 그의 시선은 오로지 시종장과 키시아르에게만 향했다.

그것을 보며 유더는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지금은 과거가 아니다. 예전과는 많은 것이 바뀌었고 계속해서 달라지게 될 것이다.

저 앞의 황태자가 몇 년 뒤 키시아르 라 오르를 향해 태연히 암살 명령을 내리지 못하게 하는 것. 그가 막고 싶은 것은 바로 그 미래였다.

목이 잘리기 전 황제를 원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그런 감정조차도 마지막에는 전부 사라졌다. 마병단장 유드레인 아일의 후회는 거기서 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죽기 직전 끔찍하게 지친 채 자조하며 떠올렸던 생각들을 다시금 떠올렸다. 거기에 복수를 향한 열망은 없었다.

그는 복수를 위해 마병단에 다시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물론 키시아르를 살리고 자신도 살아야 하니 카치안 라 오르가 과거처럼 평탄하게 황제가 되도록 놓아둘 생각은 없다.

이전 생에서 지켜본 그의 모습은 훌륭한 군주라기에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나설 만한 정도로 힘이 쌓인 때가 아니었다. 시기가 너무 일렀다.

유더는 감았던 눈을 뜨고 앞을 보았다. 공교롭게도 그 순간 가장 먼저 본 것은 키시아르 라 오르의 곧게 뻗은 뒷모습이었다. 그는 그저 등 뒤의 단원들에게 그늘을 드리우는 큰 나무처럼 여유롭게 서 있었다.

단지 그것뿐인데도 그 모습을 본 순간 갑자기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던 감정이 서서히 가라앉고 평소의 침착함이 되돌아왔다. 잠시 후 그는 몇 번의 심호흡을 마치고 한결 냉정해진 눈으로 카치안 황태자와 키시아르의 대화를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이런 곳에서 황태자 전하를 뵙다니, 오늘은 제게 행운이 함께하는 날이 될 모양입니다.”

키시아르가 느른한 미소와 함께 대꾸하자 황태자의 입가에도 웃음이 걸렸다. 얼굴만 보아서는 어디로 보나 진심으로 반가워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펠레타 공작께서는 바쁘시니까요. 요즘은 더욱 바빠지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오늘 이리 건강한 모습을 뵈어 기쁩니다.”

“설마 제 건강을 염려해 주셨습니까? 황송하군요.”

“그런데 공작의 뒤를 따르는 낯선 자들은 누구입니까? 전에 보지 못한 얼굴들이군요.”

황태자의 시선이 마병단원들 쪽을 스쳤다. 유더는 그의 시선이 제 얼굴로 향한 그 짧은 순간, 다시 한번 주먹을 꽉 쥐었다가는 가만히 풀었다.

“그들은 제가 얼마 전 만든 마병단 단원들입니다. 장차 이 제국의 힘이 될 인재들이지요.”

“호오. 이야기는 익히 들었습니다. 공작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갑자기 기대가 솟는군요. 언젠가 실력을 직접 볼 날이 오기를 바라겠습니다.”

“하하. 분명 깜짝 놀라게 되실 것입니다.”

듣기 좋은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 마병단원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황태자는 마병단과 관련하여 몇 마디 이야기를 더 나눈 뒤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실은 멀리서부터 기이한 기운이 느껴져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인데, 공작을 만나고 나서야 정체를 알았습니다. 여기서 더 다가가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그 상자 안에는 대체 무엇이 들었습니까?”

더없이 매끄러운 말투였지만 의미하는 바는 확실했다. 유더는 키시아르가 들고 있는 작은 상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카치안 라 오르를 10년 가까이 보았던 그의 감으로 느끼자면, 저것은 정말 몰라서 묻는 말이 아니었다. 황태자는 이미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단지 확인을 받고 싶어 할 뿐이었다.

‘알면서도 보러 왔다는 건 뭔가 확인하고 싶었다는 뜻. 별 것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어쩌면 키시아르와 붉은 돌을 노렸던 배후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지.’

이곳까지 오는 동안 유더는 계속해서 침입자들의 배후를 고민했다. 그야말로 수많은 가능성이 있었다.

붉은 돌을 호시탐탐 노리던 타국의 왕들, 겉으로는 신이 내려주신 새로운 힘이라 말하였으나 이 상황이 그리 반갑지 않을 태양신 교단, 그 돌을 연구하고 싶어 견디지 못할 진주탑 마법사들, 그 외에도 후보는 많았다.

그리고 그중에는 이전 생에서 키시아르 라 오르를 직접 죽이라 명령했던 카치안 라 오르도 존재했다. 제국에 힘이 될 붉은 돌을 황태자인 그가 그런 식으로 노릴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가능성은 낮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었다.

유더가 은밀히 저를 살피는 것을 모른 채 황태자는 그저 미소만 지었다.

“죄송합니다. 저도 말씀드리고 싶으나, 폐하께서 명하신 일과 관계된 것이라 보고를 드리기 이전에는 입을 열기가 어렵겠습니다.”

웃고 있는 것은 키시아르 또한 마찬가지였다. 웃고 있지 않으면 상당히 냉정하고 사나운 인상이 되는 황태자와 달리, 키시아르는 속을 알 수 없는 태연함과 느긋함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아, 그런 바쁜 용무로 방문한 것이라면 더 붙잡을 수 없겠군요. 후에 다시 뵙게 된다면 사양 말고 간만에 함께 차라도 드시지요.”

황제가 핑계로 나오니 황태자는 곧바로 발을 뺐다.

“알겠습니다. 오늘은 날씨가 좋으니 황태자 전하께서는 모쪼록 이 아름다운 풍경을 마저 편안히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키시아르의 뒤에서 마병단원들도 함께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나 각자 인사 동작이 제각각인 정돈되지 않은 모습에 황태자의 시종들이 미간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다. 한눈에 보아도 마병단원들을 천한 자들이라 멸시하는 기색이었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뒤를 따라 한참 걷다 말고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시종들과 함께 멀리 사라져 가는 황태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폐하께 말씀을 드리고 오겠습니다.”

황태자와 헤어진 뒤에도 단원들은 꽤 오랫동안 궁을 가로질러 걸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회랑과 정원으로 이어진 여러 개의 건물 중 가장 안쪽에 위치한 2궁이었다.

태양궁은 총 7개의 건물이 특이한 모양을 그리며 이어지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안에 있으면 그저 기이한 구조로 느껴질 뿐이지만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그 모습은 어떤 별자리와 같다고 전해졌다.

각 궁에 붙여진 숫자 순서와 실제 위치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2궁은 7개의 건물 중 입구에서 가장 먼 곳에 있어 방문하기가 몹시 불편했다.

이전 생에서 카치안 라 오르가 황제였을 때 그는 이 2궁을 거의 사용하지도 않았었다. 역대 황제들은 그곳을 가장 늙고 지쳐 외부와의 소통을 차단하고 싶을 때나 사용했다.

시종장은 바로 그곳에서 현 황제, 케일루사 라 오르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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